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한국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말한다. 고대의 ‘일부’ 중국인들도 한민족을 그렇게 인식했다고 한다. 고대의 ‘일부’ 중국인들이 한민족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부른 것은, 엄밀히 말하면 한민족 ‘내부’에서 작동하고 있던 예법질서에 착안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의지국 여부는 본래 중국 천자와의 관계에서 판단되는 것이었다. 한민족 내부에서 예법질서가 작동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와, 한민족과 중국 천자 사이에서 예법질서가 작동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상호 별개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민족이 진정으로 예의지국이었는가를 판단하려면, 중국 천자와의 관계에서 한민족 군주가 예법을 제대로 준수했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 근거가 될 만한 것이 바로 전통시대 동아시아 예법질서의 사상적 근간이 된 <예기> 왕제편(王制編)이다. <예기>는 본래 천자와 제후국 간의 예법을 규정한 것이지만, 한나라 이후부터는 중국과 이웃나라 간의 국제질서에까지 확대·적용되었다.
그래서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이웃나라 군주들은 <예기> 왕제편에 규정된 것과 같은 예법을 제대로 준수하는가 여부에 따라 ‘예의 있는 군주’가 되기도 하고 ‘무례한 군주’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군주가 예의 있는 군주가 되면 그 나라 자체가 예의지국이 되는 것이고, 군주가 무례한 군주가 되면 그 나라 자체가 무례지국이 되는 것이었다.
그럼, 중국 황제와 이웃나라 군주의 예법 관계에서 꼭 지켜져야 할 핵심 사항은 무엇이었을까? <예기> 왕제편의 다음 규정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제후는 천자를 대함에 있어서, 해마다 한 번 소빙(小聘)을 하고 3년에 한 번 대빙(大聘)을 하며 5년에 한 번 조근(朝覲)을 한다.”(諸侯之於天子也, 比年一小聘, 三年一大聘, 五年一朝)여기서 ‘소빙’이란 제후가 대부(大夫)를 보내 천자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고, 대빙이란 경(卿)을 보내 인사를 드리는 것이며, 조근(혹은 친조 親朝)이란 제후가 직접 찾아가서 천자를 알현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러한 알현의 기회에 제후국에서 공물을 바치면 천자가 그에 대한 회사(回賜, 답례)를 하였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런 형식을 빌려 공식 무역이 행해졌던 것이다.
위 규정에서 핵심적인 것은 뒷부분에 있는 조근(친조) 의무였다. 이에 따라 제후는 5년에 한 번씩 천자를 알현해야 했고,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이웃나라 군주들 역시 꼭 5년에 한 번씩은 아니라 하더라도 알현의 의무를 원칙상 부담하고 있었다. 군주가 이런 의무를 잘 이행할 때에 그 나라는 이른바 예의지국이 되는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설날에 어른을 직접 찾아뵙는 사람을 예의바른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것도 동아시아의 전통의 예법질서로부터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하더라도 윗사람을 단 한 번도 찾아뵙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근본을 모르는 사람’ 혹은 ‘무례한 사람’ 또는 ‘아홉 가지를 잘하지만 정작 중요한 한 가지를 못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과거의 동아시아 국제관계에서도 그런 원리가 작동했다.
그럼, 한민족 군주들은 <예기>에 기반을 둔 동아시아 국제사회의 예법질서를 잘 이행했을까?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처럼, 한민족 군주들은 정말로 중국 황제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지켰을까?
위의 소빙·대빙·조근 중에서 소빙·대빙은 군주가 이행하는 데에 별 부담이 없었다. 왜냐하면, 군주가 직접 가는 게 아니라 대부(大夫)급이나 경(卿)급을 파견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민족 군주들은 이 점만큼은 비교적 잘 지켰다. 이런 형태의 알현은 자주 하면 할수록 한민족에게 이로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러한 알현에 수반하여 무역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민족 군주들은 군주가 중국 황제를 직접 알현하는 것만큼은 극력 삼가는 태도를 보였다. 경급이나 대부급을 보낼 때보다도 군주 자신이 직접 가면 더 큰 규모의 무역을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는 반면에, 자기 나라가 중국의 조공국이라는 점을 국제적으로 확인시키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역대 중국 왕조들이 한민족 왕조와 책봉조공 관계를 체결할 때마다 항상 희망했던 것이 바로 이 조근 혹은 친조 형태의 알현이었다. 이웃나라 군주가 직접 찾아오면 더 많은 답례품을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서는 그만큼 경제적 손실이 생길 수밖에 없지만, 일국의 군주가 직접 찾아와서 황제 앞에 절을 하는 장면이 연출되면 중국의 국제적 지위가 그만큼 공고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중국 황제들의 절실한 ‘희망사항’에도 불구하고 한민족 군주들은 ‘한족 왕조’에 대해서만큼은 단 한 번도 직접 알현을 한 적이 없다. 언제나 신하들을 보내는 수준에서만 그친 것이다. 중국 사신이 찾아와서 조근 혹은 친조를 재촉하면, 언제나 머뭇거리면서 나중에 한 번 꼭 찾아갈 것처럼 얼버무리는 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황제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한민족 군주들이 곱게 보였을 리가 만무하다. 그래서 중국 황제들은 언제나 한민족을 ‘다루기 힘든 상대’로 인식하곤 했다.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당나라 태종의 유언), “종래 중국이 조선의 내정·외교에 간섭하기가 수월하지 않았다”(청나라 광서제의 유지 諭旨)라는 중국 황제들의 발언에서 그러한 정서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 실제로는 이러했는데, 중국 황제들이 한민족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인식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일부 중국 역사서에서 한민족을 동방예의지국으로 인식한 기록이 나오긴 하지만, 그런 기록은 아주 먼 옛날에 쓰였을 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의 주류 인식을 반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기록이 쓰일 당시에는 한중관계가 본격화되지 않았던 때였다.
실제적인 한중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은, 한민족 군주들이 단 한 번도 한족 군주를 직접 알현한 적이 없을 정도로 ‘무례’했다는 점뿐이다. 그러므로 한족 황제들의 입장에서는 한민족 왕조들이 모두 다 ‘동방무례지국’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위의 몇 군데에서 ‘한민족 군주는 단 한 번도 한족 황제를 알현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말은 한족 황제가 아닌 사람에게는 알현을 한 적이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도 외국 황제에게 직접 찾아가서 알현을 한 한민족 군주가 있었다.
그 ‘예의바른 한민족 군주’는 바로 1264년에 몽골제국 황제를 직접 알현한 고려 원종(재위 1259~1273년)이었다. 강화도의 항몽 무인정권을 붕괴시키고 고려와 몽골제국의 화친을 성사시키는 데에 큰 공로를 세움으로써 그 덕분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고려 원종은, 몽골제국의 거듭되는 알현 요구에 밀려 한국사에서 전무후무한 친조(親朝)의 기록을 남기고 말았다. 그러므로 동아시아 예법의 측면에서 유일하게 예의바른 한민족 군주가 있다면, 그 주인공은 바로 고려 원종인 셈이다.
그런데 고려 원종이 직접 알현한 대상은 한족 황제가 아닌, 몽골제국의 세조 쿠빌라이였다. 그러므로 한민족 군주가 동아시아 예법 차원의 예의를 갖춘 유일한 대상은 중국이 아닌 몽골제국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실례를 보면, ‘한민족은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중국의 일부 고대 기록은 전체 역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중국 지배층의 주류적 정서를 반영하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그 비주류 중국인들이 파악한 ‘한민족의 예의’라는 것은 한민족 내부에서 작동하던 예법질서였지, 한민족과 중국 사이에서 작동하던 것이 아니었다.
한민족을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부른 소수의 고대 중국인들이 훗날의 한중관계를 직접 관찰했다면, 그들은 아마 ‘한민족은 동방무례지국’이라는 정반대의 기록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도 한민족은 ‘동방의 예의 없는 나라’였다. 적어도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이는 한민족이 무역이나 안보 같은 실용적 필요에서 중국 중심의 예법질서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독립국가의 정체성을 손상시킬 만한 조근·친조 같은 굴욕적 형식만큼은 극력 회피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경복궁 광화문에 들어서면 ‘예법을 흥하게 한다’는 의미의 흥례문(興禮門)이 나온다. 한민족의 군주들은 국내적 차원에서는 예법질서를 흥하게 하려고 했지만,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예법의 핵심을 기피하면서 어떻게든 겉치레만 차리려고 했다. 이런 한민족 혹은 한국을 동방예의지국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