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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 중에 파병(罷兵)이 있습니다. 주로 전국시대 각 제후국 간의 국제관계와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한자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전국시대의 파병(罷兵)은 ‘전쟁을 그만두다’ 혹은 ‘철군’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기자 주>.
지난 6일 열린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소위 동맹국이라고 하는 미국이 한국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두 나라 정상은 기자회견 내내 한국인 피랍사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로이터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양 정상은 “한국인 인질의 석방을 위해 탈레반에게 양보를 하지 않겠다”는 데에 의견 일치를 보았다.
아프가니스탄 측의 태도는 차치하고, 이번 정상회담에서 미국 측이 취한 태도는 한미동맹의 본질을 보여주는 동시에 아프간 파병의 무의미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군이 아프간에 참전하게 된 것은 기본적으로 한미동맹 때문이다. 그리고 23명의 한국인들이 아프간으로 봉사활동을 떠난 것도 기본적으로 한미동맹에 대한 일정한 신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프간에 간 행위의 잘잘못을 떠나서, 그곳에 한국 군인들이 있고 또 미국 군인들이 있지 않았다면 23명이라는 대인원이 아프간행(行)을 쉽게 결정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의 발단에는 한미동맹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기존의 신뢰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 현장에서 참전 동맹국의 국민은 자국의 국민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웃에 살고 있는 두 가족이 피서지에 갔다가 그중 한 가정의 아이가 실종되었다면, 두 가족은 내 아이 네 아이를 가리지 않고 실종된 아이를 함께 찾을 의무가 있다.
피서지라는 ‘위험 가능 지역’으로 함께 떠나는 순간부터 일종의 ‘위험 공동체’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두 가족은 일행 내부에서 발생한 위험에 대해 일정한 공동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국과 미국이 아프간에서 동맹군으로서 함께 참전하고 있는 이상, 미국은 한국 국민이든 미국 국민이든 간에 성심을 다해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아프간에서 내 국민 네 국민을 가린다면, 이는 동맹국이 해서는 안 될 일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은 한국인 인질들의 석방을 위해 탈레반에게 양보를 하지는 않겠다고 했다. 오히려 탈레반에게 비타협적인 강경자세를 과시하기 위해 이번 기회를 활용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주고 있다.
참전 동맹국의 국민은 자국 국민이나 마찬가지이고 자국 국민의 생명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중요한 것인데, 미국은 ‘고작’ 탈레반과의 힘겨루기 때문에 자국 국민과 다를 바 없는 동맹국 국민의 목숨을 내팽겨 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도대체 누구 때문에 아프간에 군대를 파견한 것인가 하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또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것은 미국이 참전 동맹국 국민의 생명을 자국 국민의 생명만큼 중시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피서지에 가서 자기 아이만 챙기는 부모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또한 이것은 미국이 목숨을 걸고 한미동맹을 지킬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미동맹이란 한국 국민과 미국 국민의 동맹인데, 한국 국민의 생명을 이처럼 하잘것없이 다루고 있으니 이는 미국이 한미동맹을 하잘것없이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국인 23명의 목숨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나라가 4천만 한국 국민 전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 과연 목숨을 걸고 한국을 도와주려 할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것이다.
미-아프간 정상회담이 보여준 또 다른 측면은 아프간 파병(派兵)의 무의미성이다. 한국이 도움을 주고 있는 대상들인 미국과 아프간 두 나라가 모두 한국 국민의 목숨을 이처럼 ‘초개처럼’ 버리고 있는데, 한국이 과연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나라들을 도와줄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미국 국민 23명이 아프간에서 납치되었다면, 미국은 탈레반 죄수들을 풀어주든가 아니면 거액의 돈을 주든가 혹은 기타의 상응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벌써 해결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 국민 23명이 납치된 사건이기에 미국이 지금처럼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프간 현장에 나가 있는 한국군의 위상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한국군이 그곳에서 미국으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으면서 근무하고 있다면, 한국 국민 역시 미국으로부터 이처럼 푸대접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시선에는 한국군이 대수롭지 않은 존재이기에 한국 국민 역시 그런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불쾌한 표현이 될 수 있겠지만, 양반 가문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는 도중에 주인의 아들이 다쳤을 경우와 하인의 아들이 다쳤을 경우에 그 부상자에 대한 처우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한국의 처지가 그 ‘하인’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처럼 푸대접을 받고 있는데, 한국군은 대체 무엇 때문에 아프간에 가 있는 것인가? 아프간 파병(派兵)의 무의미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한미동맹도 무의미하고 아프간 파병(派兵)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부시 대통령은 지난 6일 전 세계를 상대로 아주 ‘솔직하게’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한국이 아무리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을 도와줘봤자 한국에게 돌아오는 건 아무 것도 없음을 잘 보여주었다. 미국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지난 6일의 정상회담은 한국에게 아주 ‘유익한’ 것이었다.
그럼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젊은 여자’가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느 남자’를 따라 멀리 시집을 갔다가 괴한에게 납치가 되었는데 남자가 ‘다른 여자’와 놀아나면서 “우리는 저 여자를 위해서 납치범에게 양보하지는 않겠다”고 선언했다면, 이 여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경우에는 집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는가? 집으로 돌아올 수 없다면, 차라리 납치범과 함께 사는 편이 더 낫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지금 한국에게는 '파병(罷兵)'만이 유일한 선택이다. 왜냐하면, 미국도 아프간도 진정한 우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을 신뢰할 만한 이유가 조금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군은 아프간에서 신속히 파병(罷兵)해야 한다. 한국군은 하루빨리 철군해야 한다. 성실성과 신뢰가 밑바탕에 깔리지 않은 한미동맹을 위해 젊은 한국 군인들을 아프가니스탄 같은 위험 지역에 계속 방치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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