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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골암 가는 길에 만나는 천연 기념물 207호 망개나무 서식지.
 탈골암 가는 길에 만나는 천연 기념물 207호 망개나무 서식지.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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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골암으로 가는 길은 속리산 주 등산로에서 벗어나 있다. 세조가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나았다는 목욕소 가기 직전 삼거리를 지키는 이정표는 왼쪽으로 난 길을 타고 0.9km가량 올라가야 탈골암이 나온다고 설명한다.

법주사의 산내 암자인 탈골암은  비구니 스님들의 도량이다. 탈골암(脫骨庵)이란 이름은 암자 이름치고는 상당히 엽기적이다. 내가 처음 탈골암이란 이름에서 맨 먼저 떠올린 것은 접골원의 이미지였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내 몸의 어딘가에서 겉도는 뼈마디를 맞추려고 가는 중인가?

닦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길이 몹시 깔끔하다. 조금 걸어 들어가자 계곡이 나온다. 계곡 옆에는 천연기념물 제207호 망개나무 특별보호구역이라 쓰인 안내판이 보인다.

갈매나무과에 속하는 망개나무는 넓은 잎을 가진 낙엽관목이다. 잎 표면이 아주 진한 초록색이다. 6월에 연노랑 꽃이 피고 가을에 노란빛을 머금은 팥알만한 열매가 달려 점차 암적색으로 익어간다. 특별보호구역 안내판 바로 위에서 자라는 망개나무는 키 13.6m, 가슴 높이에서 잰 지름이 42cm 정도로 나이는 약 100가량 된 나무라고 한다.

혼자 걸어가는 길은 마음이 저절로 호젓해진다. 산자락 위로 흘러가는 구름과 물 소리가 오로지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이름이 엽기적인 암자 탈골암

 탈골암 전경.
 탈골암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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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흘러가는 구름과 물소리에 대한 내 소유권은 오랫동안 보장되지 않는다. 눈앞에 나타난 탈골암이 이미 천여 년 전부터 이곳의 구름과 물소리에 대한 소유권은 내게 있었노라고 못박듯 말하기 때문이다.

누가 창건했는지 모르지만, 탈골암은 서기 720년(신라 성덕왕 19) 창건했으며 서기 776년(혜공왕 12) 진표 율사가 중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면 무시무시한 탈골암이란 절 이름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그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진표 율사가 이곳에 도량을 열고 여러 제자를 깨우쳐 그들을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케 했으므로 그 뒤부터 탈골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야기는 신라 탈해왕 때 알에서 태어난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닭 머리를 한 자신의 외모를 한스러워하던 차에 마침 속리산 한 암자에 좋은 약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와서 그 물을 마시고 난 후 사람의 머리로 바뀌었는데 그 이후부터 탈골암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다.

내가 보기에 두 가지 이야기 중에서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진표 율사 이야기 쪽이 아닌가 싶다. 김알지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왜 탈두암(脫頭庵)이라 하지 않고 탈골암이라 했겠는가.

아무튼 탈골암은 조선시대에 벽암 대사라는 분이 한 차례 더 중건했다고 하는데 6·25 때 불타버린 채 한 동안 빈터로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954년 두기 스님의 원력으로 다시 복원했는데, 본격적으로 불사를 일으킨 것은 1967년 영수 스님이 주석하면서부터라고 한다.

 법당인 약사전과 요사인 연화당.
 법당인 약사전과 요사인 연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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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사전 안.
 약사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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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변의 석탑부재들을 모아 조성해 놓은 3층석탑.
 주변의 석탑부재들을 모아 조성해 놓은 3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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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일으킨 불사였지만, 1993년 2월에 닥친 불의의 화마는 7평밖에 되지 않는 작은 법당을 태워 버리고 말았다. 그 후 1년 9개월 간의 공사를 거친 끝에 현재 탈골암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암자의 중심을 이루는 법당은 약사전이다. 안에는 약사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 지장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은 대개 아미타여래상을 협시하는 보살인데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다는 건 이례적이다. 어쩌면 김알지의 전설을 암자 복원의 원력으로 삼고 싶은 매우 인간적인 배려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게 아닐까.

약사전 앞에는 석탑 1기가 서 있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가량 떨어진 옛 탈골암 터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잠시 바라보고 있노라니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석탑이 안쓰럽다.

대휴선원으로 가고자 요사인 운하당 앞을 지나서 계단을 올라간다. 운하당 위 축대에 놓인 장독대가 무척이나 정갈하다. 

번뇌로 타는 육신의 뼈와 살

 비구니 선객들의 수행처 대휴선원.
 비구니 선객들의 수행처 대휴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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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휴선원 우측에 있는 삼성전.
 대휴선원 우측에 있는 삼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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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휴선원은 1990년에 문을 열었다. 이름은 조계종 총무원장과 법주사 주지를 지내시다 지난 1997년에 입적하신 월산 스님이 지으신 것이다. 대휴선원이 생김으로써 비로소 탈골암(脫骨庵)은 제 이름에 걸맞은 암자가 된 것이다.

'대휴(大休)'란 크게 쉰다는 뜻이다. 선방에 든 선객은 밖으로는 욕망을 쉬고 안으로는 금방이라도 깨침을 얻으려는 조급한 마음을 쉬며 수행에 임하라는 뜻이 아닌가 싶다. 번뇌로 타는 육신의 뼈와 살을 여읜다는 게 어디 호떡 뒤집듯 쉬운 일인가.

해제 철이라 선방은 텅 비어 있다. 이곳에서 하안거에 들었던 선객들은 지금 무엇을 하며 해제 철을 날까.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선 제대로 된 쉼이 필요하리라. 이른바 속세 사람들이 말하는 '충전'을 하면서 곧 다가올 결제 철을 기다릴 것이다.

1977년에 지은 삼성전은 탈골암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안에는 칠성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주차장 옆 각종 공덕비들. 전기가설공덕비→중창불사공덕비→선원 불사공덕비→진입로개설공덕비 순이다.
 주차장 옆 각종 공덕비들. 전기가설공덕비→중창불사공덕비→선원 불사공덕비→진입로개설공덕비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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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골암을 나서는 길에 주차장 옆에 있는 각종 공덕비들을 돌아본다. 전기가설 공덕비, 중창 불사 공덕비, 선원 불사 공덕비, 진입로개설 불사 공덕비 등이다. 비 가운데 가장 키가 큰 중창 불사 공덕비에는 이 암자의 유래와 각종 불사의 내력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러나 중창 불사 공덕비는 조그만 오류를 범하고 있다. 비문에는 "또한 신라 성덕왕 15년(720)에 창건되어 혜공왕 12년(776) 진표 율사께서 중건하시고"라고 돼 있는데 서기 720년은 성덕왕 19년이 옳기 때문이다.

느티나무 내부는 얼마나 치열했을까

 몇 백년 묵은 느티나무의 새 순.
 몇 백년 묵은 느티나무의 새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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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아까 올라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간다. 계곡 가에서 몇 백 년은 됐음직한 느티나무 고목을 만난다.  대책 없이 세월을 먹어치운 탓인지 밑동이 아주 울퉁불퉁하다. 그 속을 뚫고 올라온 새 순이 앙증맞고 사랑스럽다. 이 느티나무는 묵은 뼈를 벗어버리고 이렇게 새 뼈로 갈아입었나 보다.

뼈를 벗어버린다는 것, 즉 환골탈태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뼈를 벗어버리겠다고 덤비는 것 자체가 보통 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해탈한다는 것은 치열함 없이는 결코 뚫을 수 없는 은산철벽이다. 저렇게 새순을 올리기까지 느티나무 내부는 얼마나 치열했을 것인가.

그런데 난 이 탈골암이란 '접골원'에서 어긋난 영혼의 뼈를 조그만큼이라도 맞추고 나왔는가. 적어도 탈골암에 오기 전보다는 세상을 향해 좀 더 확실한 직립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는가. 다람쥐 한 마리가 입에다 상수리나무 도토리를 물고서 쪼르르 내 앞을 지나간다.

저 다람쥐는 뼈를 벗는 일 못지않게 사소한 일상도 중요하다는 걸 설하는 것인가.  에라,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은 그저 흘러가는 구름과 물소리에 대한 소유권이나 제대로 누리고 싶을 뿐인 것을.


#법주사 #탈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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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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