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사람들 참 바보 같아요."
"왜?"
"올라가기도 힘든데 왜 돌로 성까지 쌓아요?"
온달산성에서 내려오는 길에 초등학생 녀석과 나눈 대화다. 그냥 올라가기도 힘든 데다 비마저 내려 미끄럽기까지 한 온달산성 올라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말을 할까. 적군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산성의 의미를 이해하기에 너무 어린 나이일지도 모른다. 먼 옛날의 치열했던 역사의 의미보다는 비와 땀에 젖어 올라오느라 힘들었던 경험이 더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리라.
온달산성만큼은 아니지만 다음 코스도 오르막 산성 길 단양 신라적성비다. 여전히 비는 내리니 올라가는 길이 편치 않을 것이다. 온달산성에서 질려버린 녀석이 단양 신라적성비를 올라갈 때는 뭐라고 할까. 그래도 나중에 나이가 들면 고생했던 오늘의 답사가 괜찮은 추억으로 떠오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버스를 타고 단양 신라적성비로 이동을 했다. 버스 안에서 아이들은 디카를 들고 자신이 찍어온 사진을 자랑하며 즐거워했다. 힘들다며 투덜대던 아이도 친구 곁에 찰싹 붙어 앉아 사진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비에 흠뻑 젖은 버스가 중부고속도로 상행선 단양 휴게소에 도착했다.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가나 보다 여겼던 아이들이 답사 간다니까 우산을 챙겨 내려왔다. 빗줄기는 여전했다. 온달산성처럼 험한 길은 아니라 걱정은 덜 되었다.
잘 다듬어놓은 오르막길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단양 신라적성비 안내판이 보이고 그 뒤편으로 아담한 비각 안에 단양 신라적성비가 있다. 먼저 올라온 녀석들은 캠코더와 카메라로 안내판과 비각을 찍고 있었다. 그중 한 아이가 질문을 했다.
"선생님, 이거 신라가 만든 거 맞아요?"
"맞아. 여기 단양 신라적성비라고 적혀 있잖아."
"이상하다."
"뭐가?"
"우리는 고구려 유적지 답사하러 왔잖아요."
"그렇지."
"근데, 왜 신라 비석을 보러 왔어요?"
"원래 여기는 고구려 땅이었어."
"그래요?"
"고구려와 신라가 싸움을 할 때 가장 중요했던 요충지가 여기야. 그런데 진흥왕 때 신라가 점령하고 이 비석을 세운 거야."
적성(단양의 옛 지명)은 죽령이 가로막고 있어 신라가 쉽게 공격하기 어려운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진흥왕 때 죽령을 넘어 이곳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꼭 점령해야 할 곳이 적성이었기 때문이다. 이 비는 진흥왕이 적성을 점령한 뒤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상의 내역이 적혀 있다.
공을 세워 상을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신라의 장수들이었지만 적성 출신 야이차란 사람도 등장한다. 비문에는 야이차와 가족 등에게 상을 내린다는 내용도 있다. 신라가 적성을 점령할 때 일부 지역 주민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점령지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발견되기 전 이 비석은 대부분 땅에 묻히고 윗부분만 약간 드러난 상태였다. 이 산을 오르내리던 사람들은 땅 위로 드러난 비석 윗부분을 신발에 묻은 흙을 터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우연이 어떤 사람이 돌에 글씨가 있는 거 같다는 제보를 하게 되어 단국대학교 조사팀에 의해서 아주 중요한 비석이라는 게 밝혀졌다.
"삼국시대 한강을 장악한 나라가 항쟁의 주도권을 잡았지요. 고구려가 적성을 차지했을 때는 삼국 항쟁의 주도권이 고구려에게 있었지요. 그런데 신라에게 적성을 빼앗기면서 주도권은 신라로 넘어가게 됩니다. 신라는 적성을 점령해서 한강 상류를 장악했어요. 그 뒤에 한강 하류마저 차지하면서 삼국 항쟁에서 주도권을 차지하게 됩니다."
황재연 선생님은 설명을 마친 뒤, 아이들을 데리고 산을 넘어 적성으로 갔다. 적성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정말 볼만한데 아쉽게도 비안개가 자욱해서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저 아래 흐르는 강이 남한강이에요. 적성을 기준으로 북쪽이지요. 적성 남쪽으로는 죽령이란 험한 고개가 있어요. 북쪽에는 강이 흐르고 남쪽에는 험한 고개가 있으니 적성은 요충지가 맞지요."
설명을 듣고 내려오는 길까지 비안개는 따라왔다. 성벽은 길게 꼬리를 내려 내려가는 아이들에게 길 안내를 해주었다.
덧붙이는 글 | 강원역사교사모임과 원주 YMCA에서 원주지역 초, 중, 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청소년 역사 캠프를 열었습니다. 올해는 남한강 유역 고구려 유적을 찾아서란 주제로 7월 21일부터 22일에 걸쳐 단양, 충주 일대의 유적지를 답사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7월 31일부터 8월 4일까지 진행된 전국 청소년 대상의 만주 고구려 유적 답사와 연결된 프로그램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기사로 쓸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