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화단 시계. 매일 날짜와 요일을 바꿔줘야 하는 수고로움을 뺀다면 정말 멋진 시계가 아닐 수 없다. 6월 27일.
화단 시계. 매일 날짜와 요일을 바꿔줘야 하는 수고로움을 뺀다면 정말 멋진 시계가 아닐 수 없다. 6월 27일. ⓒ 문종성
아침 이슬을 털고 일어난 자리에는 지난밤의 노곤함이 덕지덕지 남아 있다. 늘 오전 8시~10시 사이에 출발하던 것을 오늘은 좀 더 일찍 길 위로 나섰다. 6시 반. 주말에 시카고에서 약속이 잡혀 있어서 눈썹 휘날리도록 전력질주를 해야 했다. 6일동안 700km 정도를 달리려면 하루 평균 120km는 가야 한다. 하지만 기상 여건과 몸의 컨디션, 그리고 혹시나 일어나게 될지도 모를 사태를 고려하면 규칙적으로 가기보단 갈 수 있을 때 최대한 가 두는 것이 좋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이리(Erie)호에서 미시간(Michigan)호를 따라가는 길 즉, 오하이오 주의 끝에서 인디애나 주를 거쳐 일리노이 주까지는 침략자에게 정복당한 슬픈 역사를 가진 인디언의 자취가 남아 있다. 오하이오 주 원주민들은 1794년 폴른 팀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면서 이주민에게 땅을 내주었다.

그리고 인디언에 대한 향수를 자연스레 불러일으키는 인디애나 주는 켄터키 지역에서 농민들이 처음 이주해 오면서 정착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는데 이주민과 토착민 사이에 분쟁을 계속한 결과 1811년 타피카누 전투를 마지막으로 알콘킨족이라는 토착 인디언은 이 땅에서 쫓겨났다. 두 지역 모두 미국의 여느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토착민이 이주민에 의해 쫓겨나가는 비극의 희생으로 남겨진 곳이다.

200km 도전, 라이딩엔 최적의 조건!

오늘은 날씨도 선선하고 도로 컨디션도 괜찮았으며 무엇보다 몸 상태가 그리 나쁘진 않았다. 나로서는 라이딩하기에 최적의 조건이 구름 낀 날씨에 선선한 바람 불어오고 풍경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건데 오늘이 마침 그랬다. 실은 어제 138.5km를 달리면서 내 안에 슬그머니 200km 주행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200km라. 짐 7개를 매달고 가면서 평속 20km를 10시간 동안 꾸준히 유지해야 해낼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대출금리 66%만큼이나 버거워 보인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기회를 잡아보겠느냐는 생각에 최선으로 달려보기로 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 200km라는 거리는 신성한 아침의 시간을 졸린 눈으로 맞고 여행 중에도 밤늦게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나에게 어쩌면 하나의 동기부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부지런하고 집중해야 했으므로. 그래, 도전해 보자!

좋구나. 대류권 공기가 특별한 것은 아니겠지만 기온에 따라 확실히 폐부 속에 들어오는 느낌은 다른 것 같다. 화씨로 치면 75~85도 사이의 온도에서 마시는 공기가 가장 신선하게 느껴진다. 그런 상쾌함을 안고 오전부터 쭉쭉 밟아나가기 시작했다. 낮 12시 반까지 15~20km의 평속을 유지하면서 이미 100km를 주행했기에 마음먹었던 200km에 대한 기대감이 생겨났다. 사실 어제가 절호의 기회였는데 도전하려다가 중간에 한 인디언 미국인에게 식사 대접을 받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었다. 하지만 기회는 다시 찾아왔고 오늘이 바로 놓칠 수 없는 그 기회인 셈이다.

미국의 날씨는 예측 가능하면서도 때론 혼란스럽게 한다. 잔뜩 구름 낀 채 겁만 주었다가 비가 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날씨는 예측 가능하면서도 때론 혼란스럽게 한다. 잔뜩 구름 낀 채 겁만 주었다가 비가 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 문종성
그런데 복병을 만났다. 1시 반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날씨 특히 중부 지역 평원의 날씨는 예측 가능하면서도 가끔 혼란스럽게 한다. 이를테면 구름이 잔뜩 끼었지만 비는 내리지 않는다거나 해가 쨍쨍 내리쬐다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이 모여들고 비를 뿌린다거나 하는 식 말이다.

회색빛으로 물든 하늘에서 비가 내리자 초조해 하며 나무 아래서 비를 피하는데 한 노인이 내게 손짓한다. 나무 아래 있으면 어차피 젖기 마련이라며 자신의 창고에서 쉬었다 가라고 한다. 쏟아지는 비를 보며 이른 아침부터 너무 무리한 건 아닌지 살짝 피곤해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였는데… 이런, 깨어 보니 1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다행히도 비는 그쳤다.

다시 페달을 밟기 시작했지만 아침처럼 원기가 넘치지는 않는다. 한 시간을 쉬다 보니 리듬이 끊긴 것이다. 운동하다가 쉬게 되면 젖산이 축적되고, 젖산이 피로를 유발해서 운동능력을 떨어뜨리게 된다. 쉬는 동안 근력의 데드 포인트(dead point)가 바뀐 것이다.

그런데 맞는 이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젖산이 아니라 물리학의 가속도의 법칙으로도 충분히 설명 가능할 거 같다. 일정한 속도로 운동하면 가속도가 0이니까 알짜힘도 0이고, 정지에서 운동으로 가면 속도의 변화(가속도)가 0이 아니니 힘은 계속해서 들어가는 것이다. 마치 자동차가 계속 달리는 것보다 가다 섰다를 반복하면 기름을 더 많이 먹듯이. 아무튼 요지는 쉬다가 다시 움직이려면 힘들다는 얘기다.

200km에 대한 도전의식 속에서 한 시간 공백은 다급함을 가져왔다. 때문에 물도 주행 중에 마시고, 몇 시간 동안 안장에서 내려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오랜 시간을 푹 쉰다. 항상 그런 식이다. 장거리 때도 60km를 5일간 달리기보단 100km를 3일 달리고 이틀 쉬는 쪽을 택한다. 한 번 필 받을 때 쭈욱 빼는 것이다.

20번 도로를 따라 넓디 넓은 밭들이 펼쳐져 있다.
20번 도로를 따라 넓디 넓은 밭들이 펼쳐져 있다. ⓒ 문종성
"젊은 날의 매력은 결국 꿈을 위해 무엇을 저지르는 것" - 앨빈 토플러

자전거여행의 방해꾼, 개와 바나나

미 북부 자전거 트레일로도 각광받는 I-80이나 20번 도로에는 함께 도로를 공유하는 화물차들이 무리지어 속력을 내다보니 위태로운 순간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도로가 흔들려 순간 균형을 잃기도 하고 더욱이 트럭이 지나간 자리엔 잠시 동안 불가항력적 언컨트롤 상태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때가 가장 긴장이 되면서 집중을 요하는 순간이다. 그래도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깜짝 놀랄 정도로 클랙슨을 울려대진 않는다. 대개는 미미한 진동과 소음만으로도 트럭의 존재를 눈치 챌 수 있기에 어느 정도 다가오면 내가 스스로 피해준다.

오히려 놀랍게 하는 건 개들이다. 나도 모르게 어디선가 뒤쫓아 와서 험하게 짖어대는 통에 하마터면 도로 쪽으로 쓰러질 뻔한 적이 적지 않았다. 위험한 순간이다. 개들은 자전거만 보면 일단 입에 거품을 물고 짖으면서 달려든다. '내 주인의 영역에 침범하지 마라' 사유지에 대한 남다른 경계심을 지니고 있는 철저히 미국적 의식에 길들어진 경고의 신호다.

음식은 중간에 이름 모를 작은 타운의 슈퍼마켓에서 바나나 4개와 빵 2개, 그리고 1ℓ짜리 초코우유를 사서 가는 중간 중간 먹었는데 시간이 적게 소요되어 만족할 만 했다. 또 오로지 서쪽으로 20번 국도만 따라갔기 때문에 길이 막히거나 잘못 들거나 잠시 멈춰 서서 지도를 봐야 한다는 등의 성가신 일들이 없었던 것도 호재였다.

유일한 성가신 일이라면 잠시 세워둔 자전거가 넘어졌다는 정도.
유일한 성가신 일이라면 잠시 세워둔 자전거가 넘어졌다는 정도. ⓒ 문종성
하지만 바나나를 먹어서 그런지 라이딩 내내 아랫배가 더부룩하다. 오후에 바나나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배고프지가 않다. 사실 변비기가 조금 있는데 그것이 포만감을 일으키게 만든다고 한다. 대신 라이딩 중에 방귀가 자주 나와 안장에서 살짝 엉덩이를 들어 가스를 배출하거나 아예 페달을 딛고 서서 시원하게 발사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도착하니 연이어 설사.

중국 자전거 일주 때도 바나나만 먹으면 이랬던 기억이 난다. 바나나는 밥 대용으로 괜찮은 탄수화물이 될 수 있지만 먹고 나선 늘 뒤탈이 난다. 소화기관이 약한 나에게 섬유질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방귀가 복선이고 설사는 결과가 된다. 다음부턴 바나나는 가급적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다.

북부 인디애나 주는 트럭들의 행렬에도 비교적 조용한 편이다. 하지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얘기는 180도 달라진다. 이른바 미국의 4대 프로 스포츠-MLB(메이저리그 야구), NFL(북미하키리그), NBA(북미프로농구), NHL(북미하키리그)-가 인기를 얻고 있는 다른 주와는 달리 자동차 경주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매년 메모리얼 데이가 껴 있는 주말,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 모터 스피드웨이에서 개최되는 미국의 오픈휠 자동차 경주 대회인 인디애나폴리스 500마일 자동차 경주(Indianapolis 500-Mile Race)는 인디 500(Indy 500)이라고도 불리며 1911년 국제 500마일 스윕스테이크 자동차 경주(International 500-Mile Sweepstakes Race)란 이름으로 처음 개최된 이래로 깊은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더욱이 인디 500은 미국의 4대 프로스포츠 못지 않은 인기를 끌고 있는 인디 레이싱 리그(IRL)의 핵심이 되는 이벤트 대회이면서, 하루 동안 열리는 자동차 경주 대회 중 가장 규모가 크게 열리는 이벤트 대회이기도 하다.

인디애나 주는 자동차 경주로 유명하다.
인디애나 주는 자동차 경주로 유명하다. ⓒ 네이버
그러니 이곳 주변에는 75가지 경주용 자동차가 전시되어 있는 명예의 전당 박물관을 비롯해 자동차 마니아들이라면 귀가 번쩍 트일만한 자동차와 관련한 수많은 관광지가 널려 있다. 하지만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무려 45만명의 극성 팬이 모여드는 레이싱 경기를 관람하는 것.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화끈한 볼거리에도 남자의 로망인 자동차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인디애나 폴리스까지 남하하는 복잡함 없이 계속 20번 도로를 타고 서진할 뿐이다.

아름다운 도전 끝에 장렬히 탈진하다

하루 종일 아무런 방해 없이 그저 서진하며 달렸다. 200km를!
하루 종일 아무런 방해 없이 그저 서진하며 달렸다. 200km를! ⓒ 문종성
오후 6시를 넘어서고 더는 햇빛이 구름을 뚫고 비치지 않을 거란 판단이 들자 이젠 헬멧을 벗고 최대한 도로 가에 붙어 달렸다. 오랜 시간 동안 달리다 보면 본의 아니게 침묵 피정을 하게 된다. 비록 수도원과 같은 영성을 수련하는 곳은 아니지만 온 자연이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경건한 수련원이 되는 것이다. 의식주와 관련한 육신의 것들은 조금 아까워도 이젠 과감히 버릴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하지만 마음의 찌꺼기를 버려내기엔 여전히 힘에 겹다. 보라. 지금도 200이라는 숫자에 얽매여 과욕을 부리고 있지 않은가. 그러기를 두 시간여. 마침 옥수수밭을 일구고 있는 한 농부와 마주쳐 그의 배려로 창고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하였다. 정확히 124마일, 즉 200km로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오하이오 주에서 출발해 인디애나 주 쪽으로 제법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전통적인 청교도 복장으로 일을 하던 농부의 친절한 안내를 받고 짐을 풀었다. 같은 하루지만 긴 시간이었다. 샤워를 하니 다리 근육이 묵직한 것이 제법 부풀어 올라 있다. 사실 200km 거리의 라이딩은 자전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정복할 수 있는 수치다. 하지만 앞뒤 패니어에 짐을 싣고 뒤 랙에다가 여분의 짐들을 쌓아올린 상태라면 쉽게 도전하기는 어려운 수치다. 아무래도 마음먹기에 따라 달성이 가능하지 싶다. 오늘 전에 이미 130~140km 가까이를 보다 짧은 시간 동안 몇 번 찍어본 경험이 있기에 어느 정도 계산된 상황에서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인디애나 북부지역에는 청교도 문화를 고집스레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여전히 마차를 타고 다니며 종교적 이유로 사진을 찍지 않는다. 이 사진은 허락 하에 촬영한 것임.
인디애나 북부지역에는 청교도 문화를 고집스레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여전히 마차를 타고 다니며 종교적 이유로 사진을 찍지 않는다. 이 사진은 허락 하에 촬영한 것임. ⓒ 문종성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하다. 하지만 배의 역할은 항구에 정박해 있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자전거는 망망대해를 향해 나아가는 배처럼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하나의 값진 수단이 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안정된 곳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서로 다른 인생의 우선순위가 있듯 나의 룰모델은 모범형 샐러리맨이 아니기에 초보 뱃사공의 핸디캡에도 밧줄을 풀고 뱃고동 소리를 힘차게 내본 것이다.

도전할 수 있을 때 과감히 도전해 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축복이다. 누구에게는 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200km를 주행의 성취 여부를 떠나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이 참 감사하다.

침대에 눕자마자 장렬히 탈진했다. 일기 쓰기도 귀찮고 장비 정리하기도 귀찮고 심지어는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마저도 귀찮을 정도다. 아무래도 며칠 간은 마(魔)의 장벽을 넘은 대가로 마(魔)가 낄 것 같은 느낌이다. 같은 한자 다른 의미에서 유추해 보자면 어차피 앞으로 며칠간은 그만한 대가로 헉헉대며 다니지는 않을까. 어둠이 내려앉았고 몹시 지쳐 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200km의 주행기록에 혼자만 괜스레 뿌듯해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자전거여행#아메리카#인디애나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