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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좌. 양녕대군에게 예약된 자리이지만 임자는 따로 있었다.
왕좌.양녕대군에게 예약된 자리이지만 임자는 따로 있었다. ⓒ 이정근

개성 유휴사에 피방한 임금을 시종한 영의정 유정현과 좌의정 박은이 한양으로 돌아가는 날. 천수사(天水寺) 서쪽 산등성이까지 거둥한 태종이 내구마(馬)를 각각 1필씩을 내려주며 당부했다.

"경들은 이 말을 타고 양경(兩京)을 왕래하며 국사를 살피라."

조선의 도읍지는 한양이다. 그런데 임금은 개성에 있다. 언제 돌아갈지 기약이 없다. 갑자기 수도가 2군데가 된 셈이었다. 번거롭더라도 개성과 한양을 오가며 국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는 명이다.

"성상의 덕이 이와 같으시니 만약 이 말을 타고 한 번이라도 불의를 행한다면 마땅히 재앙이 자손에게까지 미칠 것입니다."

유정현과 박은이 황공한 모습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

"지난번 간신 구종수 사건이 발각되던 날, 나는 조종(祖宗)의 적루(積累)한 간난(艱難)을 생각하고 황희를 불러 구종수의 죄악과 세자의 실덕을 모조리 말하였는데 황희가 대답하기를 '구종수의 한 짓은 매(鷹)와 개(犬)의 일에 지나지 않고 세자의 실덕은 나이가 어린 때문입니다'하고 두 번씩이나 말하였는데 조금도 다른 말은 없었다.

이제 김한로가 세자의 장인으로서 사직(社稷)의 대체(大體)를 생각지 아니하고 몰래 간휼(奸譎)한 계책을 꾸며 어리를 도로 바치었으니 이 두 사람의 죄는 마땅히 법대로 처치하여야 한다. 내가 그 일을 차마 드러내지 못하고 세자가 스스로 새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니 두 경(卿)은 마땅히 누설하지 말도록 하라.

만약 세자가 끝내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가 자취(自取)하는 것이니 그 종말이 어찌 되겠는가? 좌의정은 나보다 나이가 적으나 영의정은 나이가 나보다 많다. 그러나 죽고 사는 것은 늙고 젊음에 관계없으니 두 경은 마땅히 그리 알라." - <태종실록>

누설한 자는 죽음을 각오하라는 엄중한 경고다. 자신이 꺼내어 전광석화처럼 몰아가기 전에는 절대로 누설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자신은 지신사와 좌의정 그리고 영의정에게 말을 퍼뜨리면서 누설하지 말라니 이상하다.

"김한로와 황희의 죄는 숨길 수 없으니 밝게 바로잡아서 후래(後來)를 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좌의정 박은이 주억거렸다. 명재상 황희에게 불똥이 튀었다.

개성에 있는 부왕을 찾아가 석고대죄 한 세자 양녕대군

영의정과 좌의정이 한양으로 돌아간 다음 날. 한양에서 전갈이 왔다. 도성을 지키고 있던 세자가 문후를 여쭙고 싶어 개성을 방문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세자를 오랫동안 보지 못하였지만 국정을 비우기 때문에 불러올 수 없었다. 세자가 나의 탄일에 와서 알현하고자 하였으나 그때는 성녕의 백일재(百日齋)를 당하니 무슨 마음으로 조하(朝賀)를 받겠느냐? 다음 달 초하루에 길을 떠나서 초이틀에 이곳에 이르렀다가 단오 뒤에 돌아가도록 하라."

세자의 개성 방문에 윤허가 떨어졌다. 몇 차례 간청 끝에 부왕이 얻어낸 윤허다. 부왕이 어리 문제를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양녕은 한양에 있는 것이 바늘방석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부왕을 찾아뵙고 석고대죄하고 싶었다. 임금은 한양에, 세자전은 개성에 각각 정보망을 가동하고 있었다. 한양을 떠난 세자가 개성에 당도하여 부왕을 알현했다.

"어리를 다시 불러들인 일이 사실이렷다?"
"……"

세자 양녕은 부왕의 노한 모습을 바라볼 수 없었다. 불같은 질책이 두려웠다. 양녕대군은 아무소리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사실이었느냐고 묻고 있지를 않느냐?"
"네."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눈앞에서 사라져라

세자의 말을 듣는 순간 태종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충격이었다. 믿고 있던 태산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남들이 뭐라 하던 세자의 입에서 '아니오'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세간의 소문이 아무리 돌아도 맏아들 양녕의 입에서 ‘아니오’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허나 현실은 '예'였다.

"어리가 아이를 낳은 것도 사실이냐?"
"네, 아바마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세자 양녕은 사실대로 토설할 수밖에 없었다.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가지고 추궁하는 부왕의 추상같은 질책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석고대죄(席藁待罪)가 상책이다.

"세자는 구전에 나가 거처할 것이며 다시는 알현하지 말라."

쓰러질 것 같은 현기증을 가까스로 수습하며 태종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세자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경덕궁에도 있지를 말라는 것이다. 세자가 무거운 발 검음으로 물러나 수창궁으로 향했다. 지켜보던 대간과 반열(班列)의 제경(諸卿)이 차례로 나가고 좌의정 박은이 나가려 하자 불러 세웠다.

"너희 대언(代言)들은 모두 나가라. 내가 좌의정과 차후의 일을 의논하고자 한다."
박은과 깊은 얘기를 나눈 태종이 좌의정을 내보내고 좌대언(左代言) 이명덕을 불렀다.

"지난번에 세자가 곽선의 첩 어리를 빼앗아 궁중에 들이었으나 내가 즉시 쫓아 버렸다. 이제 들으니 숙빈의 어미가 숙빈을 볼 때 어리를 몰래 데리고 들어가 아이를 가지게 하였다. 또 세자전에 들어간 어리가 임신하자 바깥으로 나와서 아이를 낳게 하고 도로 세자전으로 들이었다.

김한로가 나에게 충성하고 사직(社稷)을 위하는 계책인가? 아니면 세자를 사랑하여 하는 것인가?  또한 세자가 성녕이 죽었을 때 궁중에서 활쏘기 놀이를 하였다니 동모제(同母弟)의 죽음을 당하여 부모가 애통하는 때에 하는 짓이 이와 같다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태종은 분노했다. 양녕대군은 차세대를 이어갈 세자다. 양녕은 임금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김한로의 사위이기도 했다. 양녕이 등극하면 국구(國舅)가 될 사람이 김한로다. 김한로는 과거의 동방이며 친구다. 이러한 사람이 양녕의 불의를 방조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드러난 것은 김한로의 마각이었다. 깊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형제애가 결핍된 세자에게 희망을 걸어야 하나?

태종 이방원이 세자 양녕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아주 소박했다. 자신이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을 채워줄 수 있는 세자이기를 바랐다. 인간은 자신이 부족한 것을 갈구한다. 목마른 자는 물을 찾고 굶주린 사람은 먹을 것을 찾으며 재물이 있는 자는 권력을 찾는다. 인간의 본능이다.

무장 이성계의 아들로 태어난 이방원은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성장했다. 비록 7등으로 턱걸이 했지만 과거에도 급제했고 청운의 꿈을 안고 조정에 출사도 했다. 세계의 중심 명나라를 방문하여 황제를 알현했고 비록 위(位)는 다르지만 현재 대륙을 호령하는 영락제보다 먼저 등극도 해봤다.

이러한 태종에게 가슴 깊은 목마름으로 다가오는 것이 형제애였다. 맏형 이방우는 환란 속에 먼저 세상을 떠났고 방간 형과는 서로의 가슴에 칼끝을 겨누다 자신이 귀양 보냈다. 비록 상왕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지만 방과 형은 자신이 흔들어서 왕위에서 내려오게 했다. 이복동생 방석과는 골육상쟁을 벌였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변명하고 싶지만 후대의 사가들이 권력에 눈이 먼 위인이었다고 기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고 형제간에 우애할 수 있는 군주이기를 기대했다. 이러한 기대를 걸고 있는 양녕이 자신의 동생 성녕이 죽었을 때 활쏘기 놀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성군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형제애가 결핍된 양녕에게 희망을 거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유난히 형제애가 돈독한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대왕)의 형제애가 마음에 끌렸다.


#양녕대군#어리#김한로#황희#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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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 <병자호란>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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