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부터 자르는 것이 병법의 기본이니 함곡이 이 모든 계획을 세우고 진행해 왔음이 밝혀진 이상 함곡부터 처리함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임은 당연한 생각.
사르, 사르, 슈우우
허나 흑백쌍용이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함곡의 뒤쪽에서 여섯 개의 조그만 물체가 기이한 각도로 호선을 그으며 흑백쌍용을 향해 쏘아졌다. 그것은 매우 빠른 속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냥 보기에는 너울너울 나비(胡蝶)가 나는 것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매우 어리둥절한 느낌을 갖게 했다.
“혈접표(血蝶標)로군….”
천과의 입에서 나직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혈접표는 중원사괴 중 홍일점인 혈녹접 소유향의 독문암기. 과장되었는지는 모르나 ‘핏빛 나비가 너울거리면 언제 죽는지도 모르고 죽게 된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치명적인 암기로 알려졌다.
더구나 소유향은 혈접표를 사용했다 하면 반드시 상대를 죽였기 때문에 혈접표를 정확히 본 사람이 없다고 알려져 있음에도 한눈에 알아본 천과의 안목은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새삼스레 좌중이 안력을 돋우어 신중하게 혈접표를 살피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슈우, 팔랑.
여섯 개의 혈접표는 날아가면서 세 개씩 방향을 바꾸어 흑백쌍용에게 각각 쏘아갔는데 흑백쌍용 역시 혈접표가 예사로운 암기가 아니라는 소문은 들었던지라 긴장된 기색을 떠올렸다. 허나 그렇다 해도 그들이 함곡을 채가는 동작은 늦춰지지 않았다.
마치 매가 비둘기를 채가듯 흑룡은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혈접표를 피함과 동시에 함곡의 목덜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함곡의 목덜미를 움켜쥘 것만 같았다. 허나 호선을 그으며 지나갔던 협접표는 괴이하게도 방향을 틀어 오히려 날아온 것보다 더 무서운 속도로 되돌아오며 흑룡과 백룡을 덮쳐갔다.
“으음….”
백룡은 급히 자신의 병기인 쌍첨검(雙尖劍)을 뽑아들어 자신을 노리는 혈접표는 물론 흑룡을 노리는 것까지 쳐내려 했다. 백룡의 검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쾌속했고, 힘이 있었다. 쾌(快)에 중(重)을 겸비하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었지만 그것으로 미루어보아 상승검도의 경지에 오른 것으로 보였다.
파파파팍!
백룡의 쌍첨검은 여섯 개의 혈접표를 완벽하게 쳐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검이 혈접표를 맞추기도 전에 실려 있는 검기(劍氣)로 인해 혈접표가 몇 조각으로 부서지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헛!”
허나 그 순간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왔는지 모르지만 몇 마디의 다급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백룡의 검기에 의해 부셔져 나간 것처럼 생각되었던 혈접표의 조각들이 오히려 맹렬하게 백룡과 흑룡을 덮쳤기 때문이었다.
한편 흑룡은 혈접표를 무시하고, 아니 백룡이 그 정도는 충분히 처리해 줄 것이라 믿었는지 기세를 늦추지 않고 함곡을 낚아채려 했는데 이상한 것은 무공을 모른다던 함곡의 움직임이었다. 본능적으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듯하다가 자신의 목덜미를 잡아채려 하는 흑룡의 손을 피해 발은 지면에 붙인 채 상체를 활처럼 뒤로 꺾는 것이 아닌가? 상체가 뒤로 젖히며 거의 지면과 수평이 될 정도였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몸의 중심이 뒤로 쏠려있으므로 뒤로 나자빠져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흑룡의 손이 허공을 스치자 주춤거리며 넘어지지 않으려는 듯 불안정하게 뒷걸음질을 치다 결국 나자빠졌다.
“어! 으음.”
허나 보기 흉하게 나자빠지면서 탄성을 나직하게 발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함곡은 흑룡의 매서운 공격에서 벗어났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장내에서 벗어나는 의외의 성과를 거두었다.
흑룡 역시 함곡이 그렇게 쉽게 자신의 손을 피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지라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황급히 함곡을 다시 채가려다가 자신의 등 뒤로 우박처럼 쏟아지는 혈접표의 파편으로 인해 급히 몸을 비틀며 좌측으로 미끄러졌다.
동시에 함곡도 무심코 몸을 일으키다가 재차 주춤거리며 뒤로 넘어질 듯 발을 지면에 끌면서 몇 걸음 물러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함곡의 움직임이 참으로 이상했다.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함곡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함곡의 얼굴에도 매우 당황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파파파팍.
백룡은 더 이상 혈접표의 조각들을 쳐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다. 혈접표의 조각을 쳐내도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각도로 쏘아왔기 때문이었다.
혈접표의 무서운 점이 바로 이것이었다. 단지 피하고자 하면 피할 수 있는 것이지만 무림인들은 본능적으로 날아오는 암기를 쳐내려 하는 습성이 있었고, 혈접표는 계속 분리가 되면서 가루가 될 때까지 상대를 노리는 무서운 암기였다.
조각난 혈접표가 지면에 박혀 들었다. 만약에 함곡이 제 자리에 있었다면 최소 서너 개 정도의 혈접표의 파편이 몸을 파고들었을 터였다. 이상하고 거북한 움직임이었지만 뒤로 물러났기 때문에 안전할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으음.”
흑룡이 나직한 신음과 함께 허벅지에서 혈접표의 조각을 빼내며 안색을 굳혔다. 우박처럼 쏟아지는 혈접표의 조각들을 미처 다 피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더구나 함곡을 잡으려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더욱 화가 치미는 것처럼 보였다.
허나 그와 동시에 이미 혈접표의 조각들을 피한 백룡이 함곡 쪽으로 빠르게 다가와 함곡의 주요 혈도를 노리며 찌르려 했다. 백룡의 목적 역시 함곡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생포하려는 것. 검 끝으로 함곡의 혈도를 제압하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흑룡 역시 약간의 차이를 두고 함곡 쪽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안 되지.”
나직한 음성과 함께 함곡 뒤에서 두 개의 인영이 불쑥 나타나 흑백쌍용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로 중원사괴 중 둘째와 셋째인 생사판(生死判) 종문천(鍾門天)과 철금강(鐵金剛) 반효(班哮)였다.
슈슈슉.
반효가 맹렬한 권풍(拳風)을 일으키며 흑룡의 전신을 부셔놓을 듯 권을 뻗었다. 흑룡은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공격하는 반효를 보며 잠시 주춤했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함곡을 채가는 동작을 멈추고는 몸을 옆으로 뉘이며 권풍을 흘려버리는 것과 동시에 양발로 반효의 허리를 노리고 무섭게 차갔다.
반효는 보기와 달리 순간적으로 빠른 몸놀림을 보였다. 다리를 약간 꺾으며 흑룡의 다리 공격을 막으며 한순간 몇 번의 권을 내뻗었다. 흑룡의 허벅지와 무릎을 노리는가 싶더니 아랫배, 그리고 뒤로 물러나며 몸을 비스듬히 세우는 흑룡의 가슴까지 노리는 수법이었다.
“괴물들이라고 하더니 역시 한 수 하는 놈이군.”
말은 같잖지 않은 놈이라고 치부하는 듯 했으나 흑룡은 몸놀림을 신중히 하며 함부로 공격하지 않았다. 휙휙 스치는 반효의 권풍에 적잖게 놀랐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