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28일 목요일, 순례 6일째, 21km, 오전 6시 40분 출발, 오후 2시 도착.아침이다. 문득 뭐에 쫓기듯 짐을 싸기 시작했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여럿이 함께 쓰고 있는 방에서 부스럭거리는 것이 미안해 대충 랜턴 불빛에 의지해 짐을 구겨 넣고 1층의 식당으로 옮겨왔다. 벌써 몇몇 순례자들은 숙소 밖에서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팜플로나에서 내 짐을 맡아주고, 함께 핀초스를 먹었던 스페인 모녀 순례자들도 있었다. 나는 덜 깬 잠에 눈을 부비며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해도 안 떴는데…, 굉장히 빠르시네요."
"응. 우리는 항상 아침 일찍 출발하고 또 일찍 도착하지."조금 후 시계를 보니 6시, 아침식사를 마치고 걷기 시작했다. 이 날 언니들과 함께 걷기 시작했는지 나 혼자 걸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상할 노릇이다. 생각보다는 큰 마을이었던 에스테야를 지나, 오르막을 걷다 독일에서 온 S를 만났다. 큰 키에 듬직한 체격을 가진 세 아이의 어머니였다. 이 길을 걷겠다고 하자 경찰인 남편은 적극 환영하며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지지해주었단다. 매일 휴대전화를 통해 자신의 길을 알리고, 또 남편과 아이들의 응원을 받고 있었다.
"초반에 너무 무리를 했나봐. 아니면 독일에서 지낼 때엔 이렇게 오래 걷는 일은 없어 그런지, 다리가 좋지 않아서 고생을 많이 했어. 이제 빨리 걷지 않으려고. 아니, 빨리 걸을 수도 없겠지! 하하하~"우리들은 함께 '아라체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Monasterio de Santa María del Irache)'에 도착했다. 한 쪽에서는 비노가, 다른 한 쪽에서는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로 유명한 곳이다. 우리는 물병을 꺼내 주저 없이 비노가 나오는 수도꼭지를 돌렸다. 수도를 한 번 돌리면 나오는 비노는 두 세 모금을 마실 정도의 적은 양이다. 아마 물처럼 콸콸 나오면 순례자들이 모두 취해버려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될 테니 이렇게 해 놓은 건지 모르겠다. 달콤한 비노로 가볍게 목을 축이고, 우리는 다시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묵묵히 걷고 있는 우리 앞에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금빛 밀밭에 다홍 양귀비꽃이 흩뿌린 듯이 피어 있었다. 아니, 양귀비 꽃밭에 밀이 듬성듬성 나 있었던 걸까? 이 풍경을 내 눈으로 볼 수 있을 줄이야!
수 년 전 디자이너 한호림의 책에서 본, 책의 두 면을 가득 채웠던, 뇌리에 깊게 남아 있는 붉은 양귀비 꽃밭의 사진이 떠올랐다. 같은 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고 싶어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눌렀지만, 프레임 속에 갇힌 풍경은 내 눈에 담긴 그것과 같지 않았다.
S의 진솔한 인생 이야기, 그리고 다 정리되지 못한 나의 이야기들이 아마폴라 가득한 밀밭 사이로 녹아들어가면서 내 마음 귀퉁이는 어지러웠다. 알 수 없는 느낌들이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그녀를 앞질러 걷고 있었다.
'괜찮아. 나는 천천히 걷고 싶으니까. 먼저 가렴. 숙소에서 만나면 되지."
"네, 그럼 먼저 갈게요!"
나는 서두르고 있었다. 나를 기다리는 것은 없었다. 내가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눈을 빼앗기다가도 금세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하며 발길을 재촉한다. 그러나 점점 다리는 무거워지고 있었다. 뜨거워지는 태양과 어지러운 머리, 아마도 공짜 비노를 너무 많이 마셨나보다.
아침에 마시는 술은 좋지 않은 것 같다. 피곤하다. '비상식 땅콩을 미리 사 놓지 않아서 힘이 떨어졌나.'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이유를 들어가며 이해를 하려고 해 봐도 걸음은 힘겨웠다. 그늘 한 점 없이 이어지던 벌판에서 일본인 S씨를 만났다. 그녀는 길 옆에서 땡볕을 등지고 쉬고 있었다. 뜨겁지 않느냐는 나의 질문에 "이렇게 있으면 등으로 따뜻한 기분이 참 좋아"라고 답한다.
그 말의 울림이 달콤했다. 쉼 없는 걸음에 지쳐버린 나는 '에라 모르겠다' 그녀 옆에 쌀푸대 돗자리를 얌전히 깔고 앉았다. 우리는 따뜻한 햇빛을 등진 채로 멍하니 길을 바라보았다. 순례자들은 우리를 스쳐 부지런히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올라!(안녕)'를 주고받았다. 미지근한 바람이 머리칼을 날리고, 하늘에는 작은 새들이 유려한 선을 그으며 비행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도화지에 붓으로 가볍게 내리긋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기, 츠바메(燕)가 보이니?"
"아, 저 새요? 쟤 이름이 일본어로 츠바메예요? 계속 자주 봤던 것 같아요."
"응. Swallow, 제비지. 난 저 새를 보면 힘이 나. 저 새의 날갯짓을 보면 걷고 싶은 기분이 들어."
"그렇구나…."
몇 분간 쉬고, S씨는 짐을 꾸렸다. 나는 좀 더 쉬고 싶었고, 점심을 먹고 싶기도 했다. 그녀는 여전히 버거울 듯한 가방을 짊어지고 길을 나섰고, 나는 조금 더 멍하니 있다가 느닷없이 먼지가 뿌연 흙길 위에서 샌드위치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어제 큰맘을 먹고 산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실험하고 싶었다. 20분을 낑낑대며 참치 캔을 따고 토마토를 썰어 샌드위치를 만들 동안, 내 앞으로 꽤 많은 순례자들이 지나갔다. 즉 침대가 줄어들고 있다는 신호였다.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고, 동시에 샌드위치를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 황야(?)에서 만들어 먹은 참치토마토 샌드위치는 지금까지의 어떤 것보다도 맛있었다.
목적지를 1시간 여 앞두고 있었을 때, 그늘이 드리워진 풀밭이 나타났다. 지겨운 햇빛을 걷다 만난 쉼터라,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이미 몇몇은 짐을 풀고 일광욕을 즐기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그 가운데 스페인 소녀, C가 있었다. 나는 그녀 옆에 짐을 던져놓고 그대로 누워버렸다. 앞으로 한 시간 후면 숙소에 도착인데, 이렇게 자고 있다가는 오늘도 2층 침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자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렇지만 지금은 그저 이 풀밭에 눕고 싶었다. '에라 모르겠다아~'하고 내뱉은 한숨에 C는 빙긋이 웃는다. 까만 긴 바지 위로 내리쬐는 태양에 다리가 뜨거워 부스스 눈을 떴다. 달콤한 잠이었다.
목적지인 '로스 아르코스(Los Arcos)'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나는 완전히 지쳐버려 숙소로 향했고, 때마침 숙소에서 나오는 언니들과 마주쳤다.
"일찍 출발한 것 같던데, 늦었네?"
"우리 상점에 장 보러 가는 길이야. 이따 2시부터는 문 닫잖아. 빨리 가서 뭐 좀 사 두려고."나 역시도 급히 상점으로 가서 땅콩을 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오늘 걸음이 힘들었던 것이 그동안 항상 갖고 있었던 비상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나보다. 그렇지만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니었는데, 상점은 저녁에도 문을 여는데, 나는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완전히 지쳐버린 채로 샤워를 마치고 빨래를 널고, 언니들과 오늘 저녁을 이야기하고 한숨을 돌렸다.
'오늘이 제일 힘든 날이었던 것 같아, 땡볕을 걷는 것은 정말 힘들구나. 이래서 이 나라 사람들이 시에스타를 하는가봐. 움직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데! 어휴….'
시간은 바람같이 흘러간다. 우리는 저녁으로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순례자 미사와 시간이 맞아 참석했다. 신부님께서는 미사가 끝나고 우리들을 하나하나 불러 '순례자의 기도'가 담긴 작은 카드를 주시며 축복을 해 주셨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술 한 잔 해야죠?"
아무리 봐도 함께 방을 쓰는 이들의 코골이가 심상찮을 오늘, 나는 언니들을 꼬드겼다. Y언니가 마셔 보고 맛있었다던 맥주와 레몬 맛 청량음료를 섞은 술을 만들어 저녁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저녁 숙소에서 C와 한 남자를 만났다. 네덜란드 출신의 투어가이드라는 D, 아시아인인 우리에게 중국어를 할 수 있냐고 묻는다. 그러고보니 S씨가 중문을 전공했지!
"S씨랑 얘기해보면 되겠네요! 일본분이신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예요. 우리 식당에서 술 한 잔 할 건데, 함께 마실래요? C, 너도 같이 마시자!"그렇게 우리는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자취를 감췄던 D는 어느새 커다란 맥주병 두 개를 들고 온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달랑 한 병으로 되겠냐면서. 건배! 간빠이(乾杯)! 살루떼(Salute)! 각자의 언어로 오늘의 노고를 치하하고, 내일의 길을 이야기했다.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더듬더듬 중국어를 하는 D와 그를 가르치는 선생님 같은 S씨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그네들 사이에서 맥주를 기울이는 동안 하나 둘 언니들은 침대로 돌아갔고, 나 역시도 피곤함이 밀려와 내일을 기약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점점 걸음이 힘겹다. 그리고 내 안에서 알 수 없는 서두르는 마음이 먼지처럼 일어난다. 언니들과 함께인 것이 좋지만 어느새 나를 앞질러가 있는 그녀들을 대하는 것이 어색하다. 한밤 중 귀마개가 빠지면 어디서 전쟁이라도 난 듯 부지불식간에 들리는 코고는 소리도 이제는 피곤하다. 과연 남은 날들을 걸어낼 수 있을까, 여기서 포기하면 내가 우습잖아. 모든 것이 피곤하다.
혼자가 되고 싶다. 혼자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