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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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 일본 - 오자와 이치로의 '대연정' 소동
지난 7월 집권 자민당의 '역사적 참패'로 끝난 일본 참의원선거 직후, 승리한 민주당의 브레인으로 알려진 야마구치 지로 홋카이도대 교수를 도쿄에서 만났다. 그는 과거 열렬한 사민당 지지자. 그러나 1990년대 사민당이 몰락하고, 일본 정계가 자민-민주의 보수양당체제로 개편되면서 지금은 민주당에서 '대안찾기'를 하고 있다. 그는 본래 품고 있던 '진보적 가치'를 민주당을 통해서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민주당의 정책노선이 오자와 이치로 대표 체제가 된 이후 '평화외교'와 '신자유주의 반대'로 정리됐다고 확신에 차서 말했다. 선거 후 한동안 그의 이런 '기대'는 현실화하는 듯했다. 오자와 대표는 미국의 강력한 요청을 뿌리치고 인도양에 파견된 해상자위대의 활동기한을 연장하기 위한 '테러대책특별조치법' 개정안에 반대했다. 참의원 과반수를 장악한 민주당이 개정안을 통과시켜주지 않자 집권여당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당초 파견 기한이었던 지난 1일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아 자위대를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됐다. 야마구치 교수가 말했던 대로 민주당이 미국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자위대의 해외파견에 반대하며 '평화노선'을 걷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허상이었다. 오자와 대표는 국회 심의과정에서 '본색'을 드러냈다. 그 동안 그가 내세운 '테러대책특별조치법' 반대 이유는 자위대가 후방지원 활동을 벌이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유엔결의에 의하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그는 유엔결의에 따른 파병이라면 '후방지원' 뿐만 아니라 직접 '무력행사'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 오히려 자민당 보다 한술 더 떴다. 그의 '테러특별조치법' 반대가 결국 '평화노선'의 반영이 아니라, 자민당을 흔들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얕은 계산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최근의 이른바 '대연정 소동'을 통해 보다 극명하게 드러났다. 오자와 대표는 지난 2일 후쿠다 야스오 총리와의 '밀실회담'에서 자민-민주당간 '대연정'에 합의한 뒤 이를 민주당 간부회의에 부쳤다가 부결되자 대표직을 던졌다. 그리고 이틀 만에 사의를 철회하는 등 '갈지자' 행보를 보이고 있다. 자민당과 다른 정치적 가치와 노선을 내걸고 국민의 지지를 착실히 모아 집권하려는 게 아니라, '밀실거래'를 통해 권력을 나눠가지려 했던 것이다. 2005년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였지만, '대연정' 제안은 상대당과 추구하는 정치적 가치와 노선에 차이가 없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2막: 한국- 이회창 대선출마 소동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7일 끝내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의 출마는 단순한 '보수분열'의 의미에 머무를 것 같지 않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이번 대선이 보수후보간 양강 구도로 전개될 가능성을 짙게 예고하고 있다. 전체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 핵폭탄이 될지도 모른다. 한국도 혹시 일본식 보수양당체제로 가는 걸까? 물론 한국과 일본은 정치적 배경과 상황이 많이 다르다. 이 시점에서 한국정치가 일본의 전철을 밟을 것이란 예상은 너무 섣부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불길하게도 한국정치는 많은 점이 일본을 닮아가고 있다. 이회창씨의 출마는 1993년 오자와의 자민당 탈당을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이회창과 오자와 모두 스스로를 '보수의 적자'로 생각하며, 실제로 그렇게 인정될만한 경력을 가졌다는 점이 닮았다. '권력욕'이란 뿌리도 같다. 다만 당시 40대였던 오자와는 10여 년의 시행착오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지만, 70대인 이회창씨는 이번 대선과 내년 총선에서 '한방'에 끝내야 한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이것도 만약 대선 전후 '이회창-박근혜 연대'가 성립된다면 일본과 유사한 상황이 돼버린다. 박근혜씨의 '침묵'은 그럴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일 정치의 유사점은 진보세력의 패착이 또 하나의 보수양당체제가 자리잡을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줬다는 것이다. 일본의 진보세력을 대변했던 사민당의 몰락 원인은 동서냉전의 종식이라는 외부로부터의 충격도 있었지만, 내적 요인이 더 컸다. 1996년 자민당 주도의 연립정권에 안이하게 참여한 것을 말한다. 사회당은 이른바 '55년 체제'에서 늘 20~30% 정도의 의석을 유지하며 제1야당으로서 존재감을 발휘했다. 사회당이 내건 차별화된 정치적 가치에 동조하는 유권자가 그만큼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연정에 참여하는 순간 국민들 눈에는 사민당도 여느 보수정당과 다름 없이 기득권 유지에 연연해하는 집단으로 비쳐졌다. 지금 한국의 진보세력이 처한 위기의 본질도 같은 맥락에 있다. '단독집권'에 성공함으로써 일본 진보세력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유리한 입장에 섰지만, 집권 기간 스스로 '진보적 가치'들을 차버리고, 무능을 드러냄으로써 위기를 자초했다. 그 후 권력의 핵심세력들이 보인 행태는 한결같이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모습이었다. 이회창씨의 출마가 기정사실화되자 범여권 측이 내놓은 맞대응 카드가 '후보단일화'. 그러나 후보단일화 논의만큼 기득권 유지의 '욕심'을 상징하는 소재도 없다. 경선 과정에서 저질러진 불법과 반칙은 다 덮고, 그 동안 보여온 정책과 노선의 차이도 다 미뤄놓고 무조건 합치자는 것은, '화합'과 '단결'로 포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한 '야합'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만한 국민은 다 안다. #3막: 시나리오 "한국정치는 일본식 보수양당체제로 가게 될 것이다." 지난 10월 초 만난 김성호 전 의원이 이런 말을 했다. 지난해 10월 일찌감치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그는 현역의원으로서 열린우리당 탈당 1호인 임종인 의원과 함께 대통합민주신당 합류를 거부하고 ‘새정치개혁연합’이란 조직을 만들어 독자적 활로를 모색 중이다. 당시는 아직 이회창씨의 출마 움직임이 가시화되기 전. 그가 그린 보수양당체제의 시나리오는 이랬다. "한나라당 내에서 이명박파와 박근혜파는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다. 왜? 경선 과정에서 사실상 내년 총선 공천을 끝냈기 때문이다. 대선까지는 어쩔 수 없이 그냥 가겠지만, 대선 후 어느 시점에서 박근혜파가 갈라져 나올 수밖에 없다. 이는 무시 못할 세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진보세력은 보수가 분열하더라도 이를 도약의 계기로 흡수할 수 있는 동력을 상실했다. 이대로 간다면 보수정당간 경쟁에 국민의 눈과 귀를 다 빼앗길 수밖에 없다. 오직 기득권 유지를 위해 급조된 대통합민주신당은 대선에서 패배하자마자 분열해 소멸의 길을 걸을 것이고, 일부는 그래도 ‘덜 보수적인’ 이명박 쪽으로 흡수될 것이다." 그는 지난해 지방선거를 치르면서 민심이 '민주개혁세력'을 완전히 떠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고 했다. 민주개혁세력이 '생존의 위기'를 깨닫고 환골탈태의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당명만 바꾸면서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눈속임 정치'로 점점 깊은 수렁에 빠져들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시나리오는 이회창씨의 갑작스런 출마선언으로 차질이 빚어졌다. 그러나 움직임이 조금 일찍 시작됐을 뿐, 보수양당체제로 간다는 시나리오의 골격은 오히려 더 튼튼해졌다. 현재 20%를 웃도는 이회창씨의 지지율은 대부분 과거 박근혜 지지층에서 이동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도 그는 한국정치가 일본의 전철을 밟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7일 이회창씨가 출마선언을 하는 날 그에게 전화를 걸어 다시금 견해를 들어봤다. "우려했던 시나리오가 생각보다 더 빨리 시작됐다. 민주개혁세력이 정말 철저한 자기청산과 뼈를 깎는 아픔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한국정치는 일본식 보수양당체제로 가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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