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품은 큰 뜻을 세상에 펼쳐보지도 못하고, 간첩으로 조작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여덟 명의 목숨 값, 마흔이 채 못 되어 남편을 잃고 간첩의 아내로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하고 살아온 일곱 명의 미망인들의 32년 통한의 세월 값,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멍에를 쓰고 어깨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살아온 스물여덟 명 자식들의 32년 청춘의 값.
억울하게 먼저 간 동생을 가슴에 품고 산 누이와 큰형님을 잃고 통한의 시간을 보낸 두 명의 형제, 시동생을 따라 하늘로 간 남편 대신 홀몸으로 자식들 건사하면 살아온 두 형수, 그리고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도 삼촌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살아온 일곱 명의 조카 이들의 32년 인생 값. 지난 32년간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우다 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흙바닥을 이불삼아 농성을 하며 살아온 이 땅 수십, 수백의 양심들이 살아온 세월의 무게 값.
이 값이 245억원이다. 누가 충분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천문학적인 액수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일흔을 훌쩍 넘긴 노구의 미망인들에게 누가 감히 충분한 보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8부(재판장 권택수)에서 "이른바 인혁당재건위"사건과 "민청학련"사건으로 1975년 4월 9일 박정희 유신정권에 의해 사형된 서도원, 도예종, 우홍선, 이수병, 송상진, 하재완, 김용원, 여정남 등 8인 열사들의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청구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국가는 이들에게 총 245억원을 배상하라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지난 2007년 1월 23일 같은 법원의 형사합의23부(재판장 문용선)가 이 사건의 재심판결에서 8인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한데 이어, "이른바 인혁당재건위"사건과 "민청학련사건"에 대한 사법적 명예회복이 완성된 것이니, 매우 환영할 일이다.
또 이는 박정희 유신정권이 반민주, 반인권 정권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는 일이니 그 의미 역시 매우 크다.
그러나 재판과정에서 대한민국 측이 민사상의 소멸시효를 주장하며, 재판을 길게 끌어가려고 했던 사실은 꼭 짚고 넘어가야한다. 지난 1월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난 이후, 검찰은 잘못을 시인하며 항소도 하지 않았다.
법무부 장관의 '소멸시효완성' 주장은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
또, 지난 4월 여덟 분이 사형 당하신 서대문 사형장 터에서 열린 32주기 추모제에 대한민국의 법률상 대표라고 하는 법무부 장관이 추도사를 유족들의 고통을 위로한다고 해 놓고는 '소멸시효완성'을 끝까지 주장한 것은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 재판부도 판결문을 통해 "국민 개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해야하는 피고 대한민국이, 구차하게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워 그 책임을 면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력하게 국가의 비겁한 태도를 꾸짖었다. 재판장의 충고처럼 정부가 먼저 유족들을 위로하고, 그 눈물을 닦아주는 일에 앞장서는 일에 나서는 것이 옳은 모습이 아닌가?
정부는 유족들과 국민 앞에 머리 숙여 사죄하고, 법원의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일흔이 훌쩍 넘은 유족들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전국 곳곳에서 새벽기차를 타고 재판을 방청하러 오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어서 빨리 '항소 포기'를 선언하고, 하루라도 빨리 유족들의 긴 기다림을 끝내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비롯하여, 당시 이 사건의 조작에 깊이 관여했던 주요 인사들에게 국가가 직접 '구상권' 등을 청구하여 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책임져야할 이들이 분명히 있는데, 또다시 국민들에게 그 부담을 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인혁당 선생들이 평생 가슴속에 담고 사신 평화통일과 이 땅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이 분들의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 중대한 작업이 우리들의 과제로 남아있다. 이제 군사독재정권은 없지만, 자본과 권력은 여전히 민중의 편이 아니다.
이 땅은 아직도 둘로 갈라져 있고, 강대국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한반도를 좌지우지 하려고 한다. 신자유주의 정책과 한미 FTA 체결로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우리 민중들,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자본에게 착취당하고 차별당하는 노동자들, 명분 없는 전쟁에 국가가 동참한 이유로, 멀리 이국땅에서 안타깝게 죽어간 이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인혁당 열사들 살아있다면 민중의 편에 섰을 것
인혁당 여덟 분의 열사들이 살아계셨더라면, 분명 민중들의 편에 서서 사셨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우리가 이 분들의 정신을 진정으로 계승하는 것은 추모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이분들의 이름을 딴 기념사업회 따위를 화려하게 만드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분들의 정신을 이어 받아 현실사회에서 여전히 억압받고, 차별받는 이들의 편에 서서 정의와 평화를 지키는 일에 함께 하는 것이, 열사들이 우리들에게 바라는 진정한 정신계승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17인의 형사재심과 손해배상청구소송이 남아있다. 이분들 역시 모진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하고, 피를 토하며 옥살이를 견디어 내신 분들이다. 이미 연로하시어, 많은 분들이 세상을 떠나셨으니, 법원은 이분들의 재심을 개시하고, 사법적 명예회복을 이루는 일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현재 인혁당 재건위 사건 외에도 권위주의정권시절 발생한 수많은 조작 간첩 사건들에 대한 재심이 청구되었고, 그 중 일부는 재판 중에 있다. 이 사건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역시 더 이상 늦어져서는 안 된다. 사법부와 검찰은 더 이상 이분들께 죄 짓지 말아야한다. 괜한 시간 끌기나 억지스러운 주장으로 진실을 은폐하는 일에 동참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당부한다.
이번 판결,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그대로 보여줘
오늘의 결과는 그동안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싸워 오신 유족들의 승리이자, 인권의 승리이다. 물론, 이번 손해배상판결로도 지난 32년간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살아왔던 우리 유족들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죄를 받았지만, 8인의 열사들은 살아 돌아 올 수 없고, 배상을 받아도 유족들은 여전히 밥알을 모래알처럼 씹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범인 국정원이 스스로의 입으로 자신들의 고문․조작 사실을 밝혔고, 법원이 형사재심 무죄판결에 이어,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유족들에게 승소 판결을 한 것은, 유족들에게 큰 위로가 되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진실은 아무리 감추어도 언젠가는 드러나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이번 판결이 그대로 보여주었다.
유족들은 이미 승소 시, 배상금액의 상당액을 여덟 분 열사들의 정신을 계승하며, 우리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이 땅의 인권과 평화를 지키는 일에, 내어 놓기로 약속한 바 있다. 참으로 아름답고 용기 있는 결정이 아닐 수 없다. 먼저 가신 열사들에 버금가는 신념을 가진 유족들의 결정에 존경과 박수를 보낸다. 우리들은 이 결정을 존중하고, 그 사업이 아름답게 진행 될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혁당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의 유족들, 사건 관련자들, 그리고 그 곁에서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리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살아온 이들, 또 인혁당의 진실과 그 정신을 이미 알고 있는 이 땅의 모든 양심들에게, 누구보다 인혁당 가족들을 근거리에서 보아온 활동가의 자격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오늘의 승리는 우리 모두의 승리이고, 대한민국 역사의 승리이다. 앞으로도 이런 승리, 진실의 승리가 계속 이어지길 희망한다.
덧붙이는 글 | 김덕진 기자는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