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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4130)에서 촘롱까지

 

[경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 4130)-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 3700)-데우랄리(Deurali 3230)-히말라야(Himalaya 2920)-도반(Dobhan 2600)-뱀부(Bamboo 2310)-시누와(Sinuwa 2360)-촘롱(Chhomrong 2170)

 

나야풀에서 트레킹 7일째, 10월 26일.

 

너무 많은 트레커들이 여기 ABC에 올라와서 어젯밤 가이드와 포터들의 잠자리가 부족했다. 일부는 식당 테이블 위에서 잤고, 먼은 내 방에서 나와 함께 잤다.

 

아침 점심 저녁이 모두 아름다운 안나푸르나

 

새벽 5시, 어젯밤 일찍 떠오른 상현 보름달은 자취를 감추었다. 하늘은 검정에 가까운 코발트 색 우단, 그 위에 다이아몬드 한 줌이 확 뿌려져 있다. 깜깜한 밤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져 내려온다. 총총 박힌 별이 뿜어내는 그 빛에 안나푸르나 사우스(Annapurna South 7219)와 마차푸차레(Machhapuchhre 6997)의 뽀얀 얼굴이 수줍어한다.

 

나는 어제 걸어 올라갔던 롯지 뒤편의 낮은 언덕까지 천천히 걸어간다. 시커멓던 하늘이 푸르스름 밝아온다. 언덕 위 돌탑과 돌탑 사이에 어지럽게 걸린 불교깃발(룽다)이 이슬에 촉촉히 젖어 있다. 휘익 바람이 불자 깃발들이 모두 일어서다가 다시 고개를 숙인다. 새벽의 설산은 나를 경건하게 만든다.

 

날이 채 밝기 전임에도 많은 트레커들이 이 언덕으로 올라오고 있다. 다들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서 저 설산이 보고 싶은 거다. 안나푸르나는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지금 이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그런데 어제 낮과 오후, 밤, 그리고 오늘 아침의 안나푸르나는 그 모습이 다르다. 아침, 낮, 오후, 저녁, 밤의 안나푸르나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거다.

어제 낮과 오후의 안나푸르나는 안개와 운무를 휘감아 자신의 몸을 숨겼었다. 보름달이 환하게 뜬 어젯밤의 안나푸르나는 머리 위에 하얀 구름을 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 새벽 안나푸르나는 드디어 그 자태를 완전히 드러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무척 짧았다. 완전히 해가 떠오른 다음에는 산의 날씨가 급변했기 때문이다. 다시 안개가 몰려왔다.

 

아침으로 토스트와 삶은 계란을 먹고 생강차 한 잔을 마셨다. 아침 8시 반 짐을 꾸렸다. 이제 ABC에서 내려간다. 원래는 오늘 시누와까지 내려갈 생각이었으나 여기 올라올 때 들렀던 촘롱의 롯지가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먼, 오늘 촘롱까지 갈 수 있을까?”

“좀 멀긴 하지만 충분히 갈 수 있어. 촘롱까지 갈까?”

“그래, 그러자. 오늘은 거기서 자자.”

 

어제 인사를 나눈 미국 아가씨 엘런도 내려갈 준비를 끝낸 모양이다. 엘런이 나에게 자신의 친구 케리를 소개한다. 우리는 함께 내려가기로 했다.

 

데우랄리에서 수줍게 그림엽서를 건네던 소녀

 

나는 이날 촘롱까지 가기로 결정한 것을 걸어가는 내내 후회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트레킹 기간 동안 이날 나는 가장 긴 거리를, 가장 오래 걸었던 거다. ABC에서 촘롱까지 25km를 점심 먹은 시간 빼고 8시간 남짓 걸었다.

 

특히 마지막 시누와에서 촘롱 구간은 거의 죽음의 오르막 계단이라 할만 했다. 일단 끝없는 내리막길이 내 마음의 무장을 해제시키더니 다시 그만큼의 오르막 계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돌계단을 하나씩 세면서 올라갔다. 그러나 300에서 좀 더 세다가 결국 포기해 버렸다. 아마 세기를 포기한 이후에도 그만큼의 돌계단을 더 올라간 듯하다.

 

 

오전 10시 경 데우랄리(Deurali 3230)의 샹그릴라 게스트하우스 롯지에 들렀다. 어제 ABC에 오를 때 맡겨둔 짐을 찾아 다시 배낭을 꾸린 후 롯지 마당에 놓인 간이의자에 앉아 블랙티를 한 잔 마신다. 그때 누군가 내 옆에 오더니 “나마스떼” 인사를 건넨다. 돌아보니 꼬마 아가씨가 수줍은 듯 서 있다.

 

“아, 바그와티. 반가워요.”

 

바그와티 구룽(Bagwati Gurung) 13세. 여기 데우랄리 샹그릴라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딸이다. 그는 이틀 전 내가 여기서 묵을 때 유독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주던 소녀였다. 그날 저녁을 먹을 때 나에게 다가온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큰 언니가 지금 한국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국에서 온 내가 무척 반갑다고 했었다.

 

그랬던 바그와티가 이번에는 나에게 그림엽서 한 장을 건넨다. 그가 건넨 라마 불교 그림엽서에는 다만 ‘To Kim Dong Wook'이라고만 적혀 있다.

 

“아~, 고마워요. 바그와티. 잘 간직할게요. 우리 같이 사진 찍을까요? 먼, 우리 사진 좀 찍어줘.”

 

그렇게 나는 바그와티와 나란히 여기 샹그릴라 게스트하우스 식당 문 앞에 앉아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안녕~, 다음에 또 올게. 그날이 비록 언젠가 될지 모르겠지만….’

 

 

슈퍼우먼 엘런과 케리는 네팔 여성의 수호신

 

이제는 걸을 때마다 오른발 엄지발가락의 마디 아래가 따끔따끔하다. 아마 물집이 잡힌 모양이다. 그런데 엘런과 케리, 두 미국 아가씨들은 잘도 걷는다. 특히 케리는 ‘날 듯’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잘 걸어간다. 케리는 거의 초인적인 체력을 보였다. 내 걸음으로는 도저히 쫓아가지 못할 정도다.

 

“엘런, 케리는 슈퍼우먼인가봐. 체력이 넘치네.”

“후후, 그러네. 역시 20대 젊은 몸이라 우리랑 다르네.”

“케리가 20대…? 몇 살인데?”

“스물 셋.”

“엘런, 넌?”

“난 서른하나. 네 가이드 먼바들과 동갑이야.”

 

엘런과 나는 돌계단 하나하나 꾹꾹 눌러 밟으면서 헉헉거리며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등산용 스틱 두 개 중 하나를 엘런에게 건넨다.

 

“이거 써봐. 그냥 걷는 것보다 굉장히 편해.”

 

실제로 오르막은 물론이고 내리막길에서도 등산용 스틱은 아주 유용하다. 나는 ABC 트레킹 내내 한 쌍의 등산 스틱을 써서 네 발로 걸었다.

 

 

거의 탈진할 무렵 드디어 촘롱의 롯지에 닿았다. 언제나 그렇듯 내 귀여운 포터 ‘프리티’가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프리티는 친절하게도 내 방과 그 옆 방, 두 개의 방을 잡아두었다. 자연스럽게 내 옆 방은 엘런과 케리의 방이 되었다.

 

나는 우선 방에 들어가서 땀에 흠뻑 젖은 옷을 모두 벗었다. 속옷까지. 그리고 ‘취침용 속옷’과 체육복 바지, 티셔츠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나서 수건을 들고 샤워실에 들어갔다. 아, 정말 다행이다. 역시 이곳 촘롱의 롯지는 다른 어떤 곳보다 시설이 훌륭하다. 물 온도도 지금까지 그 어떤 롯지의 샤워기보다 따뜻하다. 이 정도면 여기 히말라야 산군에서는 거의 호텔 수준이다.

 

알이 박힌 허벅지와 종아리가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욱신거린다. 프리티는 ‘아야야~, 아야야~’ 비명을 지르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나를 보고 킥킥거리다가 이제는 대놓고 하하 웃고 있다.

 

 

저녁을 먹으면서 나는 엘런과 케리와 좀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들은 현재 네팔 카트만두에 살고 있는 미국인이다. 인권보호 단체(혹은 기관)에 소속되어 네팔에 파견 나와 있는 중이다.

 

“네팔은 여성 인신매매가 빈번한 나라 중 하나야. 우리는 그렇게 팔려가는 네팔 여성들을 구해내어 다시 가족에게 돌려보내거나 직접 보호하는 일을 해.”

 

내 짧은 영어실력 때문에 엘런의 말을 모두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whoremonger(포주)’라는 영어 단어를 여기서 처음 들었다. 당연히 모르는 단어였는데, 케리가 친철하게도(?) 나에게 그 말을 풀어서 설명해 준다.

 

“만약 네가 어떤 여성을 납치해서 사창가에 팔아넘기거나, 그 여성의 몸을 이용해서 돈을 챙기잖아, 그럼 넌 그 여성의 포주가 되는 거야.”

 

나 원 참…. 아주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잘 해줘서 고맙긴 하다만, 기분이 어째 좀…. 그나저나 네팔에 정말 인신매매가 흔한가. 먼에게 정말 그런지 물어봤다.

 

“응, 정말 흔해. 지금도 그런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고, 심지어 부모가 자신의 딸을 그런 식으로 팔아넘기는 경우도 있어.”

 

빨리 진행된 일정... ‘천천히 좀 더 돌아내려가자’

 

네팔 사회의 슬픈 단면이다. 나는 먼의 이 말을 들으면서 문득 70년대 말~80년대 초 한때 전사회적으로 시끄러웠던 우리나라의 인신매매 사건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들 엘런과 케리의 이런 노력이 이 나라에서 얼마나 성과가 있을까. 모르긴 해도 아마 이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아직은 더 많으리라.

 

저녁을 먹고 나니 긴장이 풀리고, 일찍 피곤이 몰려온다. 엘런과 케리 역시 피곤한 기색이다.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물통을 침낭 속 발밑에 밀어 넣는다. 그리고 보온용 내피를 입은 채로 침낭으로 들어간다. 아직 못다 읽은 달라이 라마의 <용서>를 펴들었지만 눈꺼풀이 무겁다.

 

옆 방의 엘런과 케리의 수다가 자장가처럼 들린다. 나는 읽던 책을 덮고 헤드랜턴을 껐다. 그러자 옆 방에서 엘런과 케리가 합창한다.

 

“굿 나~잇, 동욱!”

 

애초 내 계획은 내일 뉴브릿지를 건너지 않고 바로 시울리바잘(Syauli Bazar 1220)을 거쳐 나야풀(Nayapul 1070)까지 간 후 택시를 타고 바로 포카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일정이 빠르게 진행되어 지금은 하루를 벌었다.

 

그렇다면 트레킹 루트를 바꾸어 안나푸르나 산군을 좀 더 돌아내려가기로 한다. 내일은 지누단다(Jinu Danda 1780)-뉴브릿지(New Bridge 1340)-란드룩(Landluk 1565)을 거쳐 톨카(Tolka 1700)까지 내려간다.

 

여행 메모

 

1) 트레킹 할 때 등산 스틱은 아주 유용하다. 가급적 한 쌍을 사용하는 게 좋다. 오를 때는 허벅지와 종아리를 누르는 부하를 줄이고, 내려갈 때는 무릎을 보호한다.

 

2) 롯지에 도착하면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그래야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벗은 옷은 롯지 방 앞에 있는 빨랫줄에 걸어 둔다. 즉, 운행용 옷과 잠자리용 옷은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이 부분은 아주 중요하다.

 

3) 샤워시설이 있는 롯지에서는 반드시 샤워를 하자. 따뜻한 물 샤워가 불가능하다면 롯지 부엌에 부탁해서 뜨거운 물을 받아 몸에 밴 땀만이라도 닦아내자.


#네팔#안나푸르나#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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