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스티븐 킹이 쓴 <유혹하는 글쓰기>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의 전반부에서 스티븐 킹은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1인칭 시점으로 상당히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다.
<유혹하는 글쓰기>의 전반부를 읽다보면 스티븐 킹이 어떻게 글쓰기를 시작했는지, 언제 좌절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지금같은 세계적인 작가로 성공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스티븐 킹의 최근 작품 <리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내 <유혹하는 글쓰기>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리시 이야기>에 등장하는 작가 스콧 랜던은 마치 스티븐 킹의 모습을 보는 것 같고, 스콧 랜던의 부인 리시 랜던은 스티븐 킹의 부인 태비사 킹과 흡사하다.
스콧 랜던도 스티븐 킹처럼 첫 작품을 발표해서 돈방석에 올라 앉았고, 스티븐 킹처럼 몇 살 터울의 형이 있었다. 스콧 랜던은 어딜 가든 항상 책 한 권을 가지고 다니고, 한때 스티븐 킹이 그랬던 것처럼 술을 곤죽이 되도록 퍼마신다. 그리고 스티븐 킹처럼 요란한 음악을 틀어놓은 채 글을 쓴다.
스콧 랜던은 스티븐 킹처럼 메인 주립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대학생 시절에 피자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던 부인을 만났다. 스티븐 킹의 경우도 비슷하다. 스티븐 킹도 대학 재학 중에 부인을 만났다. 킹은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동네 피자집 웨이트리스가 대학 캠퍼스에 놀러온 줄 알았다고 한다.
작품을 읽으면서 작중 인물과 작가의 실제 삶을 비교하는 것은 좋지 못한 습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리시 이야기>를 읽는 동안 스콧 랜던 부부와 스티븐 킹 부부의 공통점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스티븐 킹은 <리시 이야기>를 통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아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두 살이었을 때 집을 나가버린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이도저도 아니면 킹 자신이 경험했던 '불규칙하고 괴상망측한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홀로 남은 리시에게 접근해 오는 사람들
<리시 이야기>라는 제목도 약간 의외이다. 제목에서 암시하는 것처럼, 이 작품은 스콧 랜던의 부인 리시 랜던이 겪는 이야기다. 스티븐 킹은 여태까지 이렇게 직설적인 제목을 사용한 적이 거의 없었다.
여러가지 면에서 이 작품은 상당히 독특하고 흥미로운 작품이 될 것이다. 스티븐 킹의 작품 목록 중에서도 꽤 특별한 위치에 오를 만한 작품이 될지 모른다.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리시 이야기>는 스티븐 킹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특징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티븐 킹이 쓴 작품에서 주인공이 작가인 경우가 많다. 그중에는 <샤이닝>의 주인공처럼 알콜중독에 시달리는 엉망진창인 작가도 있고, <미져리> <데스퍼레이션>의 주인공처럼 상업적으로 성공했지만 항상 혹평에 시달리는 작가도 있다.
<리시 이야기>에 등장하는 스콧 랜던도 작가다. 전미문학상과 퓰리쳐상을 석권한 베스트셀러작가이자 비평적으로도 나무랄 데 없는 작가다. 그 스콧 랜던은 몇 년 전에 사망하고 부인 리시 랜던이 홀로 남는다.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대부분의 유명작가가 그렇듯이 스콧 랜던 또한 많은 유작을 남기고 떠났다. 2천만 달러가 넘는 재산도 동시에 남겼다. 이들 부부에게는 자식이 없고, 스콧 랜던의 부모는 모두 사망했다. 스콧 랜던에게는 살아있는 형제도 없다. 따라서 그 재산은 고스란히 리시 랜던의 몫이다.
돈 많고 유명한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리시 랜던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들 대부분은 작가가 남긴 유작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그 유작을 이용해서 한 밑천 챙기려는 사람들이다.
공손하고 점잖게 다가와서 유작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지만, 때로는 유작을 넘기라고 과격하게 협박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리시 랜던은 그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그러던 어느날, 최악의 인간이 리시의 앞에 나타난다. 스콧 랜던의 독자이자 이제는 광적인 스토커로 변신한 인간이다. 그는 리시에게 나타나서 단순한 협박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리시를 공포에 질리게 만든다. 리시는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갈까? 경찰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리시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죽은 남편과의 추억, 죽은 남편이 남긴 물건 그리고 정신이 약간 이상한 친언니 뿐이다.
리시는 어떻게 악몽에서 벗어날까
리시는 결국 남편과의 추억을 더듬으면서 남편의 과거로 내려간다. 거기에는 학대받는 아이들이 있고, 그들이 도피하는 환상의 공간이 있다. 이 과거를 공유한다면 리시도 현재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평온하던 일상이 공포로 변해가는 것. 이것은 스티븐 킹이 자주 사용하는 구도이기도 하다. 일상을 변화시키는 요인은 여러가지다. 전작인 <셀>에서처럼 좀비로 변한 인간들일 수도 있고, <리시 이야기>처럼 구체적인 한 인간의 협박일 수도 있다.
그리고 스티븐 킹의 주인공들은 한 데 뭉쳐서 그 공포에 맞선다. 그 인물들은 가족인 경우가 많다. 현실이 정체모를 괴물로 변해버렸다면, 제일 먼저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스티븐 킹의 작품 속에서 공포는, 가족 또는 연인이나 친구들의 공간으로 침입해오는 공포다. 그리고 결국에는 힘을 합쳐서 그 괴물을 물리친다. 물론 어느 정도의 희생을 치르고서.
스티븐 킹은 '소설이란 땅 속의 화석처럼 발굴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소설은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떤 세계의 유물이라고 한다. 제대로 발굴하면 온전한 모양을 갖춘 화석이 나오겠지만, 성급히 달려들다가는 발굴하는 것보다 부수는 것이 더 많을지 모른다.
<리시 이야기>에서 스콧 랜던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스콧 랜던에게 책을 쓰는 것은 풀밭에서 빛깔이 화려한 실을 발견하고 그 실을 따라 쭉 걸어감을 의미한다. 그 실은 중간에 끊길 수도 있고, 때로는 보물로 연결될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는 백사장에 도달한다. 모두가 물을 마시고, 그물을 던지고, 수영을 하고 때로는 빠져죽기도 하는 그 곳에 도달한다.
<리시 이야기>를 읽는 것도 비슷하다. 많은 방언과 속어, 신조어를 사용한 문장들이 눈에 거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숲에서 만난 화려한 빛깔의 실을 따라가는 것처럼, 아니면 숲속의 예쁜 나비를 쫓아가는 것처럼 <리시 이야기>를 펼쳐드는 것은 어떨까. 마지막에 무엇을 만나게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따라가는 과정 자체는 흥미진진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리시 이야기> 1, 2. 스티븐 킹 지음 / 김시현 옮김. 황금가지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