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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글빛냄
이 책의 원제는 'How to Avoid the Clash of Civilizations - Dignity of Difference'이다. <차이의 존중 -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사무엘 헌팅턴이 제기한 "문명의 충돌", 나아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제기한 "역사의 종언"(세계 자본주의, 자유 민주주의 가차 없는 승리를 선언)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차이의 존엄"을 제안한다.

그가 제안한 차이의 존엄을 직설적으로 풀이하면 다름 아닌 "나도 옳고 너도 옳다"는 양시론이 된다. 얼핏 보면 무책임한 말장난 같지만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무엘 헌팅턴이 주장한 문명의 충돌이 부족주의에 입각한 사고(思考)라면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은 그 반대편에 위치한 보편주의(세계 자본주의)적 가치의 산물이다. 이때 부족주의와 보편주의는 서로 자기만이 옳다고 믿는 절대주의에 가깝다.

비단 헌팅턴과 후쿠야마의 극단적 대립뿐만 아니라 오늘날 지구촌은 도저히 결합할 수 없는, 화해와 타협이 불가능한 대립적 가치(절대주의)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에서 저자가 불가피하게 선택한 것이 바로 "나도 옳고 너도 옳다"는 양시론이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부족주의와 보편주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확신 없는 이중적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그의 발걸음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고 한 치의 오차도 없다.

비인간적인 세계화, 신자유주의는 황금의 구속복

서두에 언급했듯이 최근 문국현 후보의 '사람 중심 경제'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람의 향기가 소멸되어 가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대중들이 "사람 중심 경제"에 짙은 향수를 느끼며 공명(共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문국현 후보가 핵심을 제대로 짚은 것 같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사람에 대한 투자, 평생 교육, 보육 지원 등을 제시한 것도 돋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의 저자 역시 비인간적인 세계화, 신자유주의를 "황금의 구속복"에 비유하며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인간을 억압하는 구속복, 죄수복을 황금으로 만든다고 해서 그것이 황제의 의복일 리는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즉,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복은 결코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늘날 세계화, 신자유주의는 급속도로 시장을 왜곡시키고 있다. 불과 상위 2%에게 전체 부(富)의 80%, 아니 그 이상이 집중되는 현상은 자본주의 체제가 성립한 이래 최악의 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 적힌 "인간은 시장에 봉사하기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다. 시장이 인간에게 봉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란 구절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이 말에 입각해서 현실을 진단하면 오늘날 시장은 상위 2%에게만 봉사할 뿐이며 나머지 98%의 사람들은 거꾸로 시장에 봉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98%가 2%에 봉사하는 왜곡된 시장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더 걱정스러운 점은 아직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문제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에 20세기의 경제 모델이 대안으로 제시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고, 곳곳에서 박정희의 유령이 출몰하는 것 아니겠는가?

사람 중심 경제

이런 답답한 현실 속에서 문국현 후보가 제시한 "사람 중심 경제"는 엄청난 파괴력으로 대중의 가슴속을 파고들고 있다. 조너선 색스의 견해도 이와 다르지 않다. 98%가 2%에 봉사하는 왜곡된 시장 구조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간의 존엄성"과 "차이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것뿐이라고 그는 소리 높여 외친다. 그리고 그는 묻는다.

"어떤 경제 체제에 관해서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함을 드높이고 창조성을 장려하는 체제인가? 모든 사람이 이 세상의 물질적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체제인가? 고용자와 부자는 물론이고 피고용자와 가난한 자들도 모두 평등하게 존중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가? 약한 자와 빈곤한 자를 보호하는가? 모든 사람이 존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가? 성공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축복을 나누어주는가? 인간의 연대성을 강화하는 체제인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으며, 가치는 단지 가격이 아니며 삶에는 끊임없이 부를 좇는 것보다 더 귀중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는가? 시장이 유일한 분배 장치는 아니며 경제 체제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임을 알고 있는가?"

희망새를 기다리며

조너선 색스는 유대인 랍비다. 그래서 그의 희망새는 다분히 유대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종교에 대해 의도적으로 냉담한 시각을 견지하며 다른 종교와 문화로 희망의 외연을 넓혀나가고자 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어설픈 상대주의를 의미하진 않는다.

그가 바라보는 9·11테러는 종교 간의 뿌리 깊은 분쟁으로 인한 충돌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와 극단적 형태의 이슬람교라는 보편적인 두 문화가 충돌해서 발생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명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걸까? 그렇진 않다. 조너선 색스의 말에 의하면 문명 간 충돌로 위기를 맞은 우리 시대에 가장 중요한 해법은 서로 다른 문화와 종교가 어떤 방법으로 인종이나 피부색, 신앙 등이 다른 사람들, 즉 타자(他者)를 위해 공간을 내줄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공간"을 내준다... 깊이 음미해볼 만한 대목이다. 공간을 내주는 것은 공허한 외침이나 가식적인 말이 아닌 "실천"을 의미한다. 말로만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물리적 공간을 기꺼이 양보하는 일이다.

오늘날 현대인은 자신의 소유와 물리적 공간에 대해 거의 무한대적 집착을 보인다. 그래서 집 한 채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리고, 그러다 보니 갈수록 부의 집중 현상은 심화되어 급기야 상위 2%가 전체 부의 80% 이상을 독식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과연 지금 이대로 괜찮을까? 갈수록 양극화는 심해지고 비정규직은 늘어만 가는데 그 대안을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찾으려 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까?

지금 우리에겐 21세기의 희망새가 절실히 필요하다. 세계화, 신자유주의라는 왜곡된 시장경제를 대체할 새로운 희망새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미래를 열어갈 상생과 공존의 희망새가.

덧붙이는 글 | 조너선 색스, <차이의 존중>, 말글빛냄, 2007, 임재서 옮김. 374쪽.
가격 15,000원.


차이의 존중 - 문명의 충돌을 넘어서

조너선 색스 지음, 임재서 옮김, 말글빛냄(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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