메뉴 건너뛰기

close

표지
표지 ⓒ 새울림
아마도 이 불안은 세계적인 현상인 듯하다. <위험 사회> 저자 울리히 벡의 배우자이자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의 공저자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의 <가족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는 '비슷한 불안'의 독일 버전, 혹은 유럽 버전을 보여준다. 독일의 여성가족학자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은 기존 핵가족이 해체되고 있으며 유럽 사회가 격변을 겪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를 논한다.

결혼 이후 남편의 성을 따라야했던 규정은 1977년 이래 바뀌었다. 남편 성이나 부인 성 아무 쪽이나 쓸 수 있고, 두 개의 성을 따서 쓸 수도 있으며, 다른 성씨를 갖고 몇 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공동의 성씨를 결정해 쓸 수도 있다. 이런 변화로 인해 아이들은 공식적으로 두 개의 성씨(엄마 아빠의 성씨 모두)를 갖기도 한다. 딸은 엄마의 성씨를 아들은 아빠의 성씨를 따르도록 부부간에 합의하기도 한다. 부부의 이혼으로 당분간 (해당 관청의 결정이 있기까지) 성씨가 사라진 채 이름만 있는 아이도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과 아내도 확실하지 않다. 인공수정 등 생식의학의 발달은 '아버지'가 누구냐에 대한 문제도 불러온다. 대리모의 경우에는 '어머니'의 존재마저 모호해진다. 여기에 더해 사람들은 결혼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않는다. 직업, 여가활동, 일상생활, 심지어 공적인 서류와 초대장에서조차도 '커플', '파트너 관계', '동거 관계/교제 관계'라는 말이 점점 많아진다. 전반적으로 '생활의 동반자', 나아가 '생애의 한 시기의 동반자'라고 여기는 추세다.

사회의 불안은 단순한 정체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여성들이 '무임금 가사노동'을 거부하며 뛰쳐나간 탓에 발생한 노인 부양 문제와 아이 출산, 양육문제가 현실로 남아있다. 이 모든 문제를 봉합해주던 하나의 해답, '가족'이 끝났다.

그렇다면 이후의 해답은?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은 '이혼과 재혼, 이혼 등으로부터 생겨난 협상가족, 교환가족, 다수 가족'이라는 좀 모호한 대답을 내놓는다. '가족 이후에 새로운 가족이 온다'는 답이다. 뭔가 혁신적인 대답을 기대한 독자라면 실망할 법하다.

그러나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이 하나의 족보나, 잘 구획된 가족 구조를 거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독일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를 체험했다. 나치 시대 히틀러는 유대인을 1/2 유대인, 1/4 유대인 등으로 분류했다. 아리안 족의 순수혈통을 중시했던 히틀러는 '아리안 여성들의 산후조리와 가정의 어머니'에 집착했다.

여성들에게서 선거권의 일부를 빼앗고, 대학교수 자격과 판사, 변호사 등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빼앗았다. 여대생의 숫자는 10%로 제한했다. 중간 직급인 사무원으로 채용해도, 계약에 따라 임금의 10~25%를 삭감했다. 그는 여성해방은 유대 정신이 낳은 거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여성들에게 어머니와 주부로서의 명예와 가치를 강조했다.

그런 까닭에 가부장 전통과 동시에 인종이나 국적의 '순혈성'을 경계하는 이 책에서는, 새로운 가족, '다문화 가족'에 '재혼 가족', '다성(多姓) 가족', '동성(同性) 가족' 등에 이어 '다인종 가족'까지 끼워 넣는다. 결혼하는 커플의 8쌍 중 1쌍 꼴로 다국적 결혼을 하는 독일이다. 누구도 '확실한 게른스하임 핏줄'을 장담할 수 없듯이, '확실한 독일인'을 자신할 수 없다. 책은 곳곳에서 마주치는 이주민, 그들의 자손들에 대해 묘사한다.

마치 인도계 영국인 작가인 쿠레이시의 소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모두 나를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인도 소년. 아하, 얼마나 이국적이고 매력적인가. 우리는 그에게서 어떤 종류의 친척 아주머니 이야기와 코끼리 이야기를 듣게 될까'". 이러한 생각은 그 인도 소년이 런던의 한 교외 지역인 오르핑톤 출신이며 인도에는 가본 적도 없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 계속된다. (210쪽)

우리 나라에도 다문화 가족 지원센터가 있다.
우리 나라에도 다문화 가족 지원센터가 있다. ⓒ 다문화가족지원센터
독일에서 가족 개혁은 활발히 실험 중이다.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은 다문화 가족을 수용하는 세금 제도와 양육, 노인 돌봄 등의 노동 문제에 대해 사회적인 해결을 촉구한다. 책에 따르자면, '새로운 성별 계약' 없이는 '세대 간 계약'도 없다. 몇 가지 가능한 해답지 중에 반드시 피해가야 할 한 가지 오답도 제시한다.

'가정의 가치'를 강조하며 여성만을 편파적으로 염두에 두는 사람은 여성의 경제적 불이익을 고착화하는 사람이다. 즉 이 모델은 근본적으로 "여성에 대한 추가 과세 - 암암리에 대표 기관 없이 징수된 세금-"를 초래한다. (141쪽)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독일 여성들의 현주소
로제마리 나베-헤르츠의 <독일 여성운동사>

여성 쉼터, 여성 커피숍, 여성 술집, 여성 택시, 독일의 여성가족부인 '여성과 청소년 부처'까지. 독일 여성운동이 걸어온 역사와 현재의 위치를 개괄하는 책이다.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여성운동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드문 책이기도 하다.

1840년대를 독일 여성운동의 출발점으로 짚는 이 책은 독일 여성운동의 주창자로 간주되는 루이제 오토-페터스(Luise Otto-Peters 1819-1895)로부터 시작한다. "자유의 제국에 여자 시민을 구합니다"라는 모토의 여성신문이 창간된 때이기도 하다.

이후 독일 여성연합(BDF)이 결성된 이야기부터 동독과 서독 각국에서 여성운동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설명한다. 196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된 '신여성운동'은 현재 한국의 여성운동과도 맞닿는 점이 있어 흥미롭다. 이 운동에서 사회주의 독일 학생연합 여학생들은 '사생활의 영역에서 여성들에게 권위적으로 행동하며 이를 당연시하던 남성 동지'들에게 토마토를 던지며 항의했다고 한다.

최초의 여성총리 앙겔라 메르켈이 배출된 독일의 경우, 공적 영역에서 여성의 균등 채용, 여성 대의원 등이 잘 갖춰져 있다. 1991년 '여성과 청소년 부처'가 별도로 운영되고 있으며 (1993년 이후 가족, 노인, 여성과 청소년 부처), 모든 연방 내각에 여성정책을 다루는 전문가가 있는 활동 부서가 있다. 녹색당의 경우 여성들이 처음부터 모든 직위와 의원직의 반을 요구하는 '지퍼원칙'을 내세우기도 했다.(선거인단은 이에 따라 채워졌다.)

여성들이 차별을 느끼는 일이 드물게 되어 '여성운동은 죽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기도 했다. 저자는 바벨리스 비크만의 말을 인용하여 이 상황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역사는 되돌아가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많은 여성의 머리와 가슴에, 기관 내에서 그리고 일상생활에 자리잡고 있다. 가끔 젊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은 지나갔어'라고 가볍게 말한다. 이들은 어머니와 할머니가 투쟁해서 얻은 권리의 자유를 당연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기사 본문 중 나치 독일에 관한 내용은 <독일 여성운동사>를 부분적으로 참고했습니다.) / 김홍주선

#독일여성#엘리자베트 벡 게른트하임#가족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양성쓰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