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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종이 인간
- 그림ㆍ글 : 페르난도 알론소
- 옮긴이 : 권미선
- 펴낸곳 : 해나라(2002.7.30.)
- 책값 : 6000원

 

 

〈1〉 빨래


그제부터 큰 통에 담가 두고만 있던 이불을, 아침에 가루비누를 풀어서 살짝 헹군 뒤, 두 시간 그대로 두었다가 빱니다. 오른팔꿈치가 몹시 저려서 물짜기는 고되었지만 옆지기 도움을 받으며 어느 만큼 짠 다음, 마당으로 들고 나와 탁탁탁 털어서 담벼락에 널어놓습니다.

 

인천으로 살림집을 다시 옮기면서 살펴본 대목 가운데 하나는 씻는방이 얼마나 넓으냐였습니다. 그동안 혼자 살아온 살림집에서는 씻는방이 없거나 아주 좁았습니다. 마음놓고 이불빨래를 할 수 없었어요. 이불빨래는 손빨래 가운데 가장 힘들다지만, 힘든 만큼 가장 즐겁고 뿌듯합니다. 어쩌면 손이 덜 가는 빨래일 수 있고, 담벼락에 널어놓고 물방울이 줄줄줄 떨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흐뭇해지는 빨래입니다. 이제 저 빨래가 맑은 햇볕을 받아 뽀송뽀송 마르면 저녁에 잠자리에 들며 아주 포근하겠구나 싶어 한결 즐겁습니다.

 

씻는방이 넓기를 바란 까닭은 이불빨래 때문만은 아닙니다. 뒷날 아이를 낳아 기른다고 할 때 이 씻는방에서 함께 씻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이불이며 다른 빨랫감이며 바닥에 죽 깔아 놓고 함께 씻으면서 빨래를 적실 수 있고, 하나하나 아이들과 함께 손빨래를 하면서 놀 수 있겠지요. 저는 한쪽에서 빨래를 하고, 아이들은 한쪽에서 씻는방 바닥을 빗솔로 북북 비비며 닦고. 이불빨래를 때로는 바닥에 쫙 펼쳐서 손으로 비빔질을 해서 함께 빨 수도 있고.


.. 종이 인간은 자기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어요. 그렇지만 종이 인간이 들려주는 얘기는 모두 전쟁과 갑작스런 사고나 가난에 대한 이야기들뿐이었어요. 아이들은 종이 인간이 해 준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주아주 슬픈 얼굴이 되었어요. 몇몇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어요 ..  〈20∼24쪽〉


제 어릴 적을 돌아보았을 때, 이불빨래 하는 날은 밖에 나가서 동무들과 놀 수 없어서 짜증스러웠지만, 이맛살 찌푸린 채 시키는 대로 밟고 비비고 하다 보면 어느새 이맛살이 스르르 풀리면서 싱글벙글 웃으며 온몸이 비누거품이 됩니다. 옷을 하나둘 벗어던지고 몸씻기까지 같이하고야 맙니다. 밖에 나가 놀자던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 형하고 어머니와 낑낑거리며 물을 짰고, 툇마루 난간에 이불을 쫙 하고 널면! 또는 동네 빈 담벼락이나 울타리에 널면!


〈2〉 옷


아침에는 모처럼 보일러를 돌려서 몸을 씻었고, 밀린 바지 빨래 석 점을 해치웠습니다. 가을 날씨까지는 손빨래를 신나게 즐기는데, 쌀쌀해진 날씨에는 손이 얼어붙기 때문에 한 점 두 점 밀리기 일쑤가 되고, 더 밀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빨래손을 확 붙잡으면 손이 얼어붙으면서도 어느새 두 점 석 점 해치우게 됩니다. 얼얼한 손을 가랑이 사이에 집어넣고 녹이는데, 그러면서도 웃습니다. 좋아서. 오늘은 올해 들어 두 번째로 따순 물을 썼습니다. 따순 물로 빨래하니 손도 따숩고 빨래도 금세 되고 좋네요.


.. 빨래방 간판이 보였어요. 종이 인간은 너무 좋아서 깡충 뛰었어요. 그리고는 굳게 마음을 먹고 빨래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어요. ‘여기서는 내 몸에 쓰여진 것들을 모두 지울 수 있을 거야. 그건 모두 다 아이들을 슬프게 하는 것들뿐이야’ ..  〈28∼31쪽〉


혼잣살림을 하거나 시집장가를 가서 살림을 하거나, 제 또래동무며 손위나 손아래 동무며, 어르신들이며 모두들 빨래기계를 집에 들여놓고 삽니다. 손빨래로만 살아가는 분은 딱 한 사람 만났습니다. 추운 겨울에도 호호 손을 녹이며 손빨래를 하신답니다. 그분 차림새를 보면, 멋을 아예 안 차리지는 않지만 자기 깜냥과 주제에 맞는 멋에 맞출 뿐, 구태여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더 나아갈 까닭도 없겠지요. 자기 옷차림이란 자기가 입어서 좋을 옷을 자기 몸이 좋아하는 대로 갖추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자기 옷은 자기가 빨아서 입어야 하는 만큼, 옷 아낌새도 남다릅니다. 돈 몇 푼으로 사서 입다가 유행이 지나면 재활용수거함에 휙 던지거나 ‘아름다운가게’ 같은 곳에 슥 기부하고 마는 옷이 아니거든요. 참말로 자기가 아끼며 입을 수 있는 옷, 좋아하며 즐길 수 있는 옷, 두고두고 오래오래 입을 수 있는 옷, 뒷날 자기 딸아들한테 물려주거나 좋은 동무한테 선사할 수도 있는 옷만 알뜰히 마련해서 적은 숫자로 갖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들한테는 옷이 몇 가지나 있어야 할까요. 우리들한테는 책이 몇 권이나 있어야 할까요. 우리들한테는 은행계좌 남은돈이나 달삯으로 벌어들이는 돈크기가 얼마나 되어야 할까요. 우리들이 살아가는 집터는 몇 평이나 되어야 할까요.


〈3〉 돈과 집


우리 도서관이나 살림집에 놀러오시는 분들은 평수가 꽤 넓은 모습을 보며 놀랍니다. “돈 많이 벌었나 봐요?” “아니에요. 이 동네가 싸요. 다들 서울에서만 살려고 하고, 번화가 도심지 가까이 살려고 하고, 아파트숲에서만 살려고 하니, 자기 살림터를 넉넉하게 즐길 수 없잖아요. 흔한 말로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고들 하는데, 시골에 살 때에도 욕심을 안 내면 빈집을 아주 적은 돈만 치르고도 얻어서 쓸 수 있어요.

 

크고 넓은 집이 아니라, 온갖 물질문명을 다 갖추어 쓸 수 있는 집이 아니라, 자기가 마음을 아늑하게 다스리면서 살고 싶은 집, 더 많은 돈이 아니라 더 많은 자기 시간을 즐기면서 살고 싶은 집, 남한테 잘 보이려는 집이 아니라 자기 몸에 알맞고 동네사람들하고도 오순도순 복닥이고 싶은 집에서 살 마음이라면 얼마든지 값도 싸면서 괜찮은 집을 마련할 수 있어요. 뭐, 서울에서 산다고 할 때에도, 집에서 전철이나 버스 타는 데까지 걸어서 십 분이나 이십 분쯤 나가야 하는 안쪽 깊숙한 데로 얻으면 싸고 괜찮아요. ‘걸어다닐’ 생각이나 ‘자전거 타고다닐’ 생각을 하면 말이에요.”


.. 그렇지만, 종이 인간이 말하려고 하자…… 그의 입에서는 한 마디 말도 나오지 않았어요! 종이 인간은 자신의 몸이 온통 텅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  〈41쪽〉


돈으로 사는 집은 돈으로 잃습니다. 돈벌이 잘되는 나라는 돈벌이로 무너집니다. 사랑으로 나누고 믿음으로 함께하며 나눔으로 웃고 울 수 있을 때, 백 해를 꽉 채우지 못하고 떠나는 우리 삶일지라도 그 백 해쯤 되는 세월을 ‘나, 이 땅에서 잘살다가 떠나네. 아무 아쉬움도 없이.’ 하고 말하며 눈감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들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한테 무엇을 물려받으면 좋을까요? 큰 집? 빠른 차? 넉넉한 돈? 높은 이름?

 

우리들은 우리 딸아들한테 무엇을 물려주면 좋을까요? 영어 솜씨? 한문 재주? 일류대 졸업장? 예쁜 얼굴과 멋진 몸매?

 


〈4〉 사진 찍기


사진기 하나 어깨에 메고 동네 마실을 다닙니다. 예전에는 가방에 넣고 있다가 찍을 때만 꺼냈는데, 이제는 스스럼없이 어깨에 둘러멘 채 돌아다닙니다. 사진을 찍을 때에도 거리낌이 없습니다. 찰칵찰칵 찍습니다. 다만, 언제나 대놓고 찍지는 않습니다만, 같이 어울리고 있는 자리에서는 스스럼없이 집어듭니다. “사진을 왜 찍으셔요?” “지금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아서요.” “아유, 나 같은 사람을 뭐 하러 찍어요?” “할머니 같은 분이니까 찍지요.” “이 쭈그렁 주름살은 나오게 하지 말아요.” “그 쭈그렁 주름살이기 때문에 곱잖아요.”

 

.. 너무 슬퍼서 다시 길을 떠났어요. 종이 인간은 도시의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다가 들판으로 나왔어요. 들판으로 나온 순간, 종이 인간은 너무 행복했어요. 종이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어요. 종이 인간은 자기 호주머니에 새 한 마리가 들어 있다고 상상하며 활짝 웃었어요. 그리고는 들판에 있는 온갖 아름다운 색으로 온몸을 물들였어요 ..  〈42∼44쪽〉


사진기는 늘 들고 다니지만, 단추를 누를 때까지는 시간을 퍽 두어야 합니다. 기다립니다. 제 마음이 맞은편 마음 한 자리까지 스며들도록 기다립니다. 사진기를 늘 들고 다니고 있음을 맞은편에서도 느끼게 한 다음, 이 사진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그때 바로 집어듭니다.

 

사진에 담기는 분들은 모두 내 이웃이요, 그분들한테 저 또한 이웃입니다. 사진에 담기는 분들은 모두 내 식구이자 동무일 수 있습니다. 그분들한테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만히 귀담아듣고, 저도 제 나름대로 제 삶을 가만히 이야기로 들려드립니다. 오고 갑니다. 가고 옵니다.


〈5〉 <종이 인간>이라는 그림책


그림책 <종이 인간>을 봅니다. 꼭 알맞는 길이로 글이 담겼고 그림이 실렸습니다. 어린아이들 누구나 따라 그릴 수 있을 만치 가볍게 그렸습니다. 가벼운 그림이면서도 오래도록 이 땅 아이들을 살펴보지 않았다면, 차근차근 이 땅 삶터와 세상을 헤아리지 않았다면 빚어낼 수 없었을 그림입니다. 가벼운 그림이 가장 그리기 어려운 그림이기도 할까요?

 

‘종이 사람’이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신문’이기도 하고 ‘글쟁이’이기도 합니다. ‘방송’이나 ‘인터넷’이 될 수도 있겠지요. 이 ‘종이 사람’,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하자면 ‘언론’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내고 있을까요. 이 ‘언론’에 담기는 이야기들은 얼마나 우리 삶을 헤아리고 있을까요. 우리 삶터와 세상은 얼마나 굽어살핀 뒤 담아내고 있을까요. 얼마나 이 땅 사람들 가까이 다가와서 이야기를 건네고 있을까요.

 

‘언론’에 마주하는 우리들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나요. 어떤 이야기를 찾고 있나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가슴으로 받아안나요. 우리들은 ‘언론’에 무엇이 담겨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우리 살아가는 모습 가운데 어떤 모습이 언론에 담길 만하다고 느끼나요.


.. 새롭고 아름다운 단어들로 머리속을 채워 나갔어요 ..  〈45쪽〉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누가누가 당선가능성이 높다느니 지지율이 얼마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넘칩니다. 지난 선거에도, 지지난 선거에도, 지지지난 선거에도, 지지지지난 선거에도 그랬습니다. 다음 선거도 마찬가지일까요? 다다음 선거도 판박이일까요? 다다다음 선거도 돌림돌림이 될까요? 다다다다음 선거도 한결같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고, 우리는 어떻게 지내야 잘산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돌아보고 내다보고 톺아보며 함께 얼싸안거나 부둥켜안거나 껴안을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대통령 후보는 없을까요. 아니, 대통령 후보가 이런 말을 꺼내지 못한다면, 대통령 후보들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도록 간지럽히거나 꼬집거나 들쑤실 수 있는 ‘언론’은 없을까요. 아니, 언론이 대통령 후보를 파헤치지 못하는 모습을 깨닫고는, 언론이 언론다울 수 있도록 다그치는 우리들, 백성들, 시민들, 서민들, 국민들, 민중들, 보통사람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덧붙이는 글 | 우리 어른들이 살아가는 그대로 아이들 눈에 보여지고 마음에 가 박힙니다. 아이들이 어떤 잘못이나 범죄를 저지른다면, 모두들 우리 어른들이 저지른 잘못과 범죄 때문입니다. 이를 제대로 깨달아서, 누구보다도 우리 스스로 참다운 이야기를 찾고, 참다운 삶을 찾으며, 참다운 모습으로 일과 놀이를 즐길 수 있어야 좋다고 느낍니다. 그림책 <종이 인간>은 아주 조곤조곤 이런 이야기를 베풀어 주고 있습니다.


종이 인간 - 해나라 어린이책 8

페르난도 알론소 글 그림, 권미선 옮김, 해나라(2002)


#그림책#페르난도 알론소#종이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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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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