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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벌의 공습

 

산골 마을에 살면 여러 야생 동식물과 더불어 살기 마련이다. 사실 그 맛에 산다. 내 글방 처마에는 이른 봄부터 여태까지 땅벌이 집을 짓고 살고 있다. 도시에서 내려온 친지들이 그것을 보고는 크게 걱정을 하면서 에프킬러 같은 살충제를 뿌린 뒤 떼어버리라고 방법까지 일러주었건만 그대로 두고 살고 있다.

 

내가 겪어보니까 사람이 건드리지 않는 한 저들이 먼저 덤비지는 않았다. 저들도 이 세상에 살자고 태어나 내 집 처마 밑에다 둥지를 틀었는데 사람들이 보는 족족 죽여 버린다면 이 세상은 사람만 사는 세상, 곧 사람도 못 사는 세상이 될 것이다.

 

내가 이 마을에 내려온 첫해 이른 가을이었다. 텃밭에서 고추를 따서 햇볕에 말리고자 마당 평상에 널었다. 마침 옆집 노씨가 호미를 빌리려고 왔다. 노씨는 나에게 고추를 그대로 말리지 말고 가위나 칼로 반을 잘라야 더 잘 마른다고 일러주고 갔다. 아닌 게 아니라 고추를 한 열흘 말려도 잘 마르지 않았다.

 

노씨가 간 뒤 안방에서 가위를 찾고는 안채 출입문을 ‘꽝’ 닫았는데(문이 잘 닫히지 않기 때문에), 갑자기 '왱'소리가 나더니 내 정수리와 귓바퀴 뒤에 불똥이 떨어졌다. 나는 그 충격에 그대로 쓰러졌다. 한참 뒤 정신을 차려 살펴보니 출입문 바로 위에 땅벌 집 벌들이 문을 닫는 충격과 문짝소리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세 마리 땅벌이 가미가제 특공대 식으로 대침을 내 머리 정수리와 귓바퀴 뒤에 꽂은 것이다.

 

이따금 땅벌에 쏘여 목숨을 잃었다는 보도가 빈말이 아닌 듯하였다. 바닥에는 땅벌 세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비록 나에게 엄청 고통을 준 놈들이었지만 곰곰 생각하니 그 충성심과 의기를 찬양치 않을 수 없었다. 제 집이 위태로울 때 목숨을 바쳐 집과 남은 가족을 지키는 게 가장으로서 바른 도리가 아니겠는가.

 

순간 나는 땅벌 세 마리의 시체 위에 안중근 의사, 왕산 허위 선생, 윤봉길 의사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분들은 나라가 외적에게 침략 당하자 땅벌처럼 외적의 정수리에 대침을 놓고 불꽃처럼 산화했다. 나는 그 세 놈이 기특해서 그 시신을 수습하여 땅에 깊이 묻어주었다.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는 게  백성의 도리요, 의무다. 그런데도 이런 미물보다도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듯하다.

 

모든 동물에게는 제 영역이 있다

 

땅벌만 그런 게 아니다. 모든 야생동물은 제 영역이 있고, 다른 무리가 제 영역을 침범해 오면 죽기 살기로 싸워 쫓거나 아니면 굴복시켜 자기편으로 만든다. 내 집고양이 카사도 올 봄부터 집밖에 내다 키우자 곧 이곳 야생 고양이가 쫓아와 무차별 공격을 했다. 그 야생고양이는 덫에 한 다리를 잃은 불구였지만 그래도 몹시 재빨랐다. 내가 막대기로 야생 고양이를 쫓아 위기를 넘겼다. 나는 다시 카사란 놈을 집안에서 키우자고 하였더니 아내는 그것도 제 놈의 운명이라면서 제 놈이 그 놈과 싸워 이기든, 아니면 그놈에게 굴복하든 이제는 제 힘대로 살도록 내버려두라고 했다.

 

그 말이 일리가 있어 그대로 두고 지켜보니까 내 집 고양이 카사는 야생 고양이에게 마침내 굴복했다. 그때부터 그들 사이에서는 영역에 대한 타협을 본 듯, 그 뒤로 두 고양이는 죽기 살기로 다투지 않았다. 우리 집 고양이는 멀리 가지 않고 지금도 늘 집 언저리만 맴돌고 있다. 아마도 야생 고양이가 카사에게 내 집 언저리만은 양보해 준 모양이었다.

 

비단 고양이 세계만 그런 게 아니다. 까치도 까마귀도 멧돼지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인간 세계야. 각 민족은 고유의 영토가 있었다. 그 영토 위에다 나라를 세워 살아왔다. 외적이 내 나라 영토를 침범하면 죽고살기로 싸워 외적을 물리치는 게  백성의 도리요, 의무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외적과 싸워 목숨을 바친 선열 덕분으로 이 나라를 지켜왔다. 그리고 외적이 물러가면 목숨을 바친 선열을 가장 귀하게 모시고, 그 일에 동참한 이나 그 후손이 정권을 잡거나 대우받았다. 그것이 정의인 것이다.

 

나는 최근 10년간 독립투사나 그 후손 여러 분을 취재한 일이 있는데, 그때마다 울분을 느끼고 매우 안타까운 점은, 그분들이 역사의 주역은커녕 아직도 뒤안길에서 헤매고 있었다.

 

임시정부 버팀목 차리석 선생의 아들 차영조씨는 차(車)씨인데도 신(申)씨로, 장국밥집 막일꾼, 아이스케이크 장수로 연명하였고, 임시정부 군사위원(현, 국방부 장관) 현익철 선생의 외손녀는 아직도 페인트 통을 들고 다녔다. 13도 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손자 허블라디슬라브, 허게오르기는 해외에서 유랑민으로 살다가 100년 만에 귀국했지만 정작 고향에서는 내 몰라 하고 있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해방 후 16번의 대통령을 뽑았고, 이제 17번째 대통령을 뽑고자 바야흐로 선거 열전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은 단 한 번도 정통 독립투사나 그 후손이 대통령이 되지 못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대통령 선거 후보자 가운데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의병이나 독립투사의 후손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시정잡배나 다름이 없는 이도 나라를 살린다고 떠벌이고 있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의원이 삼대를 계속해 오지 않았으면, 그가 지어주는 약을 먹지 않는다(醫不三世 不服其藥)”고 하였다. 무슨 일이든 삼대는 해야 마음 놓고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라의 지도자가 될 후보자 본인은 물론, 그 조상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 근본도 전력도 잘 모른 채 지도자로 뽑았다. 그 결과 그들은 나라와 겨레의 양심과 정의, 그리고 겨레의 복리복지보다 당신이나 패거리들의 잇속만 더 챙겨 아직도 이 나라에는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해방 60년이 지나도록 일제잔재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아우성이다.

 

맹인 백낙구 의병장은 누구인가

 

맹인 백낙구 의병장, 지금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자 홍영기 교수 연구실에 앉아 있다.

 

- 백낙구 의병장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전주의 이족(吏族; 향리, 아전) 출신으로 짐작되는데, 일찍이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농민군을 쫓는 초토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전라도 남쪽까지 농민군을 추격한 공로로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신설된 주사에 임명되었습니다.”

 

- 관군이었다가 의병이 되었군요.
“그런 셈입니다. 사실 그 무렵에는 그런 분이 많습니다. 백낙구는 농민혁명 이후 어수선한 분위기와 썩어빠진 정치의 난맥상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였지만 미관말직에다 혼자 힘으로는 불가항력이라는 점을 깨닫고 아예 관직을 박차고 나왔습니다. 이후 그는 청나라 요동과 심양을 넘나들며 시세를 관망하였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악성 눈병에 걸려 시력을 잃고는 광양의 백운산에 깊숙이 은거하였습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라는 마른하늘에 벼락같은 소식이 산중까지 전해지자 그는 앞을 볼 수 없을지라도 목숨이 살아있는 한, 나라와 겨레를 위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1906년 1월, 장성 기우만이 주도하는 곡성 거의(擧義; 의병을 일으킴)에 참여하였으나 호응이 적어 무산되자 다음날을 기약한 뒤 광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익현이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던 도중에 최익현이 패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발길을 돌렸습니다.”

 

- 시각장애인으로 대단한 투혼입니다.
“백낙구 의병장은 초인이었습니다. 외적의 침략에 당신의 신체장애는 결코 장애물이 아니었습니다. 광양에 돌아온 그는 70의 나이에도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에 견주면 자신의 처지가 더 낫다고 생각하면서 직접 의병을 일으켜 왜놈을 물리칠 방안을 모색하였습니다. 

 

먼저 거의(擧義)에 적극적인 장성의 기우만, 창평의 고광순 등과 연락하여 창의 날짜와 장소를 물색하면서 이전의 의병들이 패전한 원인을 훈련 미숙과 무기 열세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산중에서 의병들에게 일정한 훈련과정을 거치는 게 필요하다는데 다른 의병장과 의견을 모아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위치한 구례의 중대사(中大寺)에 훈련장을 설치키로 하였습니다.

 

백낙구 의병장은 1906년 단행된 관제 개편으로 실직한 향리들을 적극 설득시켜 의병대열에 합류시키는 한편 가을걷이가 끝난 농민들을 모아 1906년 11월 5일, 약 200여 명을 이끌고 구례의 중대사로 갔으나 기우만 고광순 의병장과는 연락 과정에서 날짜가 잘못 전달되어 그들 부대가 도착치 않았습니다.

 

그는 그 길로 광양으로 되돌아가 군아(郡衙; 지금의 군청)를 점령하고 군수를 결박한 뒤 무기와 군자금을 마련하였습니다. 이어 순천을 습격할 계획이었으나 날이 밝아오자 취소하고서 삼삼오오 흩어져 구례로 돌아오다가 구례군수 송대진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곧 바로 순천분파소로 압송되었다가 광주로 이감되어 신문을 받았는데, 신문과정에서 백낙구 의병장은 당신이 의병에 투신한 바를 피력한 게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패군장이 감히 살기를 바라겠는가.

 

“슬프다. 오늘날 이른바 대한국(大韓國)은 누구의 대한국인가. 과거의 을미년에는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가 여러 차례 제 마음대로 군대를 풀어 대궐을 점거하니 만국이 이를 듣고 실색하였으며, 팔도가 원수같이 애통해 한 이래 12년이 흘렀다. 위로는 복수의 거의(擧義)가 없고, 아래로는 수치를 씻는 논의가 없으니 가히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더욱 모욕을 가하여 군대를 끌고 서울에 들어와 상하를 능멸하고서 자칭 ‘통감(統監)’이라 한다. 그 ‘통(統)’이란 것은 무엇이며, ‘감(監)’이란 것은 무엇인가.

 

우리나라 5백년 종사(宗社; 종묘사직의 준말로 나라 또는 국가)와 삼천리강토와 이천만 동포가 이웃나라 적신(賊臣; 도적의 신하) 이토(伊藤)에게 빼앗기는 바가 되었다. 입을 다물고 머리를 수그려 분함을 외쳐보지도 못하고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인가. 이에 백낙구는 스스로의 힘을 헤아리지 않고, 동지를 불러 모으고, 의병을 모집하여, 힘껏 일본인 관리를 공격하여 국경 밖으로 내쫓고, 또한 이토 히로부미를 사로잡아 의병장 최익현 등을 돌려받고자 하다가 시운이 불리하여 전투에 나서기도 전에 체포되었으니, 패군장이 감히 살기를 바라겠는가. 이에 사실대로 말하노라.” [대한매일신보 1906년 12월7일자 ‘敗將口供’을 현대문으로 다듬어 고침]

 

- 당당하고 논리가 정연한 말씀으로 지금 들어도 아주 시원합니다. 그 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백낙구 의병장은 15년형을 선고받아 1907년 5월에 완도군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12월 순종의 특사로 풀려났습니다. 고금도에서 돌아온 그는 전주 의병들과 합류하여 전북 태인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전투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의병들이 백낙구의병장을 부축하여 포위망을 벗어나려 하자, 이에 그는 ‘그대들은 떠나시오. 여기가 바로 내가 죽을 곳이오’라며, 앞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가 ‘백낙구가 여기에 있다’라고 외치는 순간, 일본군 총에서 불이 뿜었습니다. 백낙구는 태인에서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이때가 1907년 섣달이었습니다.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백낙구는 두 눈을 실명하여 전투할 때에는 언제나 교자(가마)를 타고 일병을 추격하였다. 그리고 패할 때도 교자를 타고 도주하다가 세 번이나 체포되었는데, 결국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라고 썼습니다.

 

광양 사람들은 백낙구의 발발한 기운을 못 잊어 하였다고 황현은 글을 맺었습니다. 요컨대, 백낙구는 대한제국기의 유일한 맹인 의병장으로, 그의 감투정신과 반일투쟁은 전남 동부지역의 의병 확산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 후손들이 어디 사는지 모르십니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기회에 직계나 가까운 방계 후손이라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때는 저에게도 알려주십시오.”

 

- 그럼요. 사정이 괜찮으면 같이 찾아뵙시다.
“그러겠습니다.”

 

한 시간 남짓 홍영기 교수의 백낙구 의병장 강의가 끝났다. 강의료 대신 점심을 산다는 게 오히려 염치없이 순천대학교 정문 앞 밥집에서 대접을 받고는, 우리 일행은 곧장 고흥의 기산도 의사 유적지를 찾고자 순천을 떠났다.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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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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