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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9월 30일. 일요일.

이날을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스스로 세상학교'가 첫 신입생과 함께 첫날을 맞게 된 날로 기억한다.

학생이 하나뿐인 학교가 일본에 하나 있다는 이야기를 '대안교육연대'에서 일하시는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적은 있지만 그 학교가 '스스로 세상학교'와 다른 측면에서도 같은 점이 많이 있는지는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는 학생 수가 한 명인 학교는 '스스로 세상학교'뿐이지 않을까 싶다.

첫 학생이자 유일한 학생인 '스스로 세상학교'의 강종진(가명) 학생은 오전에는 밤을 줍고 오후에는 장계읍내로 놀러 나갔다 왔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라, 잘했다 등의 말들을 나는 안 한다. 재미있고 즐거운 것이 학교생활의 기본이지 뭘 배우는 것이 기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하나씩 깨우쳐 가는 것을 빙그레 바라보는 것이 그때 그때 수정해 주는 것보다 몇 배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종진이가 이날 처음 해 보는 일들은 다음과 같았다.

밤을 까서 비늘을 벗기는 것. 밤 비늘을 벗기려면 칼을 쥐고 득득 긁어야 하는데 나뭇가지 다듬듯이 밤을 삐치는 것이었다. 칼을 눕히지 않고 수직으로 세워서 비늘을 벗기고 있는 나를 유심히 보면서 따라 해 보지만 자꾸 칼이 밤을 베어 버렸다. 손가락이 위험하다. 종진이의 칼끝이 겨누는 곳들도 종잡을 수 없다.

콩죽 먹는 것. 내가 농사지은 메주콩을 물에 불려 두었다가 갈아서 콩죽을 끓였다. 어머님이 갑자기 콩죽 고소한 맛이 생각난다고 해서였다. 종진이는 콩죽을 태어나서 처음 먹어 본다고 했다. 맛있다고 했다. 아쉽게도 장계읍내 나갔다가 돈가스를 사 먹고 와서 많이는 못 먹었다.

종진이가 콩죽만 처음 먹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먹고 싶다는 것을 자식이 냉큼 마련해 드리는 것도 처음 보는 것임을 알아챘으면 좋겠다. 종진이가 원하는 것을 다 해 주는 어머니만 보아 왔을 테니.

아궁이에 불 때는 것. 차례차례 불이 붙어가는 순서를 잘 살펴 보게 하였다. 원리를 설명했다. 공기가 잘 통하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만 가지고 안 되고 불쏘시개를 사용하는 법과 불길을 키워 가는 방법들을 알려 주었다. 불의 역사와 화식(火植)을 하게 된 후의 인체변화도 얘기했다. 당연히 생채식 건강법도 이야기했다. 내일 종진이가 직접 불을 때 보기로 했다.

마당 우물가에서 하는 샤워. 가마솥에 데운 물을 퍼 날라서 우물가에서 샤워를 했다. 욕실에서 샤워기 아래서만 샤워를 해 온 그는 내 말을 듣고 아주 아주 난감해 했다.

나는 노천온천이려니 생각하라고 했다. 이렇게 밖에서 샤워하면 누가 안 보냐고 걱정했다. 누가 보는지 안 보는지는 내가 그를 발견하지 못하면 안 보는 것이라고 했다. 눈을 감고 샤워를 하면 다 해결된다고 했더니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하는 것 같았다.

목욕탕 앉음 의자에 앉아 큰 고무함지박에 물을 담아 두고 세숫대야에 물을 퍼서 바가지로 끼얹는 샤워를 하니 평소보다 물을 1/10 정도밖에 사용하지 않아도 됐다.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물과 수자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였지만 상황이 적절하지 않아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장화 신는 것. 밤 주우러 개울가로 갈 때 슬리퍼를 신고 가려고 해서 장화를 주었다. 장화를 처음 신는다고 했다. 발목까지 물에 잠기는 일이 없었구나 싶었다. 고무장화는 양말을 꼭 신어야 신을 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마찰력의 문제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낫 가는 것. 종진이는 숫돌이 뭔지 몰랐다. 밤 주우러 계곡 밑으로 접근하자면 낫으로 덤불을 헤쳐가야 하는데 낫을 쥐어 본 적이 없었다. 낫을 가는 숫돌을 모르는 것은 당연지사.

종진이가 이날 처음 맞이한 뜻밖의 상황들은 다음과 같았다.

장계 놀러 나가면서 나가는 마을버스를 놓치고 8킬로미터쯤 되는 거리를 1시간 이상 걸어서 갔다. 그런데 논에서 타작하는 모습, 하우스에서 채소 키우는 농부, 어느 할머니가 끌차에 뭘 가득 싣고 힘겹게 시골길을 가는 모습들을 구경하면서 걸어가니 재미있었다고 했다.

돌아오는 버스 막차를 탔는데 잘못 내려서 깜깜한 시골길을 헤맸다. 사람들이 다 내리기에 종점인 줄 알고 자기도 따라 내렸는데 두 정거장 전에 내린 것이다. 나는 종점으로 트럭을 몰고 가 기다리다 빈 버스만 보고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시골길 두 정거장은 두 동네 간격이다. 아주 먼 거리다. 종진이는 대충 방향을 가늠해 가며 걸어서 오다가 어느 마을로 들어가 길을 물었다고 한다. 그 농부 아저씨가 승합차로 우리 집까지 태워줬다(종진이는 며칠 뒤 이 아저씨 집에 놀러 가서 오미자와 오가피 액즙 만드는 일을 구경하며 밥까지 얻어먹고 왔다).

종진이에게 물었다. 당황하거나 겁나지 않았느냐고. 재미있었다고 했다.

그렇다. 세상 모든 역경은 사실 재미있는 것이다. 종진이가 앞으로도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을 맞이해도 누군가를 탓하고 짜증 내기보다 항상 재미있게 생각하기를 기도한다.

이날처럼.

하늘이 '스스로 세상학교'에 허락한 첫날이 너무도 아름다웠고 생동감 넘치는 날이었음을 감사한다.


#스스로세상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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