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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가을비가 줄기차게 내립니다. 8월부터 시작된 비가 9월이 와도 시도 때도 없이 퍼부으니 죽을 맛입니다. 두 물째 고추를 따 하우스에 가득하건만 태양빛을 볼 수 없으니 흐물흐물 매가리 없이 깊은 숨을 내쉬고 있습니다. 이대로 나가다간 바삭한 태양초를 기대하기는 물 건너 간 것 같습니다.

 

고추가 잘 말라 빳빳하게 바삭거려야 뿌듯한 기운이 솟아오련만, 자고 나면 물컥거리는 고추들 땜에 속이 상하고 부글거립니다. 늘 그렇듯 고추농사는 짓되 고추로 벌어들이는 돈은 집사람 몫으로 난 참견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추농사가 잘돼 수입이 쏠쏠하면 남편으로서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뭐란 말인가.

 

화초 고추 하느님, 햇볕 한 줌이 그립습니다.
화초 고추하느님, 햇볕 한 줌이 그립습니다. ⓒ 윤희경

비는 계속 내리고 속이 부글거려 어정대다 지금 한참 붉게 타오르는 가을꽃 구경을 떠납니다. 비만 내리고 태양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꽃 속에서 가을 햇볕을 불러봅니다. 숫잔대, 석산, 백작약이 한결같이 붉게 타오릅니다.

 

숫잔대 숫잔대는 보라색이 토종, 붉은 색은 북아메리카가 고향으로 정열적이다.
숫잔대숫잔대는 보라색이 토종, 붉은 색은 북아메리카가 고향으로 정열적이다. ⓒ 윤희경

숫잔대, 난 '숫'이란 말을 좋아합니다. 오늘 같이 비가 내리는 날엔 강렬한 붉은 자주색이 훨씬 마음을 밝게 해 줍니다. 토종 숫잔대는 대개 보라색인데 붉은 색은 북아메리카가 고향인 원예종입니다. 붉게 타오르는 정열이 하도 그리워 오늘 하룻밤만 가까이 하렵니다.

 

 숫잔대도 햇볕을 기다리며 붉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숫잔대도 햇볕을 기다리며 붉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 윤희경

상사화 석산, 꽃무릇이라고도 합니다. 빛 속에 그리운 임 보고파 붉은 입술을 깨물며 솟아올랐으나 임은 벌써 세상을 떠난 지 오래되었습니다. 꽃은 잎을 볼 수 없고, 잎은 꽃을 볼 수 없습니다. 그저 수많은 세월에 홀로 피어나 임이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만나겠지요. 서로 만나지 못하고 어긋나는 삶이 얼마나 애틋하게 가슴을 저려오는지 임을 그리워해 본 사람은 다 압니다. 죽어서라도 한 번은 만나 뵈어야지요.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다 하지 않았던가요.

 

 석산(상사화)
석산(상사화) ⓒ 윤희경

작약 줄기는 이맘때가 되면 줄기가 말라 뼈만 앙상합니다. 오늘 빗속에서 빨간 무엇이 반짝이기에 하도 신기해 가까이 다가서 봅니다. 백작약 열매가 빗물에 붉은 눈물을 툭툭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 동안 늦은 봄에 피는 백작약 꽃은 많이 보아왔지만 오늘처럼 새빨간 열매를 보기는 처음입니다.

 

 백작약 열매가 이리 정열적일 줄이야 미쳐 몰랐습니다.
백작약 열매가 이리 정열적일 줄이야 미쳐 몰랐습니다. ⓒ 윤희경

그칠 줄 모르는 비, 하우스에 가득한 고추들, 빨딱 하니 싱싱하던 그 원기는 다 어디 가고 흐물흐물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한여름 따갑게 내리 쬐던 햇볕 한 줌이 아쉬운 오늘입니다. 연신 퍼붓는 긴 빗줄기에 햇빛 구경을 할 수 없으니 고추가 곪아터지고 썩어갑니다. 좀 꾸덕꾸덕한가 싶어 뒤집고 또 뒤집어 봐도 허탕입니다.

 

 백당 열매에도 빗방울이 달랑 매달려 있습니다.
백당 열매에도 빗방울이 달랑 매달려 있습니다. ⓒ 윤희경

가을의 충만감으로 가득해야 할 논배미마다 깜부기가 달라붙어 황금들판이 검게 물들어가고, 벼 대궁이 쓰러져 싹이 하얗습니다. 그렇잖아도 어려운 판국에 농부들이 죽겠다 아우성입니다.

 

내일부터라도 어서 비가 그치고 해가 반짝 솟아오르면 참 좋겠습니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 한 줌이 이리 그리울 수가 없습니다. 태양이시여, 가을이시여, 어서 이 몸을 뜨겁게 달궈주소서.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에도 함께합니다. 다음 주소로 찾아오면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상류에서 많은 임들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숫잔대#상사화#백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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