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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전, 서른두 살에 낳은 첫 아기 쿠하(태명)가 21개월이 되던 날. 우리는 서귀포 바당길 위에 있었다. 탯줄로 연결돼 한 몸으로 걷던 우리가,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하나에서 둘이 된 우리를 사람들은 '모녀 사이'라고 부른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가 드디어 내게도 생긴 것이다.

'짝퉁 시사저널'에서 벗어나 새로 연 <시사IN>의 창간기념 행사(10월 20-21일)에 참가하기 위해 나와 쿠하는 조금 서둘러야 했다. 춘천에서 친정이 있는 서울로 가는 경춘선과 김포공항까지 닿는 지하철 5호선을 제 집 안방처럼 뒹굴며 출발한 쿠하는 제주에서도 자주 드러누웠다.


두 달 전, 여름 휴가로 다녀온 제주에 남편도 없이 아이와 둘이 가겠다니, 그것도 걷기 여행에 참가하겠다고 하니 제일 먼저 친정어머니가 말렸다. 전업주부가 집에서 살림할 생각은 않고, 애도 고생일 게 뻔한 걷기 행사에 뭣 하러 가느냐는 게 가족들의 만류 이유였다. 제주의 바다라면 여름에 실컷 보고 오지 않았냐는 말에 이번에는 돌담길과 오름에 가는 거라고 우겼고, 우리는 비행기 표 한 장 값으로 둘이 타고야 말았다.


바다로 이어진 제주의 돌담 골목길도 걸어보고 싶었지만, 걷기 행사를 마련한 서명숙 선생님도 제주만큼이나 만나고 싶었다. 서 선생님은 산티아고 800킬로미터 도보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고향인 제주에 걷는 길 '올레(제주어)'에 사람들이 찾아와 걸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든 사단법인 제주올레의 이사장이다. 이번 행사를 직접 진행하기 때문에 강의실이나 글이 아닌 길 위에서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하늘이 높고, 뭉게구름이 낮게 드리운 가을날


보폭이 짧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일행을 쫓아가는 일은 상상했던 것보다 벅찼다. 길가의 풀꽃에 마음을 빼앗긴 아이는 도통 일어설 줄을 모르고, 돌담 밭에 자라는 작물을 가리키며 "얘는 누구야?"라고 묻는다. 아이에게 푸른 잎줄기들 밑에 뭐가 숨어 있는지 알려줄 수 없는 초보엄마는 번번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게 감자며, 당근이라는 것을 뒤에 오던 참가자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제주 올레는 풍경 안에 사람이 있어 더 좋은 길이었다. 생전 처음 본 버스 옆자리 청년은 말미 오름 초반부터 비탈길이 나오자 쿠하를 덥석 안고 성큼성큼 나를 앞질러 걸어갔다. 아직은 괜찮다고 손사래를 쳐도 막무가내로 아이를 안아준 김세환씨와 눈만 마주치면 아이를 안아주셨던 <시사IN> 안은주 기자 덕에 체력을 비축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지민과 하승주 어린이는 이틀 내내 쿠하를 친동생처럼 챙겨주고, 놀아주고, 평지에서 유모차를 밀어주는 자매애를 발휘해 나를 도와주었다. 아마 그 아이들이 없었다면, 길에서 보채는 쿠하 때문에 중도에 하차했을지도 모른다.

 

말미 오름에서 알 오름으로 가는 길목. 내리막길에 들어서니 수십 마리의 말떼가 나타난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말떼를 우연히 만나자 괜히 더 반가웠다. 관광지에서 만나는, 목에 줄을 맨 '관광상품'과 달리 제 마음대로 걷고, 제 마음에 드는 풀을 찾아 뜯어먹는 말떼를 보자 올레꾼들은 앞다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아이들은 신기해 하면서도 뒷발에 채일까 무서워 가까이 가기를 겁냈다. 쿠하도 늘 그림책이나 동물원 우리 안에서 보던 말을 풀밭에서 여러 마리를 한꺼번에 보니 무서워했다. 곁으로 다가가 등을 쓸어주자고 해도 몸을 사렸다.


20일 토요일은 바람이 제주답게 심하게 불어 오름에서의 점심은 무산됐다. 그대신 바닷가 종달리 마을 갈대밭을 병풍으로 두고 먹기로 했다. 오래 걷고 먹는 길 위의 도시락은 꿀맛이었다. 차갑게 식은 밥과 미지근한 국이었지만 대여섯 번의 숟가락질로 텅 비워버렸다.

 

바당으로 이어진 종달리 올레


육지 것들이 골목길이라고 부르는 길을 제주어는 '올레'라고 표현한다. 발음도 예쁜 이 길의 이름 말고도 제주어는 바당, 놀멍놀멍처럼 ㅇ 이 군데군데 포진해 있어 부드럽고, 따뜻하고, 가볍고, 밝아서 좋다.

 

바당(바다)으로 이어진 종달리 해안가를 지나 오조리 해안도로를 따라 삼삼오오 걷기 시작했다. 하늘길 말미 오름과 알 오름을 뒤로 두고 성산 앞바다를 향해 걷는 길이었다. 사람들은 바닷가에 처음 온 아이들처럼 조개껍데기며, 소라껍데기를 골라 주웠다. 엎드려 예쁜 돌을 찾는 모습은 동글동글한 돌처럼 군데군데 흩어져 관광객들이 돌아간 철지난 바닷가 풍경을 위로하는 듯했다.


성산 일출을 왼쪽에 두고 너른 바당을 바라볼 수 있는 수마포 해안에서 아픈 역사의 현장이라는 인솔자의 설명은 짧았다. 참가자들의 눈과 귀가 온통 바다로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잘 걷다가도 지루한 길이 나오면 안아달라고 조르는 아이는 오후 두 시가 되자 막무가내였다. 뻐꾸기 시계가 없어도 낮잠을 자는 시간은 잊지 않고 챙겼다. 오조리 해안도로의 가장자리 자전거 도로에서 잠이 든 아이는 그야말로 민폐였다. 버스 옆자리 김세환씨가 한참을 안고 걸었다. 아이가 태어날 때의 무게 3킬로그램 때부터 매일 아기 드는 훈련이 된 21개월차 엄마는 쉽게 안고 다녔지만, 훈련이 안된 청년에게 11킬로그램짜리 아기는 고역이었을 것 같다. 군장을 메고 행군했던 대한민국 청년들이지만 배낭을 앞으로 들고 간 것은 아니었을 터. 그가 나를 대신해 쿠하를 안고 걷는 것이 미안해서 차로 이동하던 진행팀 제주올레 허영선 시인의 차를 얻어 탔다.


차를 탈 때는 말미 오름에서 섭지코지까지 제1코스 17킬로미터를 내 발로 완주하지 못한다는 결과에 집착해 못내 아쉬웠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잘한 선택이었다. 고집을 부렸다면 아마 성산 앞바다에서 나는 쓰러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지루한 해안도로에서 얻어 탄 차 안에서 나는 다리를 쉬게 하고, 쿠하는 쌔근쌔근 콧소리를 내며 푹 낮잠을 잤다. 아이가 두 시간이나 잘 동안, 수마포 해안에서 간세다리(놀면서 쉬어간다는 뜻의 제주어)하는 사람들의 싱싱한 전복과 해안도로에서 말린 오징어를 얻어먹었다. 차도 얻어 타고, 간식도 얻어먹자 내친 김에 염치를 무릅쓰고, <시사IN>의 배은옥님께 맡기고 바닷가를 혼자 걸었다.


아이와 떠난 여행이었지만, 제주의 풍경 앞에서 나는 내 생각을 더 많이 했다. 전업주부로 지내면서 육아에 전념하기로 했지만, 공부도 일도 더 하고 싶어 수시로 아이보다 내 기분 먼저 챙기는 이기적인 엄마의 본성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허영선 시인의 차로 섭지코지까지 가는 길. 아마 아이와 걸으며 따라갔다면 그냥 지나쳤을 쑥부쟁이 천지에서 시인은 차를 세웠다. 길가에 팽개치듯 차를 던져두고 한달음에 얕은 언덕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꽃밭에 누워 사진을 찍고 웃고 즐거워했다. 자는 아이를 안고 있던 내게도 차례는 왔다. 부끄러웠지만 이름도 모르던 쑥부쟁이 꽃들 앞에서 나도 그들처럼 천진하게 웃고 싶었다. 꽃자리 안에서 내가 웃는 모습을 나중에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제1코스의 마지막 대목은 섭지코지. 드라마 <올인>의 배경으로 유명한 이곳을 제주도가 사유지로 매각해서 앞으로는 입장요금을 내지 않으면 관광객이나 지역주민들이 들어올 수 없게 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거대한 리조트를 짓느라 타워 크레인 여러 대가 바다를 뒤로 하고 서 있었다. 일몰을 보기 위해 올라간 섭지코지에서도 제주의 바람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모자가 날아갈 듯 불어대는 바닷바람에 몸이 꽁꽁 굳어버렸다. 시월에 손이 차가워 사람들과 같이 먹는 오뎅 국물이 유난히 따뜻하고 맛있었다.


렌터카로 다니는 제주는 빠르게 이동하면서 송악산 이중분화구부터 비자림과 만장굴을 하루에 볼 수 있고, 대정읍 횟집에서 한치회를 먹고 후식으로 파라다이스 호텔 카페에서 팥빙수를 시켜 먹을 수도 있지만 돌담길을 걷고 처음 보는 사람과 수다를 떨 수는 없다. 우리끼리 가서 우리끼리 차타고 다니며 우리끼리 먹고 우리끼리 놀다 오는 게 전부였다.

 

제주올레 길에서 나와 쿠하는 사람들의 배려와 도움을 받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 귀 기울이고, 바다로 이어진 길 위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돌아설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까만 담 길을 걸으며 아이의 귀에 속닥속닥 엄마의 속마음을 고백하고, 바람이 찬 오름 정상에서 아이의 볼을 부비며 껴안아 주게 됐고, 억새를 꺾어 흙길을 청소하며 같이 웃을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 공모기사 입니다. 


태그:#제주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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