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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말하였다.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 <이사야서 49장 4절>

2007년 6월 24일 일요일.

순례 2일째, 총 27km
오전 7시 출발, 오후 3시 20분 도착.


오전 7시 즈음, S씨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걸어 나오는 가운데 카미노 최초이자 최후(?)로 갈림길을 잘못 들어 약 100여 미터 정도 헤맸다. 조개의 펼쳐진 부분인 줄 알고 찾아갔더니, 그 빗살들이 모이는 부분이 맞는 길이었더라. 그 이후로는 길을 잘못 들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산티아고 가는 길 길의 상징인 조개사인이 걸린 비석을 따라
▲ 산티아고 가는 길 길의 상징인 조개사인이 걸린 비석을 따라
ⓒ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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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처음으로 바(Bar)를 발견했다. 순례자들이 배낭을 내려놓고 커피에 작은 빵 하나로 아침을 해결하는 풍경이 신기했다. 이것이 그 말로만 듣던 '카페 콘 레체Cafe con Leche(우유 탄 커피)'구나? 차마 앉아서 여유 부리지는 못하고 급한 마음에 갓나온 빵 하나를 사들고 걷기 시작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오전 7시 반 제법 이른 아침, 스페인 시간으로 치자면 새벽이었는데 젊은이들이 갓 꺾은 나무 잎사귀 같은 것을 집집이 꽂아주고 있었다. 뭔가 의미가 있는 것 같았지만 붙들고 물어볼 수도 없고, 그저 대문에 걸린 잎사귀의 풍경이 참 아름다워서 사진 한 장을 남겼다. S씨와 함께 걷다가 그녀가 휴식하면 나는 '천천히 가겠습니다'하고 걸음을 이어가고 그렇게 함께이지만 또 홀로 걷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라라소냐 가는 길에 젊은이들이 집집마다 꽂아두고 간 나뭇가지, 어떤 의미일까?
▲ 라라소냐 가는 길에 젊은이들이 집집마다 꽂아두고 간 나뭇가지, 어떤 의미일까?
ⓒ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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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며 푸른 하늘, 흰 구름, 불어오는 바람을 만났고 처음으로 산에 가시덩굴처럼 자란 들장미와 크리스마스 잎사귀 나무(뾰족뾰족한 나무!)를 보았다. 산길을 걷던 중 S씨가 산딸기 열매를 알려주어서 그것도 따먹어 보았다. 작은 열매가 꽤 단 편이라 신기하고 또 재미있었다. 야생 아이비와 양귀비와 깻잎 닮은 풀도 귀여웠다고 일기에는 빼곡하게 적혀 있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안전한 길 '산티아고 가는 길'의 애칭, 볕 드는 길이 눈부시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안전한 길 '산티아고 가는 길'의 애칭, 볕 드는 길이 눈부시다.
ⓒ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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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km를 걸어 '주비리(Zubiri)'에 닿았다. 오늘의 목적지 라라소냐를 5km 정도 앞둔 아주 작고 멋진 다리가 있고, 그 아래로 시내가 흐르는 곳이었다. 먼저 도착한 S씨는 양말도 벗어두고 물에 발목을 담그고 계셨다. 나도! 후다닥 풀어헤치고 잠시 차가운 강물에 발을 담갔다. 사실 좀 추웠다. 그래서 오래 즐기진 못했다.

“여기서 쉴까요, 우리?”
“그것도 좋지만…. 이왕 가기로 한 것 가보자고요.”


달콤한 휴식 후, 우리는 다시 짐을 챙겨 걷기 시작했다.
들판의 휴지두루마리(?)들 대체 무엇일까? 정답은 한달 쯤 후에 알게 되었다: )
▲ 들판의 휴지두루마리(?)들 대체 무엇일까? 정답은 한달 쯤 후에 알게 되었다: )
ⓒ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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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며 추수가 끝난 밀밭에 정체 모를 거대한 두루마리 휴지 같은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저게 대체 뭐지? 어떻게 저런 걸 만들지? 왜 들판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있지? 궁금증들은 길을 걸으며 천천히 해결되었다. 그렇지만 이때엔 참 신기하고 이국적인 풍경이라 '우와~'하면서 쳐다보고 있었다. 거대한 배낭을 짊어진 S씨는 바람처럼 빠르게 걸었고, 되려 뒤처져가던 나는 숙소에서 만나겠거니 생각하며 그녀 뒤를 천천히 걸었다.

1시간 정도가 지나, '라라소냐(Larrasoaña)'의 숙소에 도착했다. 2층 침대 위 칸이 무서웠던 나는 'bottom one, bottom one!'을 외치며 아래를 몸으로 그렸다. 덕분에 본관이 아닌 별관 숙소에 짐을 풀게 되었다. 그리고 컨테이너 박스에 만들어진 샤워실에서 아저씨 아줌마들과 함께 샤워했다. 이 날의 샤워실이 옷 갈아입기엔 가장 아슬아슬했다. 그렇지만 남자니 여자니 하는 것보단 함께 고생하는 순례자, 그런 느낌이었다.

본관에 짐 풀으셨겠거니 생각했던 S씨를 만난 것은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알고 보니 라라소냐의 진입로를 찾지 못하시고, 다음 마을로 이어지는 길을 한 시간을 넘게 걸으시다가 더 이상은 무리라고 판단되어 그 길을 내리 돌아오셨단다. 눈에 띄게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녀가 안쓰러웠다. 그리고 이 숙소에서, 전날 살짝 인사만 하고 헤어졌던 한국인 Y언니를 만나서 '우리 셋이서 식사하면 어떨까요?'하고 꼬셔(?) 동네의 유일한 bar에서 저녁메뉴를 먹었다.

순례자들의 저녁식사 매일 강행군으로 순례자들의 식사는 평상시보다 푸짐하다. 이제 겨우 전채요리, 아직 본요리가 남았다!
▲ 순례자들의 저녁식사 매일 강행군으로 순례자들의 식사는 평상시보다 푸짐하다. 이제 겨우 전채요리, 아직 본요리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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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 2년간 선생님으로서 국제자원봉사를 마치고 순례에 나선 Y언니, 그리고 결혼과 직업을 12년간 이어오시다 순례길에 오른 여행 베테랑 S씨, 나는? 자신을 갓 세례를 받고 유럽여행을 생각하다가 이 길에 휘말려오게 되었다고 소개했던가?

파김치가 되어 받은 으리으리한 상은 푸짐했고, 스페인의 비노는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좋은 언니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는 참 따뜻했다. 열심히 걷고, 따뜻한 잠자리에 짐을 풀고, 잘 씻고, 빨래를 한다. 스페인의 쨍쨍한 볕에 옷들은 바삭바삭 마르고, 하루를 마치며 거나한 상을 받는다. 천천히 '순례의 맛'을 들이고 있었다.

밤엔 여기저기서 드르렁거리는 소리 덕분에 밤에 잠에서 깨어 창가에 기대 하늘을 쳐다보았다.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내일의 목적지는 순례에서 처음 만나는 도시 팜플로나, 그곳에서는 할 일들이 있다.

카미노, 산티아고, 스페인


#산티아고가는길#스페인#도보여행#성지순례#카미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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