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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타박타박 타박네야 너 어드메 울고가니/우리엄마 무덤가에 젖먹으러 찾아간다/물이 깊어서 못간단다 물 깊으면 헤엄치지/산이 높아서 못간단다 산 높으면 기어가지/명태줄라 명태싫다 가지줄라 가지싫다/우리엄마 젖을 다오 우리엄마 젖을 다오(구전가요 '타박네' 일부)

 

'타박네'라는 구전가요를 아시나요? 구전된 노래가 대개 그렇듯이 이 노래 또한 출처를 명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노래의 주인공이 엄마 잃은 아이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엄마의 무덤을 찾아 가는 아이의 간절함을 산과 물이 어찌 막을 수 있으며, 명태와 가지가 엄마 젖을 어찌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한 어머니가 다섯째 아이를 낳고는 눈을 감았습니다. 아들을 낳은 뒤 탯줄을 잘랐는데, 녹이 슨 가위였는지 그만, 어머니의 뱃속으로 균이 옮겨졌고 결국 파상풍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세상천지에 아기를 누가 있어 돌보라고…. 갓난아기를 비롯해서 세살, 다섯살, 일곱살, 아홉살까지의 두살 터울 다섯 아들이 세상에 올망졸망 남겨진 것입니다. 

 

청천벽력도 그런 청천벽력이 없었을 겁니다. 엄마 잃은 아들과 아내 잃은 남편의 그 아픔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요.

 

그러나 슬픔 앞에서 망연자실할 수만은 없는 것입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게 세상의 도리인 것이지요. 당장 젖 달라고 보채는 갓난아기의 허기진 울음을 어찌 듣고만 있을 수 있나요. 젖동냥이라도 할라치면 적셔진 눈물을 닦고 이웃을 찾아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다섯 아들 거두기 위해 시집간 스물네 살 대구 처녀

 

다섯 아이를 거뒀을 뿐 아니라 귀하게 키워낸 한 어머니를 소개합니다. 50년 전 아들 다섯을 둔 홀아비에게 시집간 스물네 살 대구 처녀는 두 아들을 낳아서 모두 아들 일곱에 남편까지 모두 여덟의 사내를 훌륭한 사회 구성원으로 일궈냈습니다. 한 알의 밀알로 썩어서 수많은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박순경(74)씨는 1957년 다섯 아들을 둔 홀아비이자 아홉 살이나 차이가 나는 김민구(83)씨와 결혼했습니다. 당시 철도공무원이었던 김씨는 경북 상주 출신으로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였습니다. 경상도 사나이들의 무뚝뚝함은 익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밥도(줘)" "아는(애는)?" "자자" 등 하루에 세 마디에 그친다는 살가운 맛 없는 경상도 사내에게 무엇이 부족해서 시집을 갔던 것일까요?

 

"엄마 잃고 슬퍼하는 다섯 자식을 거두느라 애쓰는 모습이 그렇게도 측은해 보였어요. 그런데 내 인생을 희생해서라도 이 가정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이 밀려왔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자식을 키워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에 결혼했지요."

 

다섯 아들을 키우는 일을 결심한 배경은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 시절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참 순박하고, 순수했구나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네요. 아무리 신앙심이 깊다고 할지라도 요즘 같으면 이런 희생을 감수하는 처녀 신앙인이 있을까요?

 

그럼 신앙의 힘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했을까요?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넷째 아들 김홍덕(54)씨는 "어머님이 형들과 갈등이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 자리를 빼앗은 것 같은 계모에 대한 원망, 그로 인한 반항과 갈등이 오죽했겠습니까?

 

가출한 아들을 돌아오게 한 어머님의 눈물 기도

 

철도 공무원인 남편은 전근 다니느라 늘 상 외지생활이었습니다. 결국 가정의 대소사는 아내 몫이었지요. 특히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심해진 아들들의 반항과 잦은 가출로 애간장을 녹일 정도였습니다. 생모에 대한 그리움 탓이었을까요? 내가 낳았어도 맘대로 못하는 게 자식이라는데, 하물며 가슴으로 낳은 자식을 어찌 맘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는 잠언과 시편을 반복해서 읽어주시면서 하나님 안에서 올바르게 살라고 가르치셨지만 철없는 아들들은 천방지축 날뛰었어요. 그런데 나쁜 길로 빠졌다가도 어머님의 눈물의 기도로 인해 돌아왔습니다. 가출한 탕자가 돌아오듯이 방황하던 아들들이 신학교를 가 목사가 되면서, 화해가 이루어지고 평온이 깃들었습니다. 만일 어머니의 기도가 없었다면, 지금 무엇이 됐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처녀의 몸으로 시집와서 다섯 자식을 거둔 어머니는 하늘이 생모를 대신해서 보낸 천사였습니다."

 

둘째 아들 김홍(58)씨의 고백입니다. 박씨는 그 애끓는 속을 기도로 달랬다는데, 그럼 기도는 쉬웠을까요? 김홍씨는 "어머니는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어도 자식들에게 화내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부르짖어 기도하시며 자식 문제를 풀어달라고 간구하셨습니다"고 덧붙여 말합니다. 박씨가 자식들에게 하는 최고의 욕은 '이 축복받을 놈아!' 또는 '이 호박 같은 놈아!'라고 하니 그 마음의 깊이를 알 만 합니다.

 

사내자식들은 싸우면서 큰다는데 일곱 아들 중에 두 아들은 이복형제이니 혹여 형들의 구박이 심하지는 않았을까요? 여섯째인 김홍철(49)씨는 "형님들은 동생을 아껴주었고 동생들은 형님들을 존경하면서 우애 속에 컸다"면서 "형님들께서는 어머님의 진심어린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친어머니 이상으로 여겼던 것 같다"고 말합니다.

 

김홍철씨의 말은 홍보성 코멘트였을까요? 둘째 형님 김홍씨에게 물었더니 "이복동생들을 혼낸 적도 제법 있었고, 그로 인해 어머님은 자식들 몰래 가슴 아파하셨던 것 같다"면서 "그럼에도 어머님은 일곱 자식에게 똑같이 대하시면서도 나무랄 때는 두 동생을 더 나무랐고, 좋은 학용품이나 옷 등을 다섯 자식에게 주었고 낡고 헌 학용품과 옷은 두 동생의 몫이었다"고 귀띔하네요.

 

속 썩는 일만 있었다면 어찌 살았겠습니까? 자식 중에서도 살갑고 기특한 자식이 있는 법이니까요. 수천 번 절망할지라도 단 한 번의 희망을 위해 세상 풍파를 견디듯이 박씨는 눈물의 세월 속에도 간혹 감동의 옷자락을 여미며 일곱 자식을 돌봤던 것입니다. 박씨의 자식자랑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우리 홍이 같은 효자는 어디를 찾아봐도 없습니다. 차비를 주었더니 걸어 다녔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내가 좋아하는 과일을 사온 겁니다. 또 남의 자식들은 군대가면 부모 돈을 타 쓰는데 우리 홍이는 군대 월급을 모아와 살며시 주면서 '어머니 조금만 참고 사세요. 돈 벌어 효도할게요' 하는 겁니다."

 

자식 문제로 속썩는 일은 그나마 낫다고 했습니다. 아홉 식구 먹고사는 일도 큰 짐이었지만 자식 교육은 아예 두려운 문제였다고 합니다. 큰아들부터 막내까지 일곱 자식이 대학부터 초등학교까지 줄줄이 학생일 때는 아침을 맞는 일이 두려웠다고 박씨는 고백합니다.

 

"남편의 박봉을 받아들면 그 돈을 쪼개고 아껴서 일곱 자식을 먹이고 가르쳐야 했지요. 고구마 한 솥을 삶아도 순식간에 동이 나는 겁니다. 그렇게 사람 입이 무서운 거예요. 먹는 것은 어떻게 해결한다고 하지만 교육비는 해결할 방도가 없었어요. 달라는 돈을 아이들에게 주지 못하고 학교에 보낸 날은 마음이 아파서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그래서 박씨는 자식들 몰래 돈벌이에 나섰습니다. 옷도 떼어다 팔기도 하고, 책과 가전제품 외판사원도 하면서 자녀교육비를 댄 세월이 10년 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고의 세월을 통해 일곱 자식 모두를 학사·석사·박사로 키웠으니 어찌 장한 어머니라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전기독교연합회는 지난 88년, 전국여전도회는 90년에 장한 어머니상을 박씨에게 드렸다고 합니다.

 

팔순 남편이 아내에게 바친 사랑의 편지

 

혹시라도 남편과 로맨스는 없었을까요? 고된 시집살이를 견디게 하는 힘은 아내를 위로하는 남편의 다정한 말 한 마디라고 하는데, 과연 정겨운 위로는 있었을까요? 

 

"남편이 너무 엄격해서 뭐라고 하소연하지도 못했어요. 조금이라도 위로해주면 힘이 났을 텐데, 다섯 자식을 맡긴 것을 무슨 금덩어리 맡긴 것처럼 오히려 유세했어요. 참고 벼르던 어느 날, 화풀이를 하려고 남편을 기다렸는데 퇴근해서 집에 들어오자마자 화를 버럭 내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는지 몰라도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내 뺨을 때리고 화를 푸세요'라고 했어요, 힘들 때마다 나 하나만 죽으면 가정이 화목해진다 생각하며 참고 살아왔습니다."

 

50년의 가정생활 중 30년간을 독재로 통치하던 김민구씨는 서대전역장을 끝으로 정년퇴임 한 뒤 박씨에게 평화적 정권교체를 하면서 외조를 아주 잘하는 자상한 남편으로 변신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 2006년에는 대전기독교연합회로부터 좋은 아버지 상을 받으셨답니다.

 

두 분의 금혼식 행사가 지난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2박3일간 있었습니다. 눈물의 기도로 키운 일곱 자식들이 미국을 비롯해서 전국 각지에서 모였고, 일곱 며느리와 열 여섯명의 손자손녀들이 결혼 50주년을 축하했습니다. 자식들은 돈을 각출해 수백만 원의 용돈을 부모님께 전달했고, 어머니는 넷째 아들과 둘째 며느리 목사에게 장애인선교단체와 중국동포와 외국인노동자 돕는 일에 쓰라고 각각 100만원의 헌금을 전달했습니다.

 

금혼식 첫날에는 '사치기 시치기 사뽀뽀', 닭싸움, 수건돌리기 놀이를 했답니다. 둘째 날에는 스파에 가서 노곤한 몸도 달래고, 서커스 공연도 관람도 하고, 발마사지도 받으셨답니다. 부부 풍선 터트리기를 할 때는 박장대소가 터졌지만 부모님께 드리는 영상편지가 상영될 때는 숙연해지기도 했다고 하는군요.

 

특히, 김민구씨는 금혼식에 참석한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유언을 남겼는데 자식 누구 하나 토 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를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내가 죽거든 시신을 기증해다오. 그리고 재산은 어머니에게 모두 물려주고 싶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아버님 뜻을 받들겠습니다!"

 

이번 금혼식의 하이라이트는 팔순 경상도 사나이 김민구 집사의 '영원한 동반자 사랑하는 아내에게'라는 제목의 편지낭독이었다고 합니다.금혼식에서 낭독했을 당시처럼 배경음악은 깔리지 않지만 편지 내용 한 번 보시겠습니까?

 

영원한 동반자 사랑하는 아내에게

 

처음으로 사랑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아내에게 글로써 사랑과 감사의 뜻을 전하는 것이 어쩐지 어색하기만 합니다. 지난날 불행하게도 어린 아들들 다섯만 남긴 채 상처를 당하여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처지를 불쌍히 여겨 주님께서 당신을 우리 가정에 구원의 천사로 파송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감당하기 힘들었던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 가족을 평화의 전당 같은 가정으로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사명은 이제 완수되었고, 우리 가정의 순경으로서 교통정리도 슬기롭게 잘 처리하여 이렇게 유종의 미를 거두었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도 같이 전하고 싶습니다.

 

지난 50년의 여정 속에 많은 추억들이 있었지요. 그 중 좋았던 시간들만 생각하고 불행했던 시간들은 다 잊어버리고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중략)…우리 부부는 지금까지 자식들의 효도를 받으면서 어려움 없이 행복하게 잘 살아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손들 모두 하나님 안에서 신앙생활 잘 하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만족하시지요? 이것이 당신이 눈물과 기도로 뿌린 신앙의 씨앗이 결실하여 지금 열매를 거두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다시 한 번 당신에게 감사와 사랑의 심정을 전하면서 자손들에게도 감사의 뜻을 함께 담아 이 글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이 생전에 꼭 하고자 그리도 원하는 선한 일들은 꼭 성사되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기대하시고 건강관리에 힘쓰면서 하늘나라의 소망을 이루도록 함께 기도합시다.

 

                   2007. 10. 13 당신의 울타리가 되는 사랑하는 남편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앤조이에도 게재돼 있습니다. 


태그:#어머니, #눈물의 기도, #금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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