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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 사람들은 농활을 가지 않는다.'

곱씹어 볼만한 의미가 너무나 당연한 이 명제에 담겨있다. 농부들은 일상 그 자체가 농사를 짓는다는 의미도, 도시에 사는 사람들만이 특정한 시기에 농활을 간다는 것도, 또 농촌과 도시가 '보이지 않는 선'으로 나누어져 있고, 그러기에 '농활'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도 있다.

세상에서 가장 굵고 해체하기 힘든 선은 '보이지 않는 선'이다. 이 '선' 속에는 도시와 농촌이라는 이름의 차이도, 문화와 문명의 차이도, 환경의 차이도,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라는 '인식의 차이'도 포함되어 있다.

IVF(한국기독학생회) 사회부와 기독청년아카데미는 7월 9일(월)부터 7월 12일(목)까지 철원 동송읍 오덕리 마을로 이 '선'을 넘어 '생명, 평화, 통일 청년 농활 한마당'을 다녀왔다. 3박 4일의 '짧은 시간',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삶을 바꾸어내고 있는 '살아있는 긴 시간'을 통해 체험하고 느끼며 깨달았던 이야기를 풀어내고자 한다.

▲ 다 함께 모여 하늘인 밥을 나누고 있다.
ⓒ 이서원
밥상 노래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김지하 시인의 '밥은 하늘이다'라는 시다. 농활 식사시간에는 매번 이 시로 만든 '밥가'가 울려 퍼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식'의 문제는 소비 생활을 이끌어내는 홍위병이다. '먹는 장사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명언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밥'은 하늘이다. 어쩌면 농활의 시간 동안 우리들이 깨달은 최고의 사실은 밥은 '서로 서로 나누어 먹는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이 '하늘'을 남기지 않고, 나누어 먹는 법을 함께 알아가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색다른 시도를 해 보았다. 고향집에서 모두가 함께 먹을 수 있는 밑반찬을 싸서 오고, 함께 밥상을 준비하고 정리하며, 잔반을 남기지 말고 먹자는 것이다. 한 농활 식구는 농활 내내 가장 선명히 남은 기억이 바로 이 '밥가'와 밥상 시간이었다고 한다.

건달 농법, 그러나 그 속에 담겨진 진실

철원 오덕리의 한 농민은 자신의 농사를 이름하여 '건달 농법'이라고 했다. 무슨 뜻인고 하니 슬렁슬렁 농사를 지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마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이리 저리 마을 일로 불려 다니고 정부차원의 교육 차 타지방으로 출장을 가게 될 때 농사에만 매진하는 것에 약간은 무리가 있나 보다. 하지만, 그 뒤 의미심장한 말이 이어진다.

"농사는 절대 인간의 노력으로만 지어지는 것이 아니야. 땅과 비와 바람과 해가 함께 어우러져 농사를 짓는 거야. 농사를 슬렁슬렁 지은 사람과 열심히 지은 사람의 소출이 별 차이 없을 때가 태반이야."

'자기 스스로의 노력과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는 등가교환의 원칙은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신봉하는 부동의 진리이다. 노력하는 자는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성공 신화는 지나치게 '인간 중심'의 사고를 드러낸다. 인간의 노력이, 인간의 지식이 모든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는 '마스터 키'인 것이다.

창세기 1, 2장에서 채소와 열매를 내는 주체는 사람이 아닌 '땅'이다. 인간은 피조물을 돌보는 존재로 만들어졌지만, 또한 다른 피조물에 의존하는 존재로 만들어졌다. 자본주의 시대, 도시 문명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가 의존적 존재임을 자각할 수 있는 여백은 거의 존재치 않는 듯하다. 그리고 그 여백의 부재는 우리 스스로를 더 오만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노력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노력과 성실함, 그리고 진정성은 너무도 고귀하고 값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의존적 존재임을 알지 못하고 생명이 온 만물의 의존적 관계 속에서 탄생하고 유지되는 '관계적 존재'임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인간 스스로와 온 생명을 황폐화시키는 '파괴자'가 되지 않을까?

신자유주의의 최후전선 철원

▲ 뜨거운 여름. 벼들이 과연 얼마나 자랄까
ⓒ 이서원
철원은 오대쌀로 유명한 곳이다. 특히 우리가 함께 한 오덕리 마을은 대부분의 가구가 벼농사를 짓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벼농사를 짓는 농민들도 쌀을 사서 먹는다는 것이다. 쌀을 만들어내는 당사자들이 왜 쌀을 사서 먹는지 처음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의미인 즉, 농민들이 생산한 모든 벼를 쌀로 만들어지는 공정에 맡기며 그것을 다시 사 먹는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 뉴스에선 처음으로 이천 쌀이 수출되었다고 떠들썩하다. 한미FTA로 오직 암울하게만 비춰졌던 농촌에 큰 서광이 비추이는 듯, 우리의 농촌 역시 경쟁력을 기르고 상품 가치를 인정받게 되면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이천 쌀의 '미국 최초 입성'을 기뻐해야하는 것일까? 우리 '농작물 수출'은 농촌을 살리는 보루가 될 수 있을까?

철원은 북한과 맞닿아 있는 지리적 공간이자 신자유주의의 최후전선이다. 농촌의 공간에서 경쟁의 논리가 또 다르게 엄습하고 있다. 내가 경작한 작물을 내가 사먹어야 하고, 외국의 농산물과 가격, 품질 경쟁을 해야 하고, 그 경쟁에서 승리해야지만 우리는 생존의 권리를 획득할 수가 있다. 농촌의 공간이 생명의 공간으로, 관계의 공간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을까?

농촌이 그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됐으면

도시에서 농촌의 '선을 넘어' 농활을 다녀왔다. 그리고 농활이 끝나고 그 선을 다시 넘어 도시로 돌아왔다. 농활을 다녀와 한달여의 시간이 흐른 후, 함께 갔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 그간의 생활을 나누었고 농촌에서 느끼고 경험했던 그 삶이 우리의 삶 속에 어떻게 지속되는지를 이야기했다.

한 친구는 농촌 가서 마을 분들께 인사했을 때 반갑게 맞아주고 초대하던 이웃들을 기억하며, 한번도 제대로 인사하지 못했던 주위 이웃들의 집을 방문하고 인사하기를 시도했다고 한다. 또 다른 친구는 함께 하는 공부방 친구들과 식사 전 '밥가'를 부르며 밥의 소중함에 대해 느끼고 있단다. 하지만 또 한편으론, 농촌에서 보내었던 땅의 그 느낌을 도시에서 잊어가고 있다는 한 친구의 나눔도 있었다.

과거 농활은 농민을 계몽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고, 어려운 농촌의 실상을 몸소 경험해 보려는 동정심에 의해 진행되기도 했다. 하지만, 농활의 진정한 의미는 도시와 농촌의 선을 오가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을 허무는 것이 아닐까?

농촌이 누리고 있는 그 삶을 도시에서 살 수 있는 것, 이웃의 소중함을 깨닫고 친구를 만들어 내며 마을을 다시 일구어 낼 수 있는 것, 우리 자신이 내 이웃 그리고 온 생명과 진정한 관계적 존재임을 깨닫고 자기 파괴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우리의 문명을 제대로 성찰해 낼 수 있는 것 등. 농활을 통해 도시의 '농촌 되기'를 꿈꿔본다.

농촌이 원래의 그 모습으로 잘 보존되었으면 좋겠다. 신자유주의의 마지막 전선이 아니라, 마을이 남아 있고, 생명이 살아있고, 그래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복음과 상황 9월호에 실릴 글입니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기독청년아카데미#철원 동송읍 오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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