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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송파구 석촌동에 위치한 사적 제101호 삼전도비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삼전도비는 본래 이름인 '대청황제공덕비'가 말해주듯 결코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님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비석의 '수난'도 비석이 지닌 역사만큼이나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실제로  고종황제 시절인 1985년에는 삼전도비를 강물에 버리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러나 1913년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조선강점의 명분을 강화하기 위해 비석을 다시 찾아 세웁니다. 이어 1945년 광복직후 비석은 곧바로 다시 땅속에 묻히는 수난을 겪습니다. 하지만 1963년 비석이 다시 발견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송파구 석촌동에 위치한 삼전도비
송파구 석촌동에 위치한 삼전도비 ⓒ 이재환

혹자는 삼전도비는 역사적 치욕이니 만큼 비석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삼전도비는 있는 그대로 잘 보존해야 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입니다.

그러나 삼전도비는 정치나 사회적 이유 등 각종 사연으로 화가 치민 서민들이나, 역사적 굴욕을 참지 못하는 일부 '피끓는 시민'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수난을 당했습니다. 비석에 발길질하는 것은 애교 수준이고, 최근까지도 비석에 심한 낙서를 하는 등 극단적인 훼손 사례도 빈번히 발생했습니다.  

치욕도 되새김하면 교훈이 된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비석을 콤플렉스 덩어리로만 생각해서는 안될 시점인 듯 보입니다. 일제가 비석을 다시 찾아 세웠다는 이유로 자존심 상해 한다거나, 지워야할 역사라는 등의 인식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전도 굴욕의 원인인 병자호란의 배경은 조선을 형제국으로 생각했던 만주족의 국가 청나라를 철저히 배척한데서 비롯합니다. 이는 잘못된 역사관과 정치적 관점에서 나온 그릇된 판단 때문이기도 합니다. 당시 조선 조정이나 유학자들은 명나라 즉, 중국의 한족을 조선의 기원으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이 한족의 지배를 당한 기자조선의 기자를 선조로 모시며 제사를 지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인 듯 합니다. 

이처럼 사대주의에 푹빠져 있던 조선은 고구려(혹은 고조선)의 후손 중 하나로 추정되는 만주족(청)이 내민 손을 끝끝내 거부합니다. 이에 앞서 임진왜란(1592) 당시 청은 조선에 '형제국 대우와 함께 지원군 파병'이라는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손을 내밉니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이 철저한 사대주의를 바탕으로 명나라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조선의 태도에 격분해 있던 청나라는 결국 병자호란(1636)을 일으킵니다. 그 결과 조선의 왕 인조는 청나라에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합니다. 자승자박인 셈입니다. 삼전도비는 위정자들의 잘못된 정치적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역사적인 비석'입니다.

따라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그 비석을 보며 역사적인 치욕만을 떠올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비석을 보면서 삼전도비의 '굴욕'이 주는 교훈을 수시로 되새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 중 누군가가 삼전도비가 못마땅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훼손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역사왜곡의 차원을 넘어 '역사적 교훈'을 훼손하는 심각한 '사건'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지 못한다면, 일본이 심심하면 들고나오는 역사왜곡문제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할 명분을 잃게 됩니다. 또,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가 없겠지요.

우리조차 역사를 왜곡하는 마당에 다른 국가들의 역사왜곡을 비판한다는 것은 아전인수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이나 중국이 역사를 왜곡하는 논리도 역사를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만 해석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굳이 그들의 전철을 밟을 이유는 없겠지요. 

중국 아닌 청에 당한 조선의 '굴욕'

삼전도비는 그것이 비록 치욕 스러운 것일지라도 엄연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삼전도 굴욕은 조선이 중국(명나라)에 당한 치욕의 역사가 아니라, 조선을 형제국으로 여겼던 북방의 새로운 패권국 청(만주족)에게 당한 일종의 '정치-군사적 보복'이란 점입니다.

 청태조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조선의 인조임금
청태조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조선의 인조임금 ⓒ 이재환

그동안 삼전도비를 훼손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아마도 청나라와 중국을 동일시하면서 격분한 듯합니다.

그러나 삼전도비의 당사자는 당시의 중국인 명나라가 아니라, 명과 중원의 패권 놓고 한판 전쟁을 벌여 결국에는 명을 멸망시킨 신흥강국 청나라였습니다.

한족의 명나라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그 원류나 언어적인 측면에서 전혀 다른 국가입니다. 물론 현재 중국에는 청나라가 없습니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한족에 흡수되어 그들의 언어(만주어)와 문화를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삼전도비를 훼손하려 드는 사람들은 '삼전도비=중화비'로 착각하고 있는 듯한 인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청나라를 야만족이라며 무조건 배척한 조선 위정자들의 인식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낡은 생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실제로 청나라 역사서 만주원류고는 "청과 조선은 그 원류가 같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병자호란 이전, 청이 조선에 선뜻 손을 내밀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청나라는 애초부터 조선을 형제국으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청의 호의를 무시하며 끝내 그들의 신경을 건드린 조선은 결국 전란에 휩싸이며 형제국이 아닌 신하국으로 전락합니다. 그로 인해 조선은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청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조선이 명(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를 버리고, 언어나 민족의 친연성 측면에서 명보다는 훨씬 더 가까웠던 청나라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했더라면, 병자호란은 없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앞서 벌어진 임진왜란(1592)의 조기 종결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조선외교의 뼈아픈 실책, 삼전도비

따라서 삼전도비는 조선 외교의 실패에 대한 '냉정한 기록'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셈입니다. 그것은 또 치욕스럽스다고 무작정 삼전도비를 철거하거나 훼손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삼전도비는 지금도 여전히 잘못된 외교적 선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지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삼전도비가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교훈은 아닐까요.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삼전도비#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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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 개인주의자. 이성애자. 윤회론자. 사색가. 타고난 반골. 충남 예산, 홍성, 당진, 아산, 보령 등을 주로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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