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7월 8일 토요일 나눔의 집에선 일본인과 한국인이 나란히 앉아 이옥선 할머니의 증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중엔 나이어린 학생들도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증언이 마무리될 즈음, 이옥선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할머니들은 힘이 없어요.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일어설 사람이 없어. 할머니들은 모두 80, 90이 넘었기 때문에 오늘 죽고, 내일 죽고, 매일 죽어요. 작년 1년에 우리 할머니들이 18명이 돌아가셨어요. 열여덟이 죽었어요. 이렇게 돌아가면 명년에 가면 할머니들 하나도 없어요. 일본선 할머니들 다 죽기를 기다리는 거야. 이러니 얼마나 억울한가 보시오. 할머니들 다 죽으면 배상하라, 사죄하라 소리도 안 하겠지.
그렇지만 우리에겐 후대가 있어요. 여기 앉아있는 어린 학생들이 다 우리의 힘이에요. 할머니들은 여기 앉은 학생들을 믿고 살아요. 할머니들이 죽고 없을 때, 일본서 계속 해결 안 해줄 때는 여기 앉아 있는 분들이 일어서서 할머니들 문제를 해결해야 해요."
지난해 8월 12일 토요일, 증언에 나선 강일출 할머니가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사죄도 못 받고 배상도 못 받으면 이 문제가 우리 후대로 넘어가요. 그럼 2, 3세까지 싸움이 일어나고 갈등을 하게 됩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싸움은 과거를 위한 싸움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오늘을 위한 싸움입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 싸움입니다.
7월 8일, 증언이 끝난 뒤 거처의 바깥에 놓인 평상에 앉아 쉬고 있던 이옥선 할머니께 증언을 다니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우가 언제였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내가 어느 날 독립기념관으로 증언을 갔어요. 그런데 그날은 조그만 학생들이 모여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오늘은 아이들이 어리구만 그랬어요. 할머니, 오늘 학생들은 어립니다. 인솔하고 온 선생님이 그러더군. 초등학교 3학년부터 4학년, 5학년, 이렇게 3개 학년이 온 거야. 200명이 왔는데 강연장이 가득 차는 거야.
그래서 말을 다한 뒤, 말할 사람 말하고, 질문할 사람 물어보라고 했지. 그래 손을 들라 했더니 200명이 몽땅 주먹 드는 거야. 그러니 누가 말하고 누가 듣겠는가. 그래서 선생이 제안해서 다 손 내리라고 했지. 그래서 다 손 내리고 한 사람씩 손들라고 했지.
그랬더니 가운데서 조그만 아이가, 3학년 몇 반이라면서, 김아무개라면서, 손을 드는 거야. 나는 그 아이가 아직도 기억이 나. 조그만 주먹이 쏘옥 올라와. 그러면서 할머니하고 부른다 말야.
그래, 왜 그러는가 했더니, 할머니, 일본 사람이 끌어갈 때 일본 사람이 앞에 갔습니까, 뒤에 갔습니까. 그게 질문이 우스운 거 같아도 '갸'는 그게 예산이 있어 물어보는 거지. 일본 사람이 앞에 서고 우리가 뒤에 서면 뒤에선 도망갈 기회가 있잖아. 그거 생각한 거야. 그랬더니 선생이 대신 답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고, 앞에도 서고, 뒤에도 서고, 옆에도 총 메고 서서 할머니들을 끌어갔다고 하는 거야. 나는 그때 올라온 그 조그만 주먹의 꼬마를 잊을 수가 없어. 아주 기특하지. 그래서 내가 지금도 그 생각을 많이 해. 아마 지금부터 한 3년 전의 일일 게야."
할머니는 일본인들을 앞에 놓고 증언을 할 때 종종 "우리에겐 후대가 있다"는 말을 입에 올리십니다. 아마 그 아이도 할머니가 말하는 그 후대였을 것입니다. 어느 날 수요시위에 나선 할머니의 등 뒤에서 엄마의 손을 잡고 나와 "일본 정부는 군국주의 부활 음모를 즉각 중단하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었던 이권명희씨의 딸 안이삭 어린이도 할머니의 후대입니다.
어느 날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나눔의 집을 찾고, 그리고 비디오를 보고 할머니의 증언을 듣고 나서 대학 들어간 뒤 꼭 다시 오겠다며 눈물을 글썽이던 서울 한성여고 학생들도 할머니의 후대입니다.
할머니에겐 분명히 후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나눔의 집 홈페이지: www.nanum.org 또는 www.cybernan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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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 12시 개인 블로그에 동시에 게재합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수요시위의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