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어리 사건의 연루자들을 사법처리한 태종은 세자 양녕을 도마 위에 올렸다. 괴로운 일이다. 후대를 이어 갈 지존. 세자의 비행을 들추어 내놓고 신하들의 의견을 구한다는 것은 썩 내키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쉬쉬한다고 묻힐 일이 아니다.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세자의 행실이 이와 같으니 태갑(太甲)을 내쫓던 고사(古事)를 본받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은(殷)나라의 제2대 왕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3년간 포학 방탕하였다. 재상 이윤(伊尹)의 내침을 받은 태종은 3년 뒤에 깊이 뉘우치고 다시 돌아와 선정을 베풀었다는 고사(故事)다. 이윤은 군주를 내쫓아 개과천선 시키고 돌아온 왕에게 권력을 돌려준 중국의 전설적인 재상이다.

"세자께서는 본래 천질(天質)이 아름다우니 주변의 사악한 자들을 제거하고 정직한 사람을 골라 가르치게 한다면 앞으로 반드시 허물을 고치고 착하게 될 것입니다."

조말생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임금이 지침을 내렸으니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세자를 이렇게 되게 한 것은 실상 신 등이 교도(敎導)하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변계량이 머리를 숙였다. 변계량은 세자의 빈객이다.

"이것은 경등의 죄가 아니다. 내가 아비이면서 의롭게 가르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경등이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세자를 성군의 재목으로 키워야겠다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태종은 세자를 김한로의 집으로 추방했다. 곁들여 공상(供上)을 정지하라 명했다. 궁 밖으로 내쳐 연금에 처한 것이다. 공상은 대궐에서 공급하는 세자의 예에 준하는 모든 물품을 말한다. 세자가 사가로 쫓겨났지만 김한로의 집은 처가다. 대궐은 아니었지만 편안한 집이었다. 세자를 궁 밖으로 쫓아낸 태종은 빈객(賓客) 변계량을 은밀히 불렀다.

"경이 세자의 실수를 극진히 아뢰어 세자로 하여금 뉘우쳐 깨닫게 하고 세자가 다시는 이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도록 종묘에 맹세하여 고(告)하게 하라."

종묘 정전. 태조, 태종, 세종을 모시고 있다.
종묘 정전.태조, 태종, 세종을 모시고 있다. ⓒ 이정근

태종은 아들을 버리고 세자를 폐한다는 것은 아직 생각해보지 않았다. 세자 주변에 꼬이는 아첨배를 철저히 차단하여 성군의 재목으로 키워야겠다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나이 어린 세자가 저지른 실수를 일벌백계 차원에서 다스려 개과천선의 기회로 삼고 싶었다. 이때 세자 나이 23세였다.

세자의 연금생활이 시작되었다. 연지동 처가이다. 세자궁 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신분은 궁에서 쫓겨난 세자다. 철부지 행동으로 부왕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세자 양녕은 연금 생활동안 많은 것을 뉘우쳤다. 세자가 근신하고 있는 연지동으로 임금의 서(書)가 도착했다. 자경잠(自警箴)이다.

"어버이에게 불효하고서 부귀를 누리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이후로 불효를 한다면 부모는 비록 사랑하더라도 하늘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다."

준엄한 경고다. 부모가 자식의 허물을 감싼다 해도 하늘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종의 목소리다. 중요한 의미가 내포된 발언이다. 등극은 하늘의 길이다. 하늘이 열어주어야 오를 수 있는 자리다. 하늘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세자라도 오를 수 없다는 경고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양녕의 마음은 어리에게 있었다. 부왕의 뼈있는 경고를 알아듣지 못했을까? 알고도 묵살했을까?

쫓겨난 왕세자,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야심한 밤. 잠을 이루지 못한 세자가 뜰 밖에 나왔다. 정월은 넘겼지만 밤바람이 싸늘하다. 하늘엔 별들이 속삭이고 달빛이 환하다. 엊그제가 보름이었던가. 열이레 날이다. 약간 이즈러진 달이 그래도 둥그렇다. 양녕은 달을 쳐다봤다. 이 순간 어리도 달을 쳐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보고 싶다. 어리가 보고 싶다.'

넋을 잃고 달을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세자 저하, 밤바람이 차갑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세자 스승 변계량이었다.

"빈객이 어인 일이시오?"
"주상 전하께서 마음 아파하십니다. 용서를 빌고 환궁하셔야지요?"
"그리하고 싶소만 방법을 모르오. 빈객께서 도와주시오."

사랑방으로 돌아온 세자와 변계량은 머리를 맞대고 반성문을 쓰기 시작했다. '증손(曾孫) 왕세자 신(臣) 이제(李禔)는 조상의 영전에 고합니다'로 시작하는 종묘에 바치는 글이었다. 태조를 비롯한 목조·익조·도조·환조 등 5대조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장문의 반성문이었다.
종묘 영녕전. 중앙에 1,2,3,4실을 두어 목조·익조·도조·환조를 모시고 좌측 5실부터 정종, 문종, 단종을 모시고 있다.
종묘 영녕전.중앙에 1,2,3,4실을 두어 목조·익조·도조·환조를 모시고 좌측 5실부터 정종, 문종, 단종을 모시고 있다. ⓒ 이정근

"부왕 전하께서는 신 제(禔)를 적장(嫡長)이라 하여 세자로 책봉하시고 아침저녁으로 훈회(訓誨)하시는 것이 깊고도 간절하였습니다. 또 서연(書筵)을 두어 날마다 빈객(賓客)·대간(臺諫)으로 하여금 경서(經書)를 강명(講明)하게 하니 세자 된 직분을 지극히 함으로써 승조(承祧)의 중대함에 맞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禔)가 생각하건대 군부(君父)의 마음을 우러러 몸 받지 못하고 빈사(賓師)의 가르침을 패복(佩服)하지 못하여 정사(正士)를 소박(疎薄)하고 소인(小人)을 친압(親狎)하였습니다. 사욕 때문에 법도를 무너뜨리고 방종 때문에 예의를 무너뜨려 어버이의 마음을 크게 상하게 하였고 위로는 조종(祖宗)의 덕을 더럽혔으니 신의 죄가 큽니다. 마음을 씻고 행실을 바루고자 자애자신(自艾自新) 조목을 갖추어 조종의 영전에 다짐하는 바입니다."

총 8개 항목으로 된 조상에게 바치는 글을 쓰고 나니 3경이다. 지체할 것 없다. 부왕 태종에게도 용서를 구하는 반성문을 썼다.

"신 제(禔)는 명완(冥頑)하고 남과 같지 못함에도 부왕 전하께서 신을 적장(嫡長)이라 하여 세자로 책봉하신지 14년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어린아이의 습성이 있는 까닭에 소인의 유혹에 빠지고 또 다시 혼미함에 빠져 끝내는 하늘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임금을 속이기까지 하였으니 하늘인들 용납할 수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스스로 지은 죄는 피할 수 없다' 한 것이 신을 두고 이름이라 하겠습니다. 소인을 제거하기는 어렵고 친하기는 쉬운 것이 분명합니다. 바라건대, 전일에 기기(奇技)와 음교(淫巧)로써 신을 불의(不義)에 빠지게 한 자들을 법대로 처단하여 후래(後來)의 섬소(憸小)들이 아첨하는 길을 막으소서. 전하께서는 신의 어리석음을 가엾게 여겨 주소서."

종묘. 재실
종묘.재실 ⓒ 이정근

반성 없는 반성문에서 피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이튿날 세자의 반성문을 받아든 태종은 매우 기뻐하였다.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웠던 궁궐이 밝아졌다. 모두가 환한 얼굴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아니 될 대목이 있다. '신을 불의(不義)에 빠지게 한 자들을 법대로 처단하여 주소서' 하는 대목이다. 세자의 입을 빌렸지만 변계량의 목소리다. 변계량은 하륜의 문생이고 태종이 총애하는 젊은 엘리트다. 세자와 함께 어울렸던 자들에게는 저승사자와도 같은 피를 부르는 소리다. 이숙번도 예외는 아니다.

"세자께서 허물을 뉘우쳤으니 더없이 기쁜 마음으로 하례 드립니다."

정부·공신(功臣)·육조(六曹)·대간(臺諫)과 입직(入直)했던 총제(摠制) 등이 기쁜 마음으로 하례했다.

"세자를 환궁하도록 하라."

양녕이 세자궁으로 돌아왔다. 대궐에서 쫓겨난 지 닷새만이다. 반성하는 시간이 5일이 짧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반성문을 빈객 변계량이 짓고 썼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모름지기 반성이란 스스로 우러나왔을 때 의미가 있고 실천의 동기를 부여한다. 대필한 반성문은 반성자의 가슴에 중압감으로 새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경잠#양녕대군#이방원#변계량#종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