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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부드럽게 움직인 것 같았지만 장내에 있던 그 누구도 능효봉이 어떻게 손을 썼는지, 그리고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우욱---”
게다가 나직한 신음성은 나중에 터져 나왔다. 낭패한 얼굴은 그렇다 치고 튕겨 나온 장유의 신형은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비틀거렸는데 왼쪽 팔이 덜렁거리는 것으로 보아 어깨부터 팔이 탈골된 것 같았다.
“나서지 말라니까.... 화산의 떨거지들을 상대할 사람은 따로 있다고 했잖나?
무엇이 그의 심사를 뒤틀리게 한 것일까? 그는 아예 작정하고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듯 보였다. 여전히 노기 서린 음성과 함께 천천히 장내로 걸어오는 능효봉을 보며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저 자식은 도대체 누군가? 어찌 저런 방자한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가? 누구기에 순식간에 화산칠검 중 서열 이위인 탁매검의 갑작스런 공격을 피하며 그의 왼쪽 팔을 탈골시켰을까?
“..............!”
다른 사람들의 놀람은 컸다. 허나 자하진인만큼 놀란 사람도 없었다. 자하진인의 조그맣고 동그란 눈은 찢어질 듯 커졌다. 그리고 얼굴에 두려움과 당황함이 엇갈려 떠오르고, 미세하나마 몸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헛것을 본 것일까? 아니다. 절대로 헛것을 본 게 아니었다. 이미 삼십년이 훨씬 지난 일이지만 저러한 움직임을 본 적이 있었고, 저 움직임으로 인하여 그의 사형 대신 자신이 장문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저것이 무림의 온갖 비난과 욕설에도 불구하고 명예와 의리를 헌신짝 버리듯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화산의 미래를 위해 실속만을 챙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자신이 평생 그리해도 그 두려움과 경외감을 벗어던질 수 없을지라도 다음 세대의 화산제자들에게만큼은 그러한 고통과 두려움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을 삼십년이 지난 지금에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언뜻 꿈에서라도 마주치지 않고 싶었던 그 인물의 모습이 저 자의 모습과 겹쳐지는 것은 자신의 기우였을까? 아니었다. 절대 아니었다. 그가 눈을 감아도 그것을 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참아야했다. 어떠한 모욕과 욕설이라도 참아야했다. 저 자가 누군지.... 그리고 정말 그 삼십년이 더 지났지만 자신에게 아직도 두려움을 주고 있는 그 자의 화신(化神)인지 확인해야 했다. 확인한 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았다.
허나 제자들은 달랐다. 그들의 얼굴에 놀란 기색은 떠올랐지만 그것은 불같이 치솟는 노기에 가려버렸다. 단 일수에 사형이 당하자 화산칠검 중 셋째인 구봉검(究峯劍) 조환(曹煥)과 여섯째인 상매검(霜梅劍) 당군직(唐君直)이 움직이려 하자 손을 들어 제지했다.
“사부님....!”
제자들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불만이 표출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저자는 분명 화산에 지독한 모욕을 가했고, 이것을 참는다는 것은 치욕이었다. 만약 이 사실이 무림에 알려지면 화산의 제자는 누구든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터였다.
“.............!”
자하진인의 입가에 가느다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며 참는 바람에 찢어진 입술에서 배어나오는 핏줄기였다. 그의 눈에도 핏발이 섰는데 두 주먹을 굳게 쥔 채 걸어 나오고 있는 능효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역시 인내의 극한을 보이며 참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은 더 이상 불만스런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장문인이 저러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능효봉은 천천히 걸어서 좌등의 앞으로 다가갔다.
“좌선배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용만 당하는 소림을 깨우쳐 주는 일은 소제에게 맡겨주시겠소?”
노기를 안으로 품으며 언제나 그렇듯 약간은 냉소적인, 또 한편으로는 능글거리며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그의 태도는 아무리 수행을 오래한 각원선사라도 참기가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시주는 누군가?”
그래도 막말은 하지 않았다. 목소리에 노기가 담겨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화산의 자하진인이 참는 것을 보며 각원선사는 저 사내가 필시 내력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능대협이 꼭 나서야겠소?”
“그렇소. 저들은 다시 한 번 철저히 짓밟히지 않는 한 영원히 꼭두각시로 춤을 추게 될 것이오. 어차피 소제는 저들과 얽혀있지만 좌선배께서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지 않소이까?”
“시주가 누구인지를 물었네.”
각원선사가 누구냐고 물었음에도 무시한 채 고개도 돌리지 않자 각원선사의 입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듯한 노기서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좌등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미 각원선사는 자신과의 승부에 흥미를 잃어버린 듯 했다. 이미 능효봉에 대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능효봉이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몸을 돌렸다.
“바로 당신과 같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육파일방을 징계할 사람....! 천년 전통 운운하면서도 뒤에서는 이기심과 협잡에 물들어 스스로 썩어가는 줄도 모르는 자들을 심판할 사람이지.”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네 이놈---! 오만과 방자함이 하늘에 닿았구나---!”
천둥이 치는 듯한 노성과 함께 각원선사의 가사가 떨쳐지며 능효봉을 향해 달려들었다. 저 자의 내력이 어찌하든 간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가사가 빳빳하게 펴지는가 싶더니 펄럭거리자 위맹한 기류가 맹렬하게 장내를 휩쓸기 시작했다.
우르릉---- 파파파팍----!
뇌성과 함께 땅거죽이 파이며 무형의 강기가 능효봉을 향해 몰아쳐왔다. 소림에서도 익힌 인물이 손으로 꼽을 수 있다는 반선수(盤禪袖)다. 가사에 진력을 실어 오장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소림의 절기.
소림의 인물 중 중원에 나서 반선수를 선보인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첫수부터, 그것도 후배를 상대로 먼저 반선수를 펼친 예는 없었고, 그것은 각원선사의 노기가 극에 달했다는 증거. 그 위력은 옆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역시 각원선사는 장경각주답게 실전되었다는 소림의 절기를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크흣--- 역시 한 수가 있었단 말이군.”
엄청난 암경이 밀려오는데도 능효봉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빠르게 몰아쳐오는 반선수의 강기에 마주쳐갔는데 그의 양 팔이 쫘악 벌려지며 마치 매가 먹이를 할퀴어가듯 수차례 앞뒤로 움직이자 마른 장작이 뽀개지는 듯한 소리가 연속해서 들렸다.
빠각--빡빡---!
그럼에도 능효봉의 신형은 느릿하게 각원선사 쪽으로 나아갔는데 그의 옷이 광풍을 만나듯 찢어질 것 같이 파닥거렸다. 각원선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반선수를 대성하지 못했더라도 칠성(七成)의 경지다. 자유자재로 발출과 회수는 아직 어렵다 해도 허공을 격하여 무형의 강기를 쏟아내는 위력은 십성의 경지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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