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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 부위(副尉)시절의 김창환 장군
ⓒ 라영수

부끄러우나 8월만이라도, 우리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온몸을 불사른 우리들의 영웅을 기려야 한다.

국가보훈처의 협조를 얻어 우리는 영추당(秋堂) 김창환(金昌煥) 장군의 자부를 뵐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인자한 모습의 올해 79세인 할머니(황명수)는 오래 못 만난 가족을 맞듯이 따듯이 손을 잡으며 응접실로 안내하셨다.

서대문구 홍은동에 자리한 김창환 장군의 2째 자부님이 혼자 사시는 아파트를 힘들게 찾아 들어가니, 연락을 받은 후 줄곧 기다리셨다는 것이다.

▲ 김창환 장군의 둘째 자부 황명수 선생님
ⓒ 라영수
바랜 사진첩과 국사편찬위원회의 대한독립운동공훈사를 펼쳐놓고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을 또랑또랑 해나가시는 황 선생님은 설명이 깊어질수록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눈시울을 적시곤 하여 우리를 숙연케 하였다.

대한독립운동공훈록에 의하면 김창환 장군의 공훈은 아래와 같다.

"김창환 장군(1872.4.9~1937.2.12)은 광주(廣州) 사람으로 대한제국시대 육군 부위(副尉)를 역임하였으며, 1905년 소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군복을 벗어던지고 각 지방 의병 운동의 연락 책임을 담당하였다.

1909년에는 동지들과 압록강을 건너 요녕성 유하현삼원보추가촌 (遼寧省柳河縣 三源堡鄒家村)에 도착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전념하였다.

1910년 4월에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을 훈련하였다. 1914년 신흥학교의 교관으로서 동교(同校)를 군사전문 교육기관으로 개편하여 이청천(李靑天), 이범석(李範奭) 등과 협력하여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1920년 9월 청산리 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에서 승리한 이후 조직되는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대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22년 2월에는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했을 때 그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25년 길림(吉林)에서 동포사회의 치안확보 및 독립군의 국내 진격을 추진하였다.

1932년 한국독립군은 중국의 항일반만군(抗日反滿軍)과 연합하여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때 그는 총사령 이청천을 도와 부사령을 맡아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35년 신익희(申翼熙) 등과 협력하여 주요간부로 활동하였으며, 1937년 2월에는 대표 회의를 개최하고 한국민족혁명당 (韓國民族 革命黨)으로 개칭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이역에서 숨을 거두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김창환 장군의 건국공로훈장증
ⓒ 라영수

황명수 선생님은 벽에 걸린 빛바랜 <훈장증>을 가리키면서 “아버님(김창환 장군)은 말술을 드시는 호걸이셨다 합니다. 인자하고 말이 유창하여 경술국치 당시에는 대한문 앞에서 읍소, 상소하는 유림과 애국지사들을 설득하여 귀가시키는 역할도 하셨다 합니다. 나라가 왜놈의 손에 떨어지자 동지들과 함께 만주로 가셔서 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하여 무장투쟁을 하셨습니다”라고 숙연한 기분이 들도록 설명을 하였다.

세태가 어지럽게 돌아가고 이익만을 취하는 사람들로 세상을 어지럽혀져도 우리 가슴속에 김창환 장군이 계시는 한 우리나라의 앞날은 어둡지만은 않다고 생각이 들었다.

▲ 김창환 장군의 공훈이 실린 제1집
ⓒ 라영수

“평생 신흥무관학교를 가보려 노력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이제는 지병이 중해 가보지 못하는 데 이럴 어쩌면 좋소” 황명수 선생은 울먹이며 한탄을 하였다.

황명수 선생의 손을 잡고 이번에 기자가 10월에 반드시 그곳을 다녀와 사진으로나마 보여드리겠다고 약속을 하고 작별을 하였다.

덧붙이는 글 | 김창환 장군의 생존하신 둘째 자부를 찾아 인터뷰


#김창환 장군#황명수#신흥무관학교#길림성#이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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