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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채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아(我)와 피아(彼我)의 끝없는 투쟁"이라 했다. 역사는 단재 선생 말처럼 투쟁일까?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사이에 이루어지는 역사라면 아와 피아의 끝없는 투쟁이다. 하지만 모든 역사가 투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사람'이 만들어가는 삶의 현장이다. 거대한 역사만이 역사가 아니라 이름없는 인민의 역사도 역사다.

2500년 동안 역사의 승자들이 자신들의 '관점'과 '해석'에 따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인민들이 직접 목격한 사실들을 기록한 '역사'를 만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존 캐리가 엮은 <역사의 원전>은 인민-구경꾼, 여행가, 전사, 살인자, 희생자, 직업기자-들이 직접 눈으로 봤던 것들을 생동감, 빠른 필치로 생생하게 담았다. 역사는 '객관성'을 중요시하지만 이들의 기록은 '주관적'이다. 오히려 이런 인민의 주관적 느낌을 생동감있게 기록한 것이 이 책이 주는 역사를 객관적인 역사로만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감동을 준다.

2500년 동안 인민들의 눈앞에서 일어났던 역사다. 몇 가지만 예를 든다면 투기디데스의 '아테네 역병', 플리니우스의 '베수비우스 화산폭발', 이븐 파들란이 '바이킹 족의 장례', 존 샌드슨의 '카이로의 런던 상인', 로보트 윙크필드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의 처형', 우틀리 먼테이큐의 '터키의 목욕탕', 엘리스 중위의 '트라팔가', 윌트 휘트먼의 '링컨 대통령 암살', '베트남 전쟁', '한국전쟁' 따위다.

그들은 중요한 사건만 기록하지 않았다. 인민이 자신의 눈 앞에서 이룬 사건을 관찰과 서술로서 잘 표현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중요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의 원전>에 기록된 글들이 중요한 사건이 있다.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처형', '링컨 암살', '타이타닉호 침몰' 등은 매우 중요한 역사다. 하지만 조 애컬리가 쓴 일기 중 어느 날 오후 토끼를 잡으러 간 이야기 같은 경우는 시시한 것같지만 한 사내아이가 살해 행위에 길들여지는 과정은 매우 중요한 역사 현장이다. 이는 <역사의 원전>에 기록된 수많은 학살과 잔혹한 역사의 투영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가 기록한 '서인도제도에서 스페인인의 만행'을 보면 알 수 있다.

"말을 탄 스페인인들은 길고 짧은 창을 들고 살인과 기괴한 잔혹행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에 뛰어든 그들은 어린이도 노인도, 심지어 애를 밴 여자와 그 뱃속의 태아도 남겨두지 않았다. 마치 우리 안에 가둔 양떼를 잡듯이 배를 가르고 토막을 냈다. 한 칼에 얼마나 통쾌하게 배를 가르느냐, 얼마나 멋있게 목을 자르느냐, 얼마나 똑바르게 창을 꽂느냐를 놓고 서로 내기를 걸기도 했다"(본문 151쪽)

한 사내아이가 토끼를 살해하는 장면을 연상하면서 카사스의 기록을 보면 인간이 어떻게 살해를 넘어 잔혹한 학살의 길을 갈 수 있는지 유추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살해자가 이런 과정을 걷는 것은 아니다. 학살과 잔혹함은 이런 작은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인민이 자신들이 목격한 그 기록들을 모은 것을 보면 역사가 되고, 그 역사는 동질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서인도 제도에서 스페인의 만행'을 통하여 우리는 '엘우드 하비의 '버지니아에서 본 노예 매매'와 새뮤얼 호우의 '뉴올리언스, 여성 노예의 처벌'을 연상할 수 있다.

"소년의 색깔에 관한 야비한 농담 몇 마디가 나온 후 누가 200달러를 불렀다, 그러자 사람들 속에서 저렇게 보기 좋은 젊은 검둥이는 더 높은 값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저런 놈은 줘도 안 가지겠다고 했다."(본문 443쪽)

"여자 아이 옆 6피트 떨어진 곳에 덩치 큰 흑인 하나가 채찍을 들고 서 있었는데, 그의 채찍질은 강력하고도 기막히게 정확했다. 한 차례 내리칠 때마다 맞은 자리의 피부가 길게 떨어져 나와 채찍에 들러붙거나 호늘거리며 포석 위에 떨어졌고, 그 뒤로 피가 튀어나왔다. 아이의 살아 있는 몸뚱이에는 줄이 계속해서 패여 피 흘리며 꿈틀대는 검푸른 근육덩어리로 변해가고 있었다."(본문 446쪽)

서인도 제도와 노예 매매, 처형은 관찰자가 사실을 기록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했음을 알게 된다. 지배자와 승자, 백인들이 그들의 눈으로 본 역사가 아니다. 같은 현장에 있었지만 승자와 지배자는 그들의 시각에서 현장을 해석한 역사를 기록했고, 이들은 현장을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역사의 원전>이 우리에게 읽혀져야 하는 이유다. 여기에는 이런 참혹한 역사만 아니라 별난 이야기, 천박한 이야기, 하찮은 이야기까지 담았다. 과연 이것이 역사에 기록될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심할 것들도 많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드레스 앞자락 속으로 가슴의 주름살을 눈여겨보는 외국 대사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음탕한 마음, 아니면 그냥 무심코 보였을까?  콧구멍이 쌍발식 엽총 총구처럼 생긴 조 루이스는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콧구멍을 쌍발식 엽총 총구로 생각했는데 그 당시 쌍발식 엽총이 없었다면 옛날 돌도끼 생활을 했던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조 루이스의 콧구멍이 어떻게 생겼다고 생각했을까?

처형 날 아침 얇디 얇은 비단 스타킹을 신고 있는 마타 하리는 왜 그랬을까? 풀만 먹어서 입이 파래진 아일랜드 사람들의 굶주림은 우리나라가 겪은 보릿고개를 연상케 한다. 시대와 살았던 삶의 공간은 달랐지만 그들이 겨험한 역사 현장은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역사와 현장이다. 생소한 느낌을 받지 않는다. 이런 느낌과 생각은 어쩌면 역사는 진보보다는 반복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중요한 열쇠인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역사의 원전> 존 캐리 엮음 ㅣ 김기협 옮김 ㅣ 바다출판사



역사의 원전 - 역사의 목격자들이 직접 쓴 2,500년 현장의 기록들

존 캐리 엮음, 김기협 옮김, 바다출판사(2014)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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