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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학
이승하 시인(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이 일곱 번째 시집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를 도서출판 '시학'에서 펴냈다. 이 시집은 이전의 시집과는 다른 특별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이승하 시인이 오랜 기간에 걸쳐 기획된 시집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는 시대에 취해 광대 같은 삶을 살다간 사람들(광대, 구도자, 고전문학 속의 노래들, 예술인)의 이모저모를 58편의 불꽃으로 그려내고 있다.

연작시 '광대를 찾아서' 20편, '구도자를 찾아서' 10편, '노래를 찾아서' 20편, '예인을 찾아서' 8편이 시집 1-4부를 구성하고 있다.

말이 영 말 같지 않고
노래가 도무지 노래로 나오지 않을 때
백번을 기운 누더기옷 입었다고 붙여진 이름
백결이여
무엇을 바라 금琴을 탔는가
누구를 위해 악樂을 만들었는가
세상에는 지금 음音이 없다
음音이 없는데 어찌 시詩가 나오랴
(중략)
광대여, 거문고 끌어안고서
아픈 이 세상 크게 울게 하라
배고프고 목마른 저마다의 생애
음악으로 제대로 한번 위로도 해보고
서럽지 않게……마음이라도 옹골차게

- '광대를 찾아서2 - 백결' 부분

승복을 벗고 목탁도 버리고
저 자라고 싶은 대로 놔둔
머리카락과 수염 어느새 백발
쪽박 찬 저 거지들보다 내가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이겠소
공양을 받으며 만인을 내려다보며
내 두드린 목탁은 순 거짓이었소

첩첩 산골 암자에서 구한 것들이
저 저잣거리 사람 사는 마을의 장터에서
다 팔고 있었소 불佛은 무엇이며
법法과 승僧은 또 무엇이겠소
나 이제 저 사람들 앞에서
가진 그대로 있는 그대로
노래하고 춤추려 하오

- '광대를 찾아서 5-원효' 부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진정한 소리(音)가 없는 것인가? 그래서 시인은 각자 자기가 살던 시대에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광대와 예술인들의 삶을 찾아나선 것인가? "배고프고 목마른 저마다의 생애"를 위로하고자 백결 선생도 "거문고 끌어안고서/아픈 이 세상 크게 울"었던 것이며, 원효 스님도 "승복을 벗고 목탁도 버리고" "가진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무애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던 것 아니겠는가.

저잣거리에 고통받는 민중들의 삶과 하나가 되어 그들의 삶을 위해 노래하고 춤을 춘 이들은 우리 민족의 스승이자 참된 광대요, 예술인이다.

여러 광대와 구도자, 예술인들의 삶을 우리 시대의 시로 새롭게 형상화하고 있는 이승하의 시집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의 시적 화자는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그 목소리는 시적 대상이 직접적인 독백의 넋두리로 나타나거나 세상 사람들과 시를 쓰고 있는 이승하 시인에게 말을 건네기도 하고, 시인이 시적 대상(주인공)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삼국유사> 권5에 나오는 엄장과 광덕의 설화를 대상으로 삼은 시 '구도자를 찾아서 3-엄장이 광덕에게'는 도(道)를 미처 깨우치지 못한 엄장이 광덕에게 말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지만, 엄장의 목소리는 "뱉어내도 뱉어내도 몸에 고이는/이 몸 달뜨게 하는 욕정"에 이끌리고 있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요, 시를 쓴 시인의 목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부모 형제 시방도 굶주리고 있는
고향 땅이 너무 먼 조선의 남정네야
내 현해탄 푸른 물결 넘실 넘어와
쌓이고 쌓인 그대 이야기 보따릴랑
그대 울음보 다 들어주고 싶었으나
어쩌면 이 지리지도 못난 조선 사람들은
늑대도 운다 하고 새도 운다 하고
벌레도 운다 하고 문풍지도 운다 하냐
몸부림치며 울지를 못하면
미쳐서 넋두리 늘어놓거나
응어리져 푸념 풀어놓거나

일본 땅의 탄광이거나 군수기지거나
깡마른 얼굴마다 움푹 들어간 눈들
눈물 맺힌 눈들 앞에서 털썩 주저앉아
곡하듯 마음껏 울어보질 못해설랑
조조가 화용도로 달아나는 적벽가를
내 더는 못 부르겄다
흥보와 흥보처가 박을 타는 흥보가를
내 더는 못 부르겄다
강쇠처럼 피고름을 흘리며 죽을지언정
청이처럼 바다에 몸을 던질지언정

- '노래를 찾아서 20-이화중선의 마지막 노래' 전문


소설가 김훈이 쓴 <내가 읽은 책과 세상>(푸른숲,1989)에 소개된 "이화중선(1898-1943)은 일본의 여러 탄광을 돌면서 끌려간 한국 사내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다가 피로와 영양실조, 그리고 예술적 절망에 빠졌다. 그녀는 오사게 군수기지로 가는 연락선에서 투신 자살했다"라는 글에서 모티브를 얻고 쓰인 위 시는 독자의 가슴을 설움의 강물로 가득 채우게 만든다. 독자들을 울리고 또 울게 만들고 있다.

"그대 울음보 다 들어주고 싶었으나" "눈물 맺힌 눈들 앞에서 털썩 주저앉아/곡하듯 마음껏 울어보질 못해설랑" 자신의 삶을 중도에 꺾어버린 이화중선의 마지막 노래가 너무 서럽고 서럽다.

김덕수와 함께 사물놀이패를 결성하여 꽹과리를 쳤지만 자신의 예술적 한계에 절망한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김용배(1952-1986)의 예술적 삶을 노래한 '예인을 찾아서 2'와 '예인을 찾아서 3'도 슬픔과 예술적 감동으로 독자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두드리자 두드려 어딜 가나
터져나오는 이 신명을 어찌 막으랴
탕! 재쟁! 쟁기쟁기! 쟁기재잰!
언놈이 뭐라 하던 상관 않고
꽹과리로 바람 달구어 계속 때렸더니
찌그러졌던 것 다 바로 펴졌어
고꾸라졌던 것 다 금방 일어났어
네가 없는 이 자리에서 나 꽹과리 들고
소리가 익고 익어 곪아터질 때까지
두드리고 싶은 거여, 어이, 들어봐, 용배!

-'예인을 찾아서 3-사물놀이패 김용배' 부분


옛날과 지금, 전국 방방곡곡의 광대를 찾아 연작시를 써내려간 이승하 시인! 그가 우리 시대의 광대요, 구도자요, 예인이 아닐까. 적어도 그러한 사람이 되고자 이승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시의 물길을 열어갔던 것이다.

인용한 시 마지막 부분 "소리가 익고 익어 곪아터질 때까지/두드리고 싶은 거여"라는 외침은 이승하 시인이 이 시대의 진정한 광대, 구도자, 예술인이 되겠다는 자기 다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승하 시인이 시로 쓴 '광대론' '구도자론' '노래론' '예인론'이기도 한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시학, 2007) 는 올해 나온 어떤 시집보다도 소중한 시집으로 자리할 것이 분명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승하 시집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 시학, 157면, 8000원


취하면 다 광대가 되는 법이지

이승하 지음, 시학(시와시학)(2007)


#이승하#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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