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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에 걸려도 마음 놓고 아프지 못할 만큼 분주했던 10월을 보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직도 달력은 10월에 멈춰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곧 겨울이 다가올 게 뻔한데, 너무 오래 과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내 복잡한 머릿속에서 꽉 붙들려 있던 가을과 오래 앓던 감기를 이제는 정말 보내줄 때가 온 것이다. 그렇게 입동을 하루 앞둔 아침, 단호하고
절도 있는 눈빛을 하고 남도여행을 감행했다.


목적지는 순천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왜인지 순천에는 따사로운 햇볕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물론 그 안에는 늘 사진으로만 그리던 순천만의 갈대밭이 일몰이 떠나가는 가을풍경과 근사하게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여행은 언제나 '제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기차에 몸을 싣기 전부터 다시 돌아올 내 모습과 마음의 상태를 가만히 짐작해 보았다. 평일에 떠나는 호남선 기차는 역시 한산했다. 나를 들끓게 했던 도시의 풍경들이 차창 밖으로 멀어져 갔다.

 

 

어느덧 기차는 순천역에 닿았다. '훌쩍' 아니면 '불쑥' 떠나는 여행이라는 것들이 그렇듯 여행지에 대한 정보는 내게 전무한 상태였다. 덩그러니 버려진 짐짝 같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마음을 다잡고 서둘러 역사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역 광장으로 나와 몇 번을 두리번거렸다. "저기다!" 성큼성큼 광장 한 곳에 자리한 '관광안내소'를 향해 걸었다.


먼저 와 있던 여행객이 안내원에게 여행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나와 같은 목적지다. 반가운 마음에 '그냥 쫓아 나서 볼까?'하는 모험을 건 내 장난기가 발동하려는 것을 눌러 참았다. 여행객이 떠나자마자 시치미 떼듯 "저기, 순천만에 가려고 하는데요!"하고 물었다. 안내원은 친절하게 순천시 관광책자를 하나 건네주며 "이왕이면 낙안읍성에도 들렀다 가세요. 조금 서두르면 낙안읍성도 보고 해질녘에 맞춰서 순천만도 둘러보고 좋잖아요"라고 한다. 안내원이 가르쳐준 버스 정류장으로 가니 역시 먼저 왔던 여행객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 속에선 벌써부터 은근한 친밀감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무심한 척 얼른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낙안읍성행 버스에 올랐다. 어느 정류장에선가 한 부대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시끌벅적 밀물처럼 몰려들어 버스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자리를 찾는 분주함 속에서도 오랜만에 만난 이웃과 안부를 주고받느라 버스 안은 그야말로 시장바닥이 따로 없다. 누군가의 보따리에서 비릿한 냄새가 퍼져 나왔다. 잠시 코끝을 쥐기도 했지만 내 어린 시절엔 너무도 흔한 풍경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창문만 살짝 열기로 했다. 조금은 불편하지만 정겨움이 가득 묻어났다.


삶이란 이렇게 조금씩 서로의 몸에 부대끼는 것이 아닐까. 뻔한 만남이지만 반갑게 안부도 물어가는, 새로 산 물건들이 무엇인지 물어 보기도 하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살림살이에 자잘한 관심을 넌지시 주고받는 그런 것은 아닐까. 이 빠진 자리로 술술 새어나가는 바람소리로 '허허허' 커다랗게 웃으시는 한 할아버지의 웃음이 마냥 좋았다. 마음 가득히 욕심을 들여놓고서는 절대로 그렇게 웃을 순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흉내 내기 힘든 깊고, 가볍고, 유쾌한 할아버지의 웃음소리에 내 귀도 따라 웃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낙안읍성에 닿았다. 노랗게 잘 여문 벼이삭의 빛깔만큼 찬란하고 따뜻한 가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입구는 관람객들로 떠들썩했다. 멀리 일본에서도 단체 관광을 온 모양이었다. 성안에 들어서자 향긋한 짚 냄새가 퍼져 나왔다. 여기저기 새로 지붕을 이고 있었다. 시간을 얼마나 돌려야 볼 수 있는 풍경들인가. 새마을 운동 이후 너도나도 경쟁하듯 버렸던 옛것들이 눈앞에서 버젓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꿈속을 걷는 것처럼 바라보이는 모든 것들이 저마다 신기하고 몽롱했다.


읍성 안에서 직접 거주하는 인구도 적지 않다고 했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깨를 터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곁에서 느긋하게 여물을 씹는 누렁이 황소, 그리고 그 옆에서 짚을 꼬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정지용 시인의 '향수'를 떠올리게 했다. 이제는 보기 힘들어진 돌담과 흙길이 자연스럽게 곡선을 그리며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어느 집 마당가에는 메밀꽃이 시들어 가고, 어느 집 돌담에는 호박이 매달렸는가 하면, 또 어느 집에는 감나무 가득 주렁주렁 열매들이 익어간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며칠 묵었다 가고 싶게 만드는 아기자기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성 안의 풍경들이다.

 

 

성안 어디쯤에는 그 옛날 죄인을 단죄하던 무서운 옥사 체험 세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럴 듯하게 재현해 놓은 옥사 세트는 섬뜩한 모습의 죄인 모형들이 사실적인 표정으로 관람객을 맞이했다. 이밖에도 물레방아와 도예 및 짚공예품들이 전시되고 있어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나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언젠가 다른 민속촌에 갔다가 입구에서부터 마중 나와 시끄럽게 호객행위를 하는 장사꾼들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낙안읍성은 단순하게 보여주기 위한 공간에 머물기보다는 실질적인 내실을 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과거를 살고 있는 분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내 얕은 시선이 부끄러웠던 까닭이기도 하다.


시간이 오후의 절반을 지나가고 있었다. 아쉬움을 접은 채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해가 지기 전에 순천만에 닿으려면 조금 서둘러야 했다. 버스 시간을 묻기 위해 근처 가게에 들렀다가 운 좋게도 손님으로 온 한 아주머니의 차를 얻어 탈 수 있었다. 평소 유난히 겁이 많아 낯선 사람이 동승을 권해도 먼저 거절했을 텐데 이상하게도 그때 나는 냉큼 그 아주머니의 차에 올랐다. 마침 그쪽을 경유해서 가려던 차였다면서 그 아주머니는 친절하게 이것저것 순천에 대한 정보를 들려주셨다. 순천만을 제대로 보려거든 반드시 밑에서만 보지 말고, 조금 힘들더라도 용산 전망대까지 가보아야 한다는 당부와 함께.

 

 

마음씨 고운 아주머니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곧장 순천만 갈대 군락지가 있는 주차장 입구에 닿았다. 거듭 고마움을 전하는 인사를 드렸다. 하늘에선 벌써 뉘엿뉘엿 해가 기울고 있었다.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주차장에서 조금 걸어 들어가니 눈앞에 울창한 갈대숲이 보였다. 갈대꽃이 절정에 이른다는 10월 중순을 훌쩍 넘겨 찾은 탓에 아쉽게도 은빛, 잿빛, 금빛으로 빛깔을 바꿔가며 자아내는 갈대꽃의 향연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40만 평이 넘는 거대한 갈대군락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탄을 쏟게 만들었다. 갈대숲 사이로 나 있는 나무로 만든 탐방로 위를 걷는 기분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꽃만큼이나 가볍고 산뜻했다. 내 안에 도사리고 있던 방랑자적 기질이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넘실넘실 흔들리며 갈대숲 더 깊숙한 곳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갈대숲 탐방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순천만의 절경과 일몰의 장관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용산 전망대로 향하는 계단이 시작되었다. 시작부터 비교적 경사가 높은 편이라서 산을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어떻게든 일몰이 시작되기 전까지 전망대에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자꾸만 아파오는 다리를 재촉했다. 유난히 무겁게 느껴지는 카메라 가방의 무게를 괜스레 타박하기도 하면서.


"우와!"


어떻게 이렇게 시간을 잘도 맞춰 왔을까. 전망대에 도착하자마자 일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탁 트인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순천만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갈대숲과 붉은 칠면초 군락, 그리고 자연이 만든 S자형 물길은 서로 어울려 언젠가 보았던 사진 속의 신비로운 풍경 그대로 감탄을 쏟아내게 만들었다.

 

 

이미 전망대 앞쪽은 대형카메라를 가진 사진작가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서 일몰과 함께 시작된 자연의 오묘한 신비 앞에 자리를 잡고 자연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새로운 느낌의 풍경화를 감상하느라 애가 닳았다. 카메라가 담아낸 것은 내가 목격한 일몰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지극히 일부일 것이다. 자연이 만들어낸 것과 인공적으로 연출해낸 기술력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부디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전 먼저 내 가슴이 그 아름다움을 느끼고 간직했기를 바랐다.

 

 

"어어? 저놈이 왜 저렇게 빨리 들어가 버리는 거지?"


일몰이 깊어질수록 사진작가들의 카메라 셔터 누르는 소리에도 긴장감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찰나 해가 아예 떨어져 버렸다. 여기저기 아쉬움의 탄성이 쏟아졌다.


나는 속으로 "가을아, 안녕!"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렇게 남도까지 쫓아내려온 나는 올해 마지막 가을을 배웅했다. 그리곤 이제 곧 다가올 겨울 추위와도 당당히 맞서야 할 것이라고 내 나태해진 정신에게도 힘찬 구령을 실어 보냈다.

 



#낙안읍성#순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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