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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속지키기 가족 동행(同行), 가정 매니페스토 서약식'
ⓒ 김정혜
"첫 번째 약속은, 우리 부부의 건강을 위해 일주일에 두 번은 걷기운동을, 한번은 꼭 등산을 하겠습니다. 두 번째 약속은 아이들의 생일날 아이들을 축하해주기보단 아내를 축하해주겠습니다. 아이들의 생일날은 힘겨운 산고의 고통을 감내한 아내가 숭고하고 거룩한 어머니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보단 아내를 더 축하해주겠습니다.

세 번째 약속은 아내를 도와 함께 식탁을 자주 차리겠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보니 남은 건 결국 우리 부부더군요. 일이 바빠 함께 식사할 기회가 많진 않지만 자주 기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함께 식탁을 차려 둘이 오붓하게 맛있는 식사를 하고 싶습니다."


▲ 한국농촌공사의 박태운 지사장 부부
ⓒ 김정혜
예순을 바라보는 한국농촌공사의 박태운(57) 지사장. 30년을 함께 동고동락한 아내에게 하는 약속치고는 참 소박하다. 그런데 그 약속을 하는 박 지사장의 표정이 더 소박하다. 아니 소박하다는 표현보단 쑥스럽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그런 남편 곁에 남편만큼이나 쑥스러운 듯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아내, 쑥스러운 표정은 아마도 겸손인 듯싶다. 숨겨지지 않는 행복에 쑥스러운 겸손조차도 아름다워 보인다.

"남편의 건강을 위해 아침밥을 꼭 차리겠습니다. 이젠 나만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과 함께 행복을 나누기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아내의 약속에 박 지사장은 "허허허" 거리며 얼음부스러기 수북한 팥빙수 같은 시원한 웃음을 내쏟는다. 30년 세월 오로지 남편 뒷바라지에 쏟은 정성도 감지덕지하건만 또 남편을 위한 약속이라니…. 남편의 약속에 아내가 행복하고, 아내의 약속에 아내만큼 행복해 보이는 남편…. 10년쯤 지나 우리 부부도 저런 모습이기를 은근히 기대해본다.

▲ 김포시민회관 다목적홀에서 열린 '약속지키기 가족 동행(同行), 가정 매니페스토 서약식'.
ⓒ 김정혜
7월의 마지막 날. 경기도 김포시민회관 다목적홀에서는 참 아름다운 행사 하나가 펼쳐지고 있었다.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의 후원으로 김포문화원이 주최하고 <김포저널> 신문사가 주관한 '약속지키기 가족 동행(同行), 가정 매니페스토 서약식'이 바로 그 행사다.

행사를 주최한 김포문화원은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시작되고 있는 매니페스토 운동이 가정 내에서도 이뤄져 가정이 아름다운 사회의 근간이 되도록 할 것"이라며 "우리 시대 가정이 안고 있는 무관심, 지나친 간섭 등으로 문제가정, 문제부모와 자녀가 되는 일이 없도록 가정 매니페스토 운동을 사랑으로 실천하여 사회와 국가에 기여할 것을 약속한다"고 밝혔다.

이어 김포문화원은 "부모와 자녀, 나아가 모든 시민이 사랑으로 문제를 극복해 행복한 가정생활이 되는 길잡이가 될 것"이라는 등 3가지 실천 협약을 제시했다.

이에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는 "'약속을 향한 가족 동행(同行), 행복한 가정 매니페스토 운동'이 활발하게 잘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어 김포문화원과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는 서로 협약을 문서로 만들고 이에 서명하여 협약문을 교환하였다.

▲ 김포시민회관 다목적홀에서 열린 '약속지키기 가족 동행(同行), 가정 매니페스토 서약식'.
ⓒ 김정혜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매니페스토'란 단어조차 의아한 듯,

강지원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공동대표의 '매니페스토'란 것이 '약속(공약) 지키기'란 설명이 뒤따른 후에도 의아함이 영 가시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가정 내에서 가족끼리 이루어지는 약속이 뭐 그리 의미 있을까 싶기도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가정이란 것이 혈연으로 맺어진 울타리 아닌가. 약속을 지키든 지키지 않든 가족이기에 별반 문제 될 것이 없다고들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가정이란 울타리는 이미 무언의 약속이 단단히 뿌리 내려 있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부모입장에서는 좋은 부모가 되고자 노력하고, 자식입장에서는 훌륭한 자식이 되고자 노력하고, 부부입장에서는 서로 아끼고 배려하는 최고의 반려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바로 그 약속 말이다.

그러하건대 새삼스레 가족 간의 약속이라니…. 가정이기에 굳이 그런 형식이 필요할까 싶은 모양이다.

행사 중반쯤. 행사 참여자들의 손엔 색종이가 들려 있다. 가족들에게 나름의 약속 몇 가지를 적어보자는 것이다. 장내가 한참 웅성거린다.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는 사람, '맞아 맞아'를 중얼거리며 사람, 턱을 괴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들로 한참 번잡스럽더니 이윽고 너나 할 것 없이 색종이에 뭔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마, 평소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실천하지 못한 것들이 하나 둘 뇌리를 스치는 모양이다.

▲ 할아버지께서는 색종이 가득 무슨 약속을 채워 넣으셨을지.
ⓒ 김정혜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 분은 행여 누가 볼세라 한쪽 팔로 색종이를 가리고 뭔가를 적기도 하시고, 곱게 화장을 한 할머니 한 분은 노란 색종이 가득 깨알 같은 글씨로 약속을 채워 넣으신다.

대체 그 색종이들엔 누구에게 한 어떤 약속이 적혔을까 자못 궁금한 반면,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이건만 약속이란 두 글자에 색종이를 앞에 놓고 저리 몰두할 수 있음이 또한 새삼스럽다.

문득, 뜬금없는 생각 하나. 나는 내 가족에게 무슨 약속을 할 수 있을까. 남편에게 또 딸아이에게…. 그러다 나도 모르게 '피식~' 탱탱하던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 같은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1%의 너그러움으로.' 채 10자도 되지 않는 그 약속 하나도 변변히 지키지 있지 못하면서 또 무슨 약속을 할 수 있을까 싶어서다.

2007년 새해. 나는 나 스스로와 약속 하나를 했었다. 1%만 너그러워지기로. 그건 나 스스로 자신에게 한 약속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론 남편에게 또 딸아이에게 한 약속이었다. 나 스스로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면 남편에게도 딸아이에게도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적으로 말하면 나는 매사에 자를 들이댄 듯한 반듯함을 고집하는 편이었다. 모든 것이 정리 정돈되어 있어야만 직성이 풀렸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제자리를 잃고 나뒹굴어 있으면 당연히 그것을 참아내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좁은 집안을 하루종일 동동거려야 했고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남편이나 딸아이에게 짜증을 내기 일쑤였다.

어느 날, 그런 내게 남편이 '툭' 내뱉는 한마디.

"집이야? 군대 내무반이야? 좀 느슨하게 살면 당신도 편할 텐데…."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집이 아니라 군대 내무반? 아니었다. 순전히 나 스스로 자신의 착각이었다. 집안을 항상 깔끔하게 정리정돈하는 건 오로지 내 가족들을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살게 하고 싶다는 내 마음이 엄청난 착각이었던 것이다.

내 가족들이 원하는 건 군대 내무반 같은 긴장감 속에서의 쾌적함보단 느슨한 편안함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내 착각은 오로지 나 스스로 자신의 성격에 대한 만족감에서 기인한 것이었음을, 그것이 나를 또 내 가족을 참 많이 옭아매고 있었음을 그때야 알게 된 것이다.

▲ 팔순의 시어머니께 일찍 귀가 하겠음을 약속하는 박기원 풍무동장.
ⓒ 김정혜
7개월이 흐른 지금, 아직도 그리 너그럽지 못함을 시인한다. 그러나 휴대폰을 열 때마다 휴대폰 화면에 빨간 글씨로 입력시켜놓은 그 약속이 나를 움찔하게 한다. 그렇기에 하루에도 수없이 빨간 경고에 움찔하면서 빨간 경고에 당당해지는 그날을 위해 이 순간을 산다.

왜? 나 자신과 내 가족에게 책임을 다하기 위해. 그리하여 그 책임 앞에 당당해지기 위해. 약속이란 건 결국 그런 당당함인 듯싶다. 더불어 책임감과 그 책임감에 따른 당당함이 결국 매니페스토 운동의 뿌리 아니겠는가.

행사 말미. 예순을 바라보는 박기원 풍무동장이 팔순의 시어머니에게 약속을 한다.

"어머니, 사회생활 한답시고 가정보단 사회 일에 너무 열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귀가시간이 늘 늦었습니다. 이제부턴 일찍일찍 들어와 어머니와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모시고 좋은데도 가고 좋은 음식도 많이 대접해 드릴게요."

팔순의 시어머니는 그저 빙그레 웃고만 계신다. 이어 울려 퍼지는 김포시립어머니합창단의 '즐거운 나의 집'을 며느리와 두 손 마주 꼭 잡고 함께 흥얼거리신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네~~."

#매니페스토#아름다운 약속#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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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자회원이 되고 싶은가? ..내 나이 마흔하고도 둘. 이젠 세상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하루종일 뱅뱅거리는 나의 집밖의 세상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곱게 접어 감추어 두었던 나의 날개를 꺼집어 내어 나의 겨드랑이에 다시금 달아야겠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훨훨 날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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