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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17일 오후 서울 상암동 디지털매직스페이스 스튜디오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과 언론인과의 대화' 장면.
ⓒ 청와대브리핑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 보완대책에 대한 정부와 언론단체의 합의가 결국 무산됐다. 노무현 대통령과 언론단체 대표들의 '대화' 이후 한 달 가까운 협의를 거쳐 14개 항에 걸친 합의안을 만들었지만, 기자협회 내부의 반발과 이견으로 '공동발표'는 무산됐다. 정부는 당초 합의 정신은 살리되, 더 이상의 논의는 없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어찌됐든 정부와 언론계가 협의를 통해 정부와 언론 관계를 전향적으로 모색할 수 있는 합의를 이룰 수 있는 선례가 무산된 것은 아쉬운 일이다. 특히 대립과 갈등으로 점철돼 왔던 그동안의 정부-언론 관계에 비춰볼 때 더욱 그렇다.

하지만 소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최종 단계에서 무산되기는 했지만, 정부와 언론단체가 협의를 통해 바람직한 상호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점은 앞으로 정부와 언론 관계에서 좋은 선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또 정부로서는 아무리 그 정책 취지가 좋다고 하더라도 사전에 충분한 여론수렴을 거치지 않을 때 불필요한 오해를 자초하고, 그 정책을 제대로 추진할 수 없다는 교훈을 재확인하는 계기도 됐을 것이다.

'공무원 취재 적극 응대' 국무총리 훈령 소득

무엇보다 언론계와의 협의과정에서 정부가 내놓은 몇 가지 방안은 앞으로 정부와 언론 관계에서 획기적인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 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것은 언론의 정당한 취재에 공무원들의 성실하고 적극적인 응대를 국무총리 훈령으로 분명하게 못을 박기로 한 점이다.

국무총리 훈령이 과연 제대로 지켜질 수 있을 것인지 하는 의문은 있을 수 있다. 말 뿐인 생색내기에 그치지 않겠느냐는 언론계의 회의적인 시각도 나올 법 하다. 하지만, 정부가 국무총리 훈령으로 정당한 취재에 대한 성실하고 적극적인 응대의 의무화를 선언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언론은 정부와 공무원들의 부당한 취재 기피 행위에 대해 당당하게 따질 수 있는 근거를 갖게 됐다. 정부와 공무원들 역시 언론의 정당한 취재활동에 대한 협조와 편의 제공에 대한 분명한 가이드라인과 법적 근거를 갖게 된다.

사실 언론과 정부는 숙명적으로 갈등과 대립의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정부로서는 정보를 감추고, 통제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언론은 그 장벽을 뚫고 정보에 접근해야 하는 숙명을 갖고 있다. 정부가 언론에 완벽하게 정보를 공개한다는 것은 이상적일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바로 그렇기에 언론의 존재 이유가 있다.

공무원들이 언론의 취재를 기피하고 꺼리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언론 보도의 파장에 따른 문책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취재에 응했다가 된통 당하는 꼴을 숱하게 보아왔던 공무원들로서는 언론의 취재에 일단 겁부터 내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국무총리 훈령으로 언론의 정당한 취재에 대한 성실한 응대를 의무화하는 것은 설령 그것이 '선언적 가이드라인'에 불과할지언정 그 의미가 작지 않다. 공무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당한 취재 요청에 당당히 응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총리 훈령이 제정된다 해서 언론에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공무원 문화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다. 하지만 고위 관료들이, 일선 공무원들이 지금보다는 마음 편하게 언론을 대하고, 기자들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과소평가할 일이 아니다.

취재 응대 강제화 무리...언론과 기자도 달라져야

▲ 김창호 국정홍보처장이 지난 5월 22일 오후 세종로 정부합동청사 브리핑실에서 '취재지원 선진화 방안'을 설명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런 점에서 한국기자협회 취재환경 특위가 이같은 합의문을 거부한 것은 아쉽다. 나아가 특위가 제시한 별도의 안을 보면 너무 '오버'한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기자협회 특위는 공무원에 대한 대면 취재가 가능하도록 관리직 이상 공무원이 취재를 회피하면 내부 절차를 통해 책임을 묻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기자들의 전화 취재를 회피하는 것에 대해서도 역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적극적으로 취재에 응한 공무원에 대해서는 업무수행 평가에서 '가점'을 주도록 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지침을 밝혔다.

일선 취재 현장에서 기자들이 겪는 어려움과 불편함을 고려할 때 오죽하면 이런 구체적인 지침까지 내놓았을까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공무원 역시 언론과 기자에게는 당연히 다른 취재원이나 다를 바 없이 그 인권과 자율적 판단을 존중해야 할 취재원이다. 언론의 취재는 취재원의 자발적 협조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 또 그래야 한다. 강제된 취재는 언론의 취재가 아니라, 그것은 또 다른 권력기관의 '취조'이자 '조사'가 될 위험 요소가 다분하다.

물론 한국의 공직 사회는 다른 OECD 국가 공무원들과 비교해 볼 때 너무도 관료적이고 폐쇄적이다. 또 공무원을 비롯한 공직자들은 국민의 알권리를 대변하고 있는 언론의 취재에 당연히 응대해야 할 책무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자의 취재에 응할 것인가, 말 것인가 까지를 강제하겠다는 발상은 위험하다. 어디까지나 그 판단은 공무원들의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결정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그 경계를 설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언론과 정부가 신뢰를 쌓고 또 우리의 정치·사회·문화의 성숙과 함께 부단히 그 접점을 모색해야 할 문제다. 언론의 입장에서는 유감일 수 있지만, 공무원들이 '정당하게' 언론의 취재를 거부할 수 있는 문화와 제도가 정착될 때 비로소 언론과 정부-공무원 관계도 정상화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공무원들이 크게 바뀌어야 하겠지만, 언론과 기자 또한 바뀌어야 한다. 앞뒤 맥락 자르고 '사실'이라는 명분으로 진상을 왜곡하는 보도 행태, 얼마든지 자신의 노력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보와 자료임에도 모든 자료를 다 내놓으라는 식의 안이하고 권위적인 취재 행태, 정파적인 여론몰이와 같은 부정적인 행태부터 고쳐나가야 한다. 언론에 대한 공무원들의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대응에는 언론과 기자들이 자초한 측면이 적지 않음을 자성할 필요가 있다.

최종합의 무산, 기자사회 공신력 실추

▲ 한국기자협회 관계자들이 지난 6월 17일 정일용 회장을 둘러싸고 대통령과 언론인 토론회에 참석하지 말 것을 설득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박상규
기자협회가 정부와의 협의를 통해 '공동발표문안'에 합의하고서도 기자협회 내부의 이견으로 최종 합의가 무산된 것을 두고 박상범 특위 위원장(KBS 기자)이 "기자협회가 이미 정해진 공동발표문에 서명함으로써 정부에 협조한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없어 거부했다"고 말하는 것(<경향신문>)이나, "결국 지난달 17일 노무현 대통령과 언론단체장과의 토론회 후 언론단체의 의견을 수렴해 정부안을 개선하겠다는 약속은 허언이 됐다"(<한국일보>)는 식의 보도부터 그렇다.

기자협회 내부 문제야 기자협회 관계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한 달 가까이 회장이 기자협회를 대표해 합의한 '공동발표문안'에 불만이 있다는 이유로 뒤늦게 그것을 백지화하고 뒤집는 행위야말로 어찌됐든 기자협회와 기자사회의 공신력을 크게 실추시키는 부끄러운 일이다.

협의와 합의의 기본 규칙과 그 신뢰를 깬 데 대한 겸손한 자성 없이 정부에 대해 우리가 다시 안을 만들겠으니 재협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사회 일반의 상식에 비춰보더라도 별 설득력이 없다. 게다가 그 합의 파기의 책임을 정부 쪽에 돌리는 식이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기자들의 상식과 양식, 그리고 현실 감각이 이런 정도라면 그것 또한 크게 걱정되는 일이다.

#백병규#미디어워치#기자실#한국기자협회#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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