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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흑인들은 백인들에 비해 지능이 떨어진다. 이 때문에 나는 아프리카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이다."

 

"우리(미국)의 모든 사회 정책은 흑인들의 지능이 백인들과 똑같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지만 모든 연구 결과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최근 영국에서 인종차별 논란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발언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식 밖의 발언을 한 주인공이, 1962년에 DNA 이중나선구조를 밝혀낸 공로로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미국의 저명한 과학자 제임스 왓슨(James Watson) 박사라는 사실이 더 놀랍다. 최근 영국 방문을 앞두고서 영국 <선데이 타임즈>와 나눈 인터뷰에서 그는 이러한 견해를 밝혔다는 것이다.

 

지난 14일 이러한 그의 인종차별적인 발언이 보도되자마자 영국 과학계 및 인종차별반대 단체들은 강도 높게 비난하고 나섰으며, 언론도 그에게 연일 집중포화를 퍼붓고 있다. 이처럼 왓슨 박사의 발언이 큰 물의를 일으키자, 런던과학박물관 측은 표가 매진되었지만 오늘(19일) 예정된 그의 강연을 취소했다고 한다. 이것은 저명한 과학자인 그로서는 대단한 수모이겠지만 그의 발언을 접하고 흑인들이 마음에 품었을 모욕감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과학의 역사에 길이 남을 대단한 업적을 이룬 저명한 과학자가 어떻게 이토록 비과학적이고 근거 없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있었을까?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왓슨 박사의 이러한 발언에 대해서 이성적으로는 비난하면서도 심정적으로는 동조할지도 모르겠다. 나만 보더라도, 흑인들은 괜히 꺼리게 되고 조금 깔보는 듯한 태도를 은연중에 품고 있지 않은가!

 

슬픈 일이지만 우리의 인종차별적인 편견은 평생을 두고 연구해 온 과학자조차도 끊어낼 수 없을 정도로 뿌리가 깊은 것이다. 다른 인종들에 대해서 우리가 품고 있는 인종차별적인 우월감이나 반감, 더 나아가서 괜한 증오심까지도 일종의 자연스러운 본능의 표출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인간의 마음 속에는 원래 인종차별적인 본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인종차별이라는 문화적 현상을 단지 생물학적 또는 심리학적 요인으로만 설명하려는 잘못된 시도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흑인을 싫어하는 것은 그의 피부가 (나와는 달리) 무척 검기 때문이야" 또는 "나는 원래 흑인을 싫어하는 성격이어서 그래"라고 설명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동어반복이지 올바른 대답이 아니다. 이것은 개인적 신념의 표출이지 과학적 사실의 표명은 아니다.

 

2.

 

미국의 저명한 인류학자 레슬리 화이트가 그의 역저 <문화과학: 인간과 문명의 연구>에서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즉, 인간의 특정한 행동이 문화권마다 달리 나타나는 문화 현상과 시∙공간적으로 다양한 편차를 보이면서 진화하는 문화 변동은, 개별적인 인간이나 개별 인간들의 집단인 사회가 아니라 그 문화권을 구성하고 있는 제반 문화 요소들의 상호 작용을 연구대상으로 삼을 때, 비로소 올바로 해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문화를 다루는 학문은 '문화학(culturology)'이라는 별도의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의 일이었는데, 예전부터 써오던 '인류학(anthropology)'이라는 용어가 아직도 더 많이 쓰이고 있으며, 기껏 양보한 것이 '문화인류학'이다. 비록 '문화'가 학문의 지평선 위로 나타나게 된 것이 인류학의 덕분이기는 해도, 아직도 인류학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토록 끈질기게 '문화학'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인가? 이 책에 피력되어 있는 화이트의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뿌리 깊은 인간중심주의와 자유의지 철학이다.

 

우리 인간들에게는 우리 자신들뿐만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과 우주 등 외부 세계의 해석에 있어서도 우리 자신을 그 중심에 놓고 그 대상들에게 인간적인 면모들을 투사하여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인간중심주의적 경향은 자연과학의 세계에서 물활론이나 의인론 등의 형태로 오랫동안 전해 내려왔다. 그러니 인간이라는 종의 고유한 발명인 '문화'를 다루고 있는 학문에 있어서는 오죽했으랴!

 

실제로 문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실제로 표현되는 개인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화이트의 '문화결정론'을 가장 강하게 비판한 사람들은 루쓰 베네딕트나 에드워드 사피어 같은 당대의 저명한 인류학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은, 화이트의 입장이 인간을 문화의 수인(囚人)으로 간주함으로써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의 문화적 자극 또는 문화적 힘에 주목하려는 '방법론적 결정론'이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반복해서 시도했던 것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며, 열역학적, 생물학적 체계인 인간을, 문화의 운반자이고, 문화요소들 간의 종합이 일어나는 장소(뉴턴, 제임스 와트, 다윈)이며, 문화 과정의 촉매자로서의 인간으로부터 구분짓는 일이었다. 이 두 가지의 인간은 서로 아주 다르다; 그 둘은 각각의 분야(맥락)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문화적인 매트릭스와 관련해서, 인간은 하나의 꼭두각시이다; 그는 자신의 문화가 그에게 요구하는 바대로 행동하고, 느끼며, 믿는다. (제2판 서문에서)

 

비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꿈을 꾸는 것은 개인이지만 그 꿈을 이루는 내용을 제공하는 것은 문화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는 분명 위대한 개인들(위인이나 천재)에 의해서 새롭게 발명 또는 발견되어 진화하는 것이긴 해도 그것이 그러한 개인들의 특출한 재능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새로운 발명 또는 발견을 가능하게 해주는 문화적 제반 요건의 성숙이 보다 근본적이다. 그래서 화이트는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의 위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예외적인 타고난 재능 이상의 것들이 필요하다; 즉 문화적인 힘과 역사적인 상황들의 어떤 연결이 또한 필요하다. 연극, 무대 그리고 관객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위대한 배우가 될 수 없다. 이와는 반대로 평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우연과 상황이 어떤 극히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초점에 그를 놓게 된다면 위인이 될지도 모른다. 문화 발전의 과정에서 위인은, 그것을 통해서 문화 요소들의 중요한 종합이 이루어지는 신경 중추의 수단일 뿐이다. 다윈, 뉴턴, 베토벤 그리고 에디슨은 이런 형태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중요한 문화적 사건들이 일어난 신경학상의 장소이다. 확실이 그들은 우수한 유기체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마치 돼지같이 키워졌다면, 위대함이 그들을 발견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356쪽, 제9장 이크나톤: 위인 대 문화 과정)

 

위인과 문화와의 상관 관계를 꼼꼼하게 분석해 놓은 이 부분은, 10여 년에 걸쳐 발표한 여러 편의 논문들을 하나로 묶어 낸 책이기에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고 또한 본문의 분량도 500쪽이 넘는 두툼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히는 대목이다. 이외에도 노예제, 전쟁 등과 같은 사회 현상과 근친상간 금기라는 심리학의 고전적인 주제를 사회적 관계나 심리적 요인이 아니라 문화적 요소에 의해서 해석해 놓은 부분들도 재미있게 읽힌다.

 

화이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한 개인의 가장 내밀한 자아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양심조차도 그 기원은 문화에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른다면, 인간은 그릇이며 거기에 담길 내용물을 제공하는 것은 문화가 된다. 인간은 결국 문화에 의해서 결정되는 존재라는 이러한 화이트의 주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인간의 자유 의지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운명론’이자 ‘패배주의’로 받아들여졌다. 이것이 반 세기도 전에 그가 주장한 ‘문화학’이 아직도 과학계에서 그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는 이유의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문화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이 단지 피동적인 존재이고, 문화에 의해서 조종되기만 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뜻은 아니다. 생물학적인 면에서 거의 차이가 없는 인간이 각 문화권마다 제각기 독특한 행동 양식과 사고 체계와 삶의 방식을 가지게 된 것은 바로 문화의 힘이라는 점을 그는 말하고자 한 것이다.

 

3.

 

사실, 오늘날 우리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변화, 생태계 파괴, 극심한 빈부격차, 끊이지 않는 내전과 전쟁 등 현안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전 세계에 걸쳐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문화들을 꼼꼼하게 다시 들여다봄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문화학은 전도가 아주 유망한 미래학문이다. 레슬리 화이트가 약 60년 전에 이 책 <문화과학: 인간과 문명의 연구>에서 ‘문화학’을 주창하며 표명했던 희망은 아직도 유효하다.

 

문화학은 과학의 가장 새로운 모험이다. 천문학, 물리학, 화학의 영역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연구 끝에, 생리학과 심리학의 분야에서는 수십 년에 걸친 연구 끝에, 과학은 결국 인간 행위의 가장 즉각적이고 강력한 결정자인 인간의 문화에 주목하게 되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문화는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해석은 과학의 옷을 입은 단순한 의인론일 뿐이다. 문화의 설명은 문화학적이고 또한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문화과학은 젊기도 하지만 전도가 아주 유망하다. 그 연구 주제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경로, 즉 발전과 진보를 계속한다면, 문화과학은 큰 일들을 해낼 것이 틀림없다. (497-498쪽, 제13장 에너지와 문화의 진화)

덧붙이는 글 | 문화과학 : 인간과 문명의 연구
(The Science of Culture : A Study of Man and Civilization)

ㅇ 레슬리 화이트(Leslie A. White) 지음
ㅇ 이문웅 옮김
ㅇ 아카넷 펴냄
ㅇ 2002년 3월 10일 1판 1쇄
ㅇ 값 2만 5천원


#문화과학#레슬리 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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