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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눈 내린 치악산의 눈꽃 풍경 첫눈 내린 다음 날 오른 치악산의 주봉인 비로봉 정상은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정상부근의 나무들은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눈꽃이 피어 아름다운 눈꽃 축제판을 펼쳐놓고 있었다.
ⓒ 이승철


“이번 산행은 포기하는 게 어때?”
“우리 나이에 눈길산행은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서울을 출발하기 전 승용차에 오른 일행들이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서울 인근의 낮은 산, 그것도 평탄한 코스의 청계산은 눈 쌓인 겨울철에도 더러 올랐었지만 악산으로 소문난 1천 미터가 넘는 큰 산을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행들의 염려와는 반대로 전날 밤 몰아친 추위와 함께 내린 첫눈은 내게는 그냥 설렘이었다. 해마다 이맘때쯤 내리는 첫눈은 대개 그냥 이름뿐이었다. 말이 첫눈이지 실제로 쌓여 있는 눈을 볼 수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설렘으로 맞이한 올겨울의 첫눈

그런데 올겨울 첫눈은 달랐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으로 내다본 눈 내린 풍경은 제법 소담스러웠다. 아파트 창문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산동네 지붕 위의 모습이 새하얗고, 뒷동산의 모습도 기대할만 했던 것이다.

“눈이 제법 많이 내린 것 같던데 괜찮을까? 험한 산이라면서 무리하지 말고 산행을 연기하면 좋을 것 같은데.”

내 설렘을 알아채지 못한 아내 역시 우선 걱정부터 하며 말린다. 그러나 일행들과 함께하기 시작한 전국 100대 명산 순례의 18번째 산인 치악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산이었다. 국립공원이라면 그만한 안전시설은 틀림없이 해놓았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믿음이었다.

더구나 일행들에게 눈길 산행의 필수품인 아이젠을 꼭 갖고 오라고 당부까지 해놓았으니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다만 날씨가 문제였다. 등산 당일 날씨가 눈보라가 치는 악천후가 된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창문 밖으로 내다보이는 하늘은 전날 밤의 우르르 쾅쾅 요란스럽던 찌푸린 날씨가 아니라 청명하기 짝이 없었다.

 눈부시도록 황홀한 정상 나뭇가지에 피어난 눈꽃
눈부시도록 황홀한 정상 나뭇가지에 피어난 눈꽃 ⓒ 이승철

걱정하지 말라고 아내를 안심시키고 길을 나섰다. 잠실 올림픽공원역에서 만난 일행들은 처음에는 망설이는 기색이었지만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는 내 말을 믿고, 승용차를 몰아 강원도 원주로 향했다.

문막 휴게소에서 잠깐 쉬며 돌아본 주변의 산들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고, 나뭇가지들은 눈꽃이 피어 여간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었다. 고속도로는 상태가 매우 좋았다. 그러나 원주를 지나 새말 나들목으로 빠져나간 승용차가 치악산 밑에 있는 구룡사를 향해 달리는 길은 전혀 달랐다. 전날 밤 내린 눈이 쌓여 있거나 길바닥에 눌러 붙어있어서 빙판길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젠을 빌려준 구룡사입구 고마운 가게 아저씨

“자! 출발이다. 아이젠은 모두 틀림없이 가져왔겠지?”

조심스럽게 차를 몰아 구룡사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운 후 제일 중요한 안전장비를 다시 한 번 체크하기 위해 일행들에게 물었다.

“난 아이젠이 없어서 그냥 왔는데, 오늘 같은 날엔 저 가게에서 아이젠을 팔겠지?”

일행 한 사람이 머리를 긁적이며 주차장 근처에 있는 가게로 걸어갔다. 아차! 큰일 났구나 만일 저 가게에서 아이젠을 팔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나도 순간적으로 그런 걱정을 하며 그 일행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몇 개의 가게들이 나란히 서있는 근처에 이르렀지만 등산용품을 파는 가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때 앞서간 일행이 잡화를 파는 가게 주인과 함께 문밖으로 나온다. 그런데 가게 주인아저씨의 손에 아이젠 한 개가 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오늘은 웬일인지 아이젠을 파는 사람이 아직까지 나오지 않는군요. 이 아이젠을 빌려드릴 테니 등산을 마치고 돌아가실 때 꼭 돌려주고 가셔야 합니다.”

천만 다행이었다. 또 정말 고마운 아저씨였다. 난생 처음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들에게 아이젠을 선뜻 빌려주다니. 비록 값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그런 호의가 어디 쉬운 일이던가.

우리들은 틀림없이 돌려드리겠다고 다짐을 하고 다른 일행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골짜기는 고즈넉한 정적에 쌓여 있었다. 사람 발자국 하나 찍혀있지 않은 구룡사 화장실 앞 넓은 마당을 지나 세렴폭포 갈림길에 이를 때까지 산에 오르는 사람은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우리들은 뽀드득 뽀드득 쌓인 눈을 밟으며 산길을 걸었다.

 골짜기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이 꽃처럼 아름답다
골짜기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이 꽃처럼 아름답다 ⓒ 이승철

세렴폭포로 가는 삼거리 다리 앞에서 잠깐 쉬며 간식을 먼저 먹기로 했다. 모두들 집에서 일찍 나왔기 때문에 아침을 간단히 먹은 지 벌써 5시간이나 지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간식을 먹고 있는 사이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등산객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는 혼자였다.

우리들이 다섯 명씩 뭉쳤으면서도 염려하는 눈 속의 산행을 혼자 하겠다고 나선 사람을 보며 일행들이 혀를 내두른다. 그에게 혼자 외로울 텐데 우리들과 함께 하자고 제의를 하며 간식을 같이 들자고 권했다.

처음에는 사양을 하던 그도 우리들과 같이 간식을 들며 자신이 가지고온 과일도 함께 먹자고 내놓는다. 그는 원주에 사는 사람이었는데 이 치악산을 자주 찾는다고 했다. 든든한 동행이 생겨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힘들고 아슬아슬한 눈 덮인 능선 길

그런데 개울을 가로지른 아치형의 다리를 건너자 두 갈래 길이 나타났다. 오른편은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이요, 왼편 길은 곧장 능선을 타고 오르는 길이었다. 원주에 산다는 등산객에게 물으니 왼편이 조금 더 힘들기는 하지만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우리들은 왼쪽의 능선 길을 택했다. 답답하게 시야가 막힌 골짜기보다는 눈길이 시원하게 열린 능선 길을 모두들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길은 시작부터 계단 길이었다. 나무계단과 철계단이 계속하여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이쿠, 힘들어! 도대체 왜 이렇게 계단이 많은 거야?”
계단 길을 싫어하는 일행들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가파른 길에서는 그래도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훨씬 안전한 거야.”
그럴 것이다. 계단이 설치되어 있지 않으면 눈 덮인 산길이 얼마나 더 위험하겠는가.

일행들은 얼마 오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친 표정들이 역력했다. 오르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계단 길 때문이었다. 우리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 원주에 산다는 등산객은 얼마나 답답할까 싶어 앞서 올라가라고 권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구룡사 삼층탑과 대웅전
구룡사 삼층탑과 대웅전 ⓒ 이승철

그렇게 느릿느릿 올라가고 있는 우리들을 지나쳐 몇 사람인가 산을 올랐다. 그런데 그들은 대부분 나홀로 등산객이었다. 조금 더 올라가자 모처럼 40대 중반쯤의 부부로 보이는 커플이 역시 우리들을 앞질러 올라갔다.

“여기 상당히 위험하다. 모두 조심해서 올라와!”

그렇게 허위허위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앞쪽에 날카로운 바윗길이 나타난 것이다. 그곳에 먼저 도착한 일행이 조심해서 올라오라고 경고를 한다. 바윗길은 상당히 험한 모습이었지만 한쪽에 철제 울타리가 세워져 있었다.

“아니 이런 바위도 쩔쩔매는 실력으로 옛날 군대 생활할 때 유격훈련은 어떻게 받았나?”
나이를 먹어도 언제나 빠지지 않는 것이 군대 생활 이야기인데, 등산길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방위병 출신의 일행이 하사관학교 출신의 일행에게 하는 말이다.

“너도 내 나이 되어 보아라. 나이 먹으면 다 어쩔 수 없는 법이다.”
이번에는 공군에서 40개월 동안이나 군대생활을 했다는 일행이 거들고 나선다. 실제 나이는 모두가 거의 같은 또래들이다.

힘들고 약간은 위험해 보이는 바위를 그렇게 실없는 농담으로 어렵사리 올라서보니 이곳이 바로 사다리병창길이었다. 사다리 병창길이란 거대한 암벽군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되어 있고, 암벽사이에 자라난 나무들과 어우러져 매우 독특한 풍광이 병풍처럼 펼쳐져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병창’은 영서지방의 방언으로 벼랑이나 절벽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눈 덮인 산길을 뚫고 홀로 산에 오른 등산객들

능선 안부에 올라서자 멀고 가까운 산줄기들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는 모습이 우람하고 추워 보인다. 맞은편의 산자락은 소나무들이 빽빽한데 그 소나무들도 흰눈을 덮어쓰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한참을 더 올라가 다시 간식을 들며 쉬고 있을 때 앞서 올라갔던 40대 부부가 내려오다가 인사를 한다. 왜 정상까지 가지 않고 그냥 내려오느냐고 묻자 아이젠도 가져오지 않아서 위험하고, 옷도 얇아서 추워 얼어 죽을 것 같아 그냥 내려오는 길이라며 빨개진 얼굴로 총총히 내려간다.

 비로봉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길의 눈꽃 풍경
비로봉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길의 눈꽃 풍경 ⓒ 이승철

다시 얼마를 더 올라가자 정상 봉우리 밑이다. 그동안 힘들게 올라왔지만 정상이 바로 눈앞에 보이자 일행들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때 우리들 앞에 여성등산객 한 명이 나타났다. 그런데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그녀도 혼자다.
“조금만 더 올라가시면 됩니다. 힘내세요.”
인천 영종도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여 산에 올랐다는 그녀는 전혀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너무나 당당한 모습이었다. 산 정상에 먼저 오른 몇 사람이 있지만 정상은 너무 추워서 서둘러 내려오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아! 황홀한 비로봉의 눈꽃이여! 그러나 칼바람은 너무 춥구나

여성등산객의 격려 때문이었을까, 모두들 자신감이 생겨 거뜬하게 정상에 올랐다. 그런데 정상으로 오르는 바로 밑 계단 길과 산자락에 펼쳐진 눈꽃 세상이 정말 황홀하다. 잎이 모두 져버려 앙상하던 나뭇가지들마다 새하얀 눈꽃이 피어난 모습이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히야! 정말 황홀하다. 세상에 이런 경치가 다 있다니.....”
평소 여간해서는 감탄을 하지 않던 일행의 입에서 저절로 터져 나온 감탄사였다. 모두들 주변의 경치를 둘러보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정상에는 세 개의 돌무더기가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한쪽 바위 위에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치악산 비로봉 해발 1288미터”

비로봉정상에서 바라보는 전망 또한 일품이었다. 사방은 그야말로 일망무제로 시원하게 열려 있었다. 주변의 어느 산도 비로봉보다는 모두 낮았기 때문이다. 저 아래로 원주시가지가 아스라히 보이고 줄기줄기 이어진 산줄기들이 하얀 눈을 덮어쓰고 있었다.

“이 칼바람 속에 어떻게 나뭇가지에 붙은 눈들이 저렇게 고운 모습으로 견뎌내고 있을까?”
정상에 몰아치는 바람결은 송곳처럼 싸늘했다. 카메라를 꺼내 몇 커트의 사진을 찍는 동안 손이 얼어 극심한 고통이 엄습했다. 그야말로 칼바람이었다.

“어! 추워!  빨리 내려가자고, 조금만 더 있다간 얼어 죽겠어.”
아무리 좋은 경치도 극심한 추위 속에서는 여유롭게 감상할 수가 없었다. 모두들 능선 길에서부터 두둑하게 옷을 챙겨 입고 있었지만 뼈 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추위를 견뎌내기는 정말 힘이 들었던 것이다.

 비로봉 정상의 눈꽃과 돌탑
비로봉 정상의 눈꽃과 돌탑 ⓒ 이승철

하산은 골짜기 길을 택했다.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은 역시 계단 길이었다. 그 계단 길 주변에도 환상적인 눈꽃들은 여전히 새하얀 축제를 벌여놓고 있었다. 소방감시초소 근처에 이르자 바람도 잔잔하고 추위도 별로 느낌이 없어졌다.

산꼭대기와 계곡의 기온차이는 실로 대단했다. 골짜기에서는 모두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낸다. 또 다른 모습은 골짜기는 능선보다 훨씬 두터운 눈으로 덮여 있다는 것이었다. 바람에 날려 온 눈이 계곡에 쌓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계곡 길은 대부분 너덜바위 길이었는데  눈으로 덮여 있어서 걷기가 여간 위험하고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모두들 조심조심 골짜기를 타고 내려와 구룡사에 이르니 어느 듯 해질녘이다. 옛날 의상대사가 9마리의 청룡이 살고 있던 못에서 그 용들을 몰아내고 절을 세웠다는 전설이 간직된 구룡사는 여전히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치악산#비로봉#구룡사#눈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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