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서 살아본 사람이면 여럿이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묵묵히 입을 다문 채 버티는 기분을 알 거다. 모른다면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 날 커다란 박스에 폐지를 사이좋게 나눠넣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 멀뚱멀뚱 서있을 때의 긴 침묵을 생각해 보라.
벽면에 부착된 게시물에 눈길을 꽂고서 상대방을 밀어내면서, 자기 자신 역시 상대방으로부터 게시물과 같은 사물로 밀려난다는 사실을 몰라서가 아니다. 경험상 그나마 어색한 침묵이 익명의 낯익은 상대방과 한 공간을 나눠가져야만 하는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무난한 태도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만일 이웃 가운데 누군가 엘리베이터 안의 숨 막히는 침묵의 협정을 깨고 어느 날 느닷없이 조기축구회 이야기를 꺼낸다든가 거실 인테리어를 새로 했다며 차 한 잔 마시러 오라는 식으로 말을 건네 온다면 어떨 것 같은가. 마음이 훈훈해지는 사람도 물론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열에 아홉은 보험권유나 정수기 판촉을 연상하며 엘리베이터 타는 시간을 당기거나 늦춰버리지 않을까.
낯익은 타인을 밀어내고 점유한 공간은 자못 흡족하고 편안하다. 동시에 한없이 허전하고 삭막하며, 그 공간에 속한 존재는 외롭다. 고백건대 나는 자못 편안하면서 동시에 허전하고 황량한 공간을 점유해 살아가면서 늘 지금보다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 씁쓸하고 염치없지만 인정해야겠다. 타인을 밀어내지 않는, 자신과는 영판 다른 존재와도 가식 없이 자연스러운 교감이 가능한 세상을 꿈꾸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나에게는 <선사시대 사랑이야기> 같은 책을 펴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 <선사시대의 사랑이야기>는 <로마의 여인> <고독한 청년> <권태> 등에서 냉소적이고 우울한 세상을 그렸던 알베르토 모라비아가 바로 나 같은 어른을 염두에 두고 쓴 게 아닐까 싶은 동화다. 선사시대, 곧 인간문명의 역사 이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그 천진함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한다.
가령 기린 이야기를 보면, 아무도 없는 초원에서 외롭게 성장하는 바람에 기린은 자기 모습이 어떤지를 모른다. 자기 모습을 찾아 헤매던 기린은 사자가족이 하는 대로 얼룩말에게 덤벼들다 미치광이 소리를 듣는가 하면 개미핥기를 흉내 내다 개미에게 된통 물리는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 마침내 같은 기린 무리에 속하게 되지만 자기가 진짜 기린인지 아닌지 끝내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가게 된다.
몸에 익은 독서습관에 따라 이 어리석은 기린 이야기를 읽다보면 ‘내가 이러고 살아야 하나’, ‘이런 일이나 하다가 내 인생 종치는 건가’ 자조하는 직장인들이, 지금과 다른 인생을 꿈꾸고 그리워하고 미련을 떨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런데도 뜨끔하거나 우울하지는 않다.
혹자는 모라비아가 어리석고 고집불통인 인간군상을 풍자하고 비판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하는데 내가 읽은 느낌은 전혀 그렇지 않다. 아무 노력 없이 편안히 앉아서 마음껏 물고기를 잡아먹으려는 악어를 비롯해 얼음은 영원히 녹지 않는다는 철석같은 믿음으로 가족을 궁지로 몰아가는 펭귄, 외모는 물론이고 먹이며 주거환경까지 자신과는 완전 다른 황새를 사랑한 올빼미의 사연들에 흘러넘치는 건 분명 장난기다. 그리고 착각인지 모르지만 어리석고 우둔한 동물과 단순하고 고집불통인 인간과 게으르고 실수하는 신과 무책임한 자연이 그려내는 선사시대의 풍경에는 배경음악처럼 작가의 이런 중얼거림이 깔려있다.
‘실수할 수 있지, 다들 그렇게 사는 거란다.’
‘엉터리로 살아도 사는 건 퍽 좋은 거야.’
‘머 어때, 괜찮아, 괜찮아…….’
때문에, 하나같이 흐뭇하고 따뜻하며 불쑥불쑥 감동을 끌어내는 이들 주민들의 삶은 황당하지만 행복하다. 천진난만하고 미련하고 고집스럽고 엉뚱하기 짝이 없는 이들은 폭풍이 불고 하늘이 무너져도 비참한 인생이 될 거라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으며 제 눈앞에 펼쳐진 삶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냅다 달려간다. 잘못된 결과로 가진 걸 모두 빼앗기고 원통해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을 회의하느라 생을 낭비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그들의 행동에 태클을 걸고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메신저가 등장하면서 삶의 행로가 바뀌기도 하지만 그뿐이다. 그들의 깨우침은 자책이나 갈등이나 고뇌를 동반하지 않는 행동으로 옮겨져 그들은 곧 삶을 향해 다시 돌진한다.
눈치 챘겠지만, 이 책을 모라비아가 썼으니까 심각하게 진지하게 깊은 의미를 찾아 읽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모라비아가 괜히 소설이 아닌 동화를 썼겠는가. 혹 자신이 점유한 공간이 허전하고 쓸쓸하다면, 그래서 남들한테 내색은 않지만 실은 몹시 외롭다면 어느 한가한 나그네가 선사시대의 전 지구를 두루 산책하며 그곳 주민들의 삶을 펼쳐 보이는 세상으로 떠나길 권한다. 그곳 주민들을 만나게 되면 어떤 인사법을 쓸지 고민할 것도 없다. 머리를 굴리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면 간단히 해결된다. 나 역시 우화 속 행복한 세상에 들어와 봤으니 하는 말인데, 행복한 세상은 단언컨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