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늙은 여인

 

         

 

이 늙은 여인의 초상화는 서양미술사상 정밀화 전통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정말 사진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놀라운 작품입니다. 얼굴뿐 아니라 머리의 천을 보십시오.

 

"여인의 얼굴에는 어떠한 붓 자국도 찾아볼 수 없으며, 수많은 주름과 노화된 피부조직, 심지어 땀구멍까지도 놀라울 정도로 정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머리를 감싼 부드러운 천의 질감과 점박이 무늬가 들어간 모피의 재질감까지 모든 세부 하나하나가 접사렌즈를 대고 초점을 정확하게 맞춘 사진처럼 명확하다." - 그림 설명 중에서

 

이 놀라운 그림을 그린 발타자르 데너는 함부르크 출신이지만 참으로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화가로서의 삶을 삽니다. 궁정에서 초상화를 그리면서요. 그의 사실주의적인 화풍은 네덜란드의 화풍과 비슷한 선상에 있습니다. 생전에 명성을 얻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저 무엄하게 생각합니다만, 이 화가에게 그림 그리기는 일종의 노동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명성과 실력은 인정받았으되 그림 그리기가 즐거움은 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밀화를 그리는 작업은 한 치의 실수도 용납 안 되는 일이고, 더욱이 상상력 발휘에 있어 제한을 받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렘브란트 같은 자유로운 화가는 새로운 것을 계속 시도하고, 그린 그림을 다시 덧칠하는 등의 작업을 자유로이 했습니다. 나중에는 초상화 작업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모네는 자기가 그린 그림 중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불태워 버렸습니다. 

 

데너같이 꼼꼼한 화가는 일종의 공방을 차려, 제자들이 그린 그림에 약간의 수정을 가하고서 내보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루벤스는 자신의 공방을 그렇게도 운영했습니다. 당시 다른 화가의 그림을 모사, 복제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 일종의 회화수업의 일환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그런 수업과정을 거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데너의 그림은 그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그림입니다. 데너의 눈은 정말 성능 좋은 현미경 같습니다. 실제 그림이 가로 세로 40cm도 되지 않는 작은 편에 속하는 작품이라 더욱 놀랍습니다.

 

황제 루돌프 2세

 

         

    
황제 루돌프 2세의 초상화입니다. 당연히 궁정화가가 그렸겠죠? <비엔나 미술사박물관전> 두 번째 글에서 소개한, '17세기 가족사진'이라 할 '바쿠스, 케레스, 아모르'를 그린 한스 폰 아헨이 그 사람입니다. 루돌프 2세는 아헨에게 기사 작위를 주었는데 둘은 친구처럼 가까이 지냈답니다.

 

그림을 보면 어딘가 황제 같은 느낌이 다소 떨어지는 인물 같아 보입니다. 카리스마 같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아헨은 친구 같은 황제를 전혀 이상화해서 그리지 않았습니다. 결점이 있는 성격까지 드러나게 하는 것을 허락 받았으니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황제의 얼굴에 "심하게 튀어나온 턱, 다루기 까다로울 법한 수염, 슬퍼 보이면서도 예민한 시선"(도록 중에서)을 그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건 다소 황제치고는 색다른 루돌프 2세의 성향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격이 괴팍하고 우울했다고 합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르지만, 그래서 당연히 빈에 있어야 하지만, 실권을 동생에게 빼앗기고 프라하에 있는 궁에서 평생 삽니다.

 

그렇지만 학문과 예술을 좋아했던 그로서는, 영토 관리와 외교 관계 유지를 위해 골머리를 썩여야 할 실권의 황제 자리보다는 이곳 프라하가 오히려 더 행복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는 케플러 같은 천문학자와 연금술사, 화가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한스 폰 아헨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에로틱한 그림을 좋아해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연애담을 자주 그리게 했습니다. 그런 취미가 고상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런 그림의 인물에 화가가 자신의 가족 얼굴을 그릴 수 있게 용인한 것을 보면 둘의 사이가 막역한 관계였다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았던 그에게는 아헨 같은 예술적 능력이 뛰어난 친구가 늘 곁에 있어주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마리 드 부르고뉴

 

                     

 

‘마리 드 부르고뉴’는 ‘부르고뉴의 마리’라는 뜻입니다. 마리가 부르고뉴 출신임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프랑스 귀족 이름에는 흔히 이 전치사 '드(de)'가 들어가 있습니다. 샤를 드 골(Charles de Gaulle)이 그 한 예이지요. 전시회엔 독일어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만 원래 이름대로 불어 발음으로 번역해 놓았네요

 

이 그림의 제작연도가 1500년경이니 전시회 그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입니다.

 

부르고뉴는 하나의 국가보다는 작은 규모라 할 수 있는 ‘공국(公國)’에 속하는 곳이었습니다. 공국은 국왕으로부터 ‘공(公)’이라는 칭호를 받는 군주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부르고뉴는 프랑스 동쪽 지방과 여타 주변 지역을 말하는데, 프랑스 왕궁과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력을 키워 갔습니다.

 

프랑스 국토는 유럽에서 가장 비옥한 땅에 속해서 프랑스는 지금도 유럽에서 가장 풍요로운 농업 국가입니다. 그런데 부르고뉴가 당시 가장 부유한 공국에 속했습니다. 부르고뉴의 군주 샤를은 자신의 공국을 키워서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당연히 프랑스와 갈등을 빚게 되죠. 그러나 샤를은 프랑스의 용병인 스위스 병사에 의해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그에게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가 위 그림 속 마리입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사망 후 예정되어 있던 합스부르크 황제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결혼하게 됩니다. 부르고뉴를 지배하려는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지만, 그래도 둘은 금술 좋은 부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리는 5년 쯤 후에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죽게 됩니다. 마리의 사망 후 권력은 남편인 막시밀리안에게로 넘어갑니다. 사실은 부르고뉴 공국은 마리 가문의 것이므로 마리의 아들에게 넘어가는 것이 순서였으나, 아들은 이때 세살바기 어린아이였습니다. 저항이 있었지만 그걸 진압한 이후로, 부르고뉴 공국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권 안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그녀를 정말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24세에 죽은 그녀의 초상화를 궁정화가로 하여금 계속 그리게 합니다. 

 

그림 속 마리는 부르고뉴 고유의 모자 ‘에넹’을 쓰고 있고, 석류 열매 디자인의 이탈리아산 의상을 입고 있습니다. 손에는 둘둘 말린 편지를 들고 있어 분위기를 더합니다. 왕가의 초상화 치고는 특이하게 창밖 풍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마리는 죽어서도 남편 옆에 언제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자료조사 중 놀라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위 그림 '마리 드 부르고뉴'는 15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는데, 마리의 남편인 막시밀리안도 그 한참 전인 1493년에 죽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바대로 막시밀리안은 마리를 잊지 못해 그녀의 초상화를 계속 그리게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계속 그림을 그리도록 유언을 남긴 것이죠.

 

이 그림은 막시밀리안 생존 당시의 궁정화가가 아닌, 1498년부터 궁정화가로 일한 니클라스 라이저가 그린 그림입니다. 당연히 마리 생전에 그려졌을 초상화를 보고서 상상과 당시의 유행 형식을 보태 그렸겠죠. 왕가의 사람들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렇게 요절하는 경우들을 자주 접합니다.  

 

마르가리타

 

          

 

그림을 보면 마르가리타의 얼굴과 머리 부분은 선명하고 화사한데, 옷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칠게 그려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드레스 부분을 확대해서 보여드립니다. 실제로 가서 보아도 그 점을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불분명한 선들과 얼룩진 색의 자유로운 배치도 약간의 거리를 두고서 바라보면 통합적인 구도로 보입니다. 옷의 주름과 반짝이는 표면의 재질감이 생생하게 살아나 보입니다. 뛰어난 화가들은 가까이서 보이는 모습과 멀리서 보이는 모습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그릴 것입니다. 

 

이 깜찍한 공주의 삶도 너무 짧았습니다. 결혼하고서 몇 년 후에 죽는데 그때 나이가 22살이었습니다. 당시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빈번했던 근친혼 풍습의 유전적 폐해라고 추정됩니다. 마르가리타도 어려서부터 사촌격의 사람과 혼인하기로 약조가 되어 있었습니다. 불행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르가리타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딸이었고, 그녀의 미래 남편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본거지인 빈(비엔나)에 있었던 레오폴트 1세였습니다. 안타깝지만, 이 그림은 장차 며느리가 될 이의 근황을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당연히 빈으로 보내지고요.

 

이해를 돕기 위해 이전 시대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이보다 한참 전 그러니까 15세기 말, 먼저 소개한 마리 드 부르고뉴와 막시밀리안의 아들인 필립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부르고뉴를 다스리는데, 그는 스페인의 왕녀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왕가와 스페인이 관련을 맺게 됩니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카를로스가 유럽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군주가 됩니다. 그는 스페인 사람 외할아버지가 죽자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습니다. 그 후 빈의 친할아버지가 죽자, 이젠 왕위 승계에 따라 스페인을 포함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가 됩니다. 왕가의 역사는 그렇게 흘러갑니다. 

 

"그래도 아이는 역시 아이일 수밖에 없다. 마르가리타의 얼굴에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마음껏 뛰놀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포동포동한 얼굴과 손으로 어른들의 사랑과 관심을 얻고자 하는 본능적인 열망을 드러낸다. 화가는 이 같은 공주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녀를 꼭 껴안아주고 싶었을지 모른다. 모두 위선의 가면을 쓰고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궁정의 분위기이기 때문에) 이처럼 따뜻한 시선의 화가와 눈을 맞출 수 있었다는 것은 짧은 생애를 살다 간 마르가리타에게도 분명 행운이요 위로였을 것이다." - <화가와 모델> 중에서

 

이제 이 그림을 그린 디에고 벨라스케스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인용글은 정말 단순명료합니다.

 

"벨라스케스의 인생에서 중요했던 사건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궁정화가로 발탁된 것이다. 그것 말고는 그의 삶에서 이렇다 할 만한 큰 사건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한 번 혼인했으며, 오로지 한 사람의 친구(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를 두었고, 한 작업실(궁정)에 파묻혀 그림을 그렸다." - 위의 책에서

 

그만큼 인간적으로 왕가 사람들과 친하고, 궁정화가로서 죽을 때까지 충실히 산 이도 없다는 말입니다. 6살 차이의 펠리페 4세와는 끈끈한 우정을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위 그림처럼 펠리페 4세의 딸 마르가리타 공주의 초상화도 정성을 다해 그렸습니다. 마르가리타가 성장하면서 여러 개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위 그림은 마르가리타의 5살 무렵 모습입니다.

 

벨라스케스는 분명 출세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작 본인은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과 삶의 애환에 대한 관심을 잃어본 적이 없답니다.

 

"세속적인 출세욕과 뜨거운 인간애,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동시에 녹아들어 있는 매우 특이하고도 복합적인 인간이었던 것이다." - 위의 책에서

 

루돌프 2세의 궁이 있던 헝가리와, 위 펠리페 4세의 스페인을 포함해서 유럽을 지배했던 신성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세월이 한참 흘러 1809년 나폴레옹의 빈 침공 이후 몰락합니다. 왕가의 지배 하에 있던 16개의 연방은 탈퇴하고, 당시의 황제 프란츠 2세는 퇴위, 합스부르크 가문은 단지 오스트리아 황제의 세력으로 축소됩니다.  

 

다만, 각지에서 모아들인 엄청난 미술품과 유물들이 그 유산으로 남아 있는 게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왕가의 사람들이 예술을 기호로 삼은 것은 긍정적인 평가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무도회 같은 대형 축제와 거대한 왕궁 건립에만 몰두했다면 후대에 호된 비판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 미술을 발전, 유지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왕가의 마지막 업적이 바로 이 ‘비엔나 미술사박물관’이고요.

 

전시회 작품 중 초상화에 해당하는 작품을 몇 점 소개했습니다. 초상화를 그리는 목적은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 모델이 되는 이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상대 가문에게 선보이기 위해, 젊음을 기록하기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말입니다.

 

그 작업은 화가에겐 특히 우애가 있는 상대일 경우에는 그의 현재를 담는, 아름답고 영화로운 순간을 영원히 남기는 화가 자신만의 특권일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사진은 품이 정말 덜 드는 생색내기가 되네요. 

덧붙이는 글 | <비엔나 미술사박물관전>, 덕수궁 내 덕수궁미술관, 9월 30일까지, 02-368-1414, 월요일 휴관, 저녁 8시 반까지.


#브루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