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 디딘 한 쪽 다리가 떨렸다. 하지만 창공을 향해 치솟는 학의 기품이 살아 있는 품새다. 분장실까지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렸다. 그가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채 문을 열고 들어섰다. 노춤꾼 학산 김덕명(84·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 예능보유자)옹이 18일 저녁 경남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무대에 섰다. 그는 김해·마산·진주 등지에서 활동하는 제자들과 함께 '제2회 학산 김덕명류 전통춤 공연' 무대를 열었다. 총 2시간 10분 가량 진행된 공연인데, 김옹은 여러 차례 무대에 섰다. 그는 ‘지성승무’로 첫 무대를 장식했다. 뒤이어 제자들이 추는 ‘교방타령무’와 ‘호걸양반춤’ ‘살풀이’ ‘연등바라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잘한다”는 추임새를 연발했다. 수제자 박계현씨가 ‘연등나례무’를 추자 그는 염불을 외우면서 반주를 넣기도 했다. 이어 김옹은 박계현씨와 나란히 무대에 섰다. 두건을 쓰고 하얀 옷을 입고서. ‘양산학춤’을 추었다. 두 춤꾼이 추는 학춤은 기품이 있고 우아해 마치 한 쌍의 학이 노니는 것과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학춤’ 마지막에 박씨를 비롯한 제자들은 무대로 나와 김옹한테 큰절을 하기도 했다. 올해초 담석증 수술... 춤 가르치는 일도 열심히
이처럼 김옹의 춤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모른다. 올해 1월 담석증 수술을 하기도 한 그는 무대에 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이 솟구친다. 부산에 거주하는 그는 요즘도 매주 한두 차례 양산시여성복지회관과 김해민속예술보존회, 진주 학산전통춤연구회 등을 오고 가면서 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20여종의 전통춤을 보유·계승하고 있다. 2006년 ‘대전한밭 국악전국경연대회’ 명인부 최우수상을 받은 ‘연등바라춤’을 비롯해 ‘호걸양반춤’ ‘연등나례살풀이춤’ ‘지성승무’ ‘교방타령춤’ ‘신라장검무’ ‘쾌재나 청청춤’ ‘석전놀이춤’ ‘성주풀이춤’ 등이다. 그는 1976년 진주에서 ‘한량무’ 시연 뒤 성계옥·서정남·정행금·최금순·김연이·고정필순·김정애 등과 함께 경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한량무’는 조선 숙종 때 김만중의 ‘구운몽’ 가운데 일부 이야기를 무용극으로 구성한 춤으로, 그는 기생 김농주에게 사사했다. ‘양산 사찰학춤’도 그의 대표작이다. 양산 통도사 앞에서 노니는 학들을 보고 그 몸짓대로 추던 춤인데 ‘양산학춤’이라고도 한다. 김옹은 이 춤을 정부 내지 경남도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으려 했지만 아직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명인명무전’이 열릴 때마다 빠지지 않고 무대에 서왔다. 국외에도 그의 춤은 널리 알려져 있는데, 지난해에는 프랑스 무대에 서기도 했다. 1997년 일본 NHK 방송은 세계 각국의 대표적인 춤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춤으로 그의 ‘학춤’을 촬영해 방송하기도 했다.
“우리것 익히고 가꾸어야” 이번 공연을 마친 뒤 그에게 소감을 물었더니 “제자들이 열심히 해주고 있어 마음이 놓인다. 힘 되는대로 가르치고 무대에도 서고 싶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에 대해 물었더니, 김옹은 “작년에 프랑스 무대에 섰을 때 더 느꼈지만, 역시 우리것이 제일이더라. 우리것을 자꾸 익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춤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것이 아니면 국가의 존재도 없다. 자기 나라 것이 좋든 하찮든 아껴야 한다”면서 “춤만 놓고 보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우리 춤을 숭상하고 발굴하고 양성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얼마 전 심사하러 갔더니 교수들이 많이 와 있더라. 그 자리에서 바로 말했다. 우리가 우리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풍토는 교수들 탓이 크다고 말했다. 다른 나라 문화예술을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그 나라 사람들을 못 따라 간다. 바깥에 나가보면 우리것이 더 좋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무용을 가르치는 교수뿐만 아니라 사회지도층이 우리것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김덕명옹은 “무용심사를 가봐도 금방 알 수 있는데, 중앙보다 지방이 더 우리것을 지키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중앙은 무용도 옷을 벗기는 위주로 가고 있다. 중앙부터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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