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그 레이스 중 가장 치열했던 마지막 한 달, 그보다 더 숨가빴을 투·개표 과정. 캠프 출입기자로서 가장 가까이서 선대위 멤버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걸 지켜봤기에 기자임을 떠나 인간적으로 안타까움이 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떤 선거이든 승자와 패자는 있게 마련이다. 그걸 가리려고 하는 게 선거가 아니던가.
그러나 패자들의 '최후'는 처참했다. 최전선에서 가장 열심히 싸웠던 이들일수록 더 그랬다. 마지막 캠프 회의, 합동연설회 기간 내내 후보 연설문을 도맡아 써내고 이명박 후보의 각종 의혹을 들춰 최전선에서 공격했던 유승민 의원은 끝내 눈물을 훔쳤다.
이혜훈 대변인도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전날 전당대회장에서도 눈물을 쏟았던 그였다. 이 대변인은 20일 내내 핸드폰을 꺼놨다. 다음날에야 전화기를 켰는지 이런 문자가 날아들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면목이 없네요. 며칠 쉬고 뒤풀이 때 뵙겠습니다."
김재원 대변인도 다르지 않았을 거다. 그도 아마 속으론 울었을 것이다.
사실 김 대변인에게는 한 가지 더 고맙고 미안한 일이 있다. <오마이뉴스>는 20일 한나라당 대선후보 발표를 위한 전당대회를 생방송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했다.
생방송 코너 중에 양 캠프 대변인 중 한명씩을 출연시켜 개표 결과에 대한 전망을 듣는 꼭지가 있었다. 나는 지난 주부터 김 대변인에게 출연을 부탁해놨다. 그날 아침에도 미리 질문지를 보여주고 출연시각을 알려줬다.
김 대변인의 출연 시각은 오후 3시 5분께였다. 개표 결과 발표는 이날 오후 4시 30분. 당선자 발표를 1시간 30분 앞두고 결과를 어떻게 예상하는지, 캠프 분위기는 어떤지 등이 인터뷰의 알맹이였다.
오후 2시 50분, 그를 대기시키기 위해 찾아 나섰다. 그는 전당대회장인 올림픽체조경기장 1층 플로어에서 기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를 붙잡고 "지금쯤 이동해야 한다. 가시자"고 말했다. 그는 "알았다"며 대화를 마무리하고 바로 따라 나섰다. 그런데 그의 어두운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직감했다. '졌구나.'
패배 알고도 카메라 앞에서 "이길 겁니다" 해야 했던 김 대변인
그를 데리고 2층 방송 데스크까지 가는 동안, 그에게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위로를 할 수도, 그렇다고 모른 척 결과를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 순간에는 어떤 말도 그에겐 잔인할 테니 말이다. 기자로서 '직무유기'라고 할는지 모르지만, 곧 공식 발표가 있을 텐데 좀 더 빨리 알자고 괴롭히는 건 못할 일이다 싶었다.
걸어가는 동안 참 많은 당원들이 그를 알아봤다. 그는 그럴 때마다 일일이 멈춰서 그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한껏 예의를 갖추며 웃었지만, 어두운 표정은 감출 수가 없었다.
어떤 당원은 지인이 김 대변인의 손을 붙잡고 반갑게 인사하자, 뭐 하러 인사를 하냐는 듯 "이명박이 됐다는데 뭐!"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나에게도 분명히 들렸던 그 말을 김 대변인이 못 들었을 리 없다. 선거란 이렇게 잔인하다. 그 소리를 듣고 돌아서는 김 대변인의 속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드디어 방송 데스크에 도착했다. 곧 이어 이명박 캠프의 진수희 대변인도 나타났다. 두 대변인이 악수를 나눈 뒤 나란히 앉았다. 표정이 아주 대조적이었다. 그것만 봐도 결과를 미리 알 수 있었다.
진 대변인이 먼저 출연한 뒤, 김 대변인 차례였다. 앞서 진 대변인은 유난히 환한 표정으로 생기발랄한 방송을 마친 터였다.
"아휴… 덥네요. 이것(양복 상의) 좀 벗고 해도 되지요?"
경상도 억양으로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현장감도 있고 좋지요. 그러세요."
내가 답했다.
눈부신 방송 조명 아래서 마이크를 쥔 김 대변인은 곧 밝게 웃었다. 조금 전까지의 어두운 표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속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아무런 눈치를 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날 김 대변인을 위해서 준비된 질문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사회자) 자, 김 대변인 오늘 개표 결과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대변인으로서 "승리하리라고 확신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외에는 다른 답이 없었다. 또 없어야 했다. 그는 각본대로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렇게 8분간의 인터뷰가 끝났다. 김 대변인에게 그 8분은 참 길었을 것이다. 그는 "감사하다"고 되레 인사를 해왔다. 떠나는 길에 그는 구성진 경상도 억양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아이고, MB 지지자들이 투표소에는 안나오고 전화만 열심히 받았나보다. 하하하."
현장투표에서 이기고 여론조사에서 져, 결과적으로 패배했다는 걸 암시했다.
대변인의 '마지막 브리핑'은...
어제 전화에서 김 대변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어제 방송 출연할 때요. (결과를) 알고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어떻게 예상하냐고 묻는데, 별 수 있나요. 꼭 승리할 거라고 말하는데, 참 죽겠습디다. 하하하."
그는 웃었다. 한편으론 우는 것 같기도 했다.
"네. 압니다. 그래서 더 감사했습니다. 뵙고 인사를 드려야할 텐데요."
"뭐… 한동안 쉬어야죠. 그래도 서울에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언제 보자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는 이날 이메일로 이런 보도자료를 보내왔다. 보도자료라기보다는 '편지'에 가까웠다. 아마 자신의 마음, 그리고 캠프의 심경을 '브리핑'한 것이었을 거다.
그 편지는 이랬다.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 먼동이 터올 때까지 저는 어두운 방 구석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습니다.
경선룰 협상의 최전선에서 여론조사가 투표에 끼어드는 것을 막지 못한 어리석음과, 대변인으로서의 역량 부족으로 여론조사 결과가 뒤진 것이 아닌지 탄식했습니다.
이제 저는 떠납니다.
백척간두의 끝자락에 서서 서로를 향한 말의 성찬이 계곡을 메우고 산이 되는 험한 전장에서 벗어납니다.
그간 언론인 여러분들의 과분한 격려와 애정으로,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박근혜 후보를 돕는 대변인을 맡아 일하면서도 힘들어하지 않았습니다.
때로 마음을 삭이며 낯빛을 좋게 하려 노력했지만 힘든 경우도 있었고, 걸려온 전화를 제대로 응대하지 못한 일도 있었습니다. 전화번호가 남겨진 경우는 빠짐없이 제가 전화를 걸어 드렸지만 혹시 빠진 경우도 있었을 겁니다. 모두 제 게으름 탓이니 잊어주십시오.
기사 한 줄 고쳐보려고 몇 번씩 전화해서 괴롭혀드린 적도 있었습니다. 박근혜 후보의 기사가 아니라 제 한 사람의 언론보도였다면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론인 여러분들께 넉넉함과 너그러움을 기대합니다.
이제 저는 박근혜 의원의 영원한 써포터스의 한 사람으로 남고자 합니다. 긴 세월 동안 잊지 못할 아름답고 행복했던 지난 시절이었습니다.
도와주신 언론인 여러분, 마음 속 깊이 감사드립니다. 끝.
천국에서 치르는 선거는, 아름다울까
그는 편지에서 "긴 세월 동안 잊지 못할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돌아봤다. 아마 후회 없이 싸웠기에 그럴 터다. 하지만 그 싸움도 사람들이 하는 것이기에 이긴 자도, 진 자도 상처는 있게 마련이다.
투표 전날(18일), 홍사덕 선거대책위원장이 기자들과 점심식사를 하다 뜬금없이 던졌던 말이 생각난다.
"천국에서 선거를 치르면 어떨까요? 서로 (상대방) 선거운동 해주겠다고, 서로 상대방이 당선되어야 한다고 할까요?"
고된 전투를 치른 전사들이 어서 회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