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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보다 아름다운 설상가상, 눈 위세 목화꽃, 목화 송이 위에 서리꽃, 추억의 목화송이, 보기만해도 겨울이 따사롭고 포근합니다.
말보다 아름다운 설상가상, 눈 위세 목화꽃, 목화 송이 위에 서리꽃, 추억의 목화송이, 보기만해도 겨울이 따사롭고 포근합니다. ⓒ 윤희경

'설상가상(雪上加霜)'이란 말이 있습니다. '불행이 엎친 데 덮친다'는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말로 '기침에 재채기', '하품에 딸꾹질'이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고속버스 내에서 오줌을 참다 똥을 지린 경우처럼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북한강 상류엔 그동안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고 그대로 하얗게 쌓여 있습니다. 많은 눈 내려 설국(雪國)을 만들어 놓아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 눈을 떠보니 눈 위에 서리꽃(성에) 피어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소나무, 전나무, 갈참나무 숲마다 하얀 상고대 세상입니다. 금방 해가 솟아오르려는 지 자작나무 숲과 낙엽송 밭이 눈부시게 반짝입니다.

 서리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숲 속, 서리꽃이 나무와 풀위에 내려 언 모습을 상고대하 합니다.
서리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숲 속, 서리꽃이 나무와 풀위에 내려 언 모습을 상고대하 합니다. ⓒ 윤희경

겨울이 깊어갈수록 서리방울들은 밤마다 꿈을 꾸며 하얀 꽃으로 피어납니다. 흰 속눈썹을 떨며 그림처럼 다가오는 성에, 새벽을 일으켜 세우며 아침을 기다리는 가녀린 정령입니다. 눈을 비비며 사방을 둘러봅니다.

끝없는 순수 절정, 새하얀 꿈의 사막, 참 깨끗하고 시원한 세상이 아침을 열고 있습니다. 이 찬란한 서리꽃 구경을 제대로 하자면 추워도 서둘러야 제 모습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해가 뜨자마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무너져 내리기 때문입니다.

 모란 위에 내려 앉은 서리꽃
모란 위에 내려 앉은 서리꽃 ⓒ 윤희경

얼음 꽃 소원은 환한 태양의 얼굴을 한 번 보는 것입니다. 태양과의 만남을 위해 밤마다 수정 꽃으로 피어나지만 볼 수 없습니다. 밤중에 피어나 해가 떠오르면 흔적 없이 자취를 감춰버립니다. 꽃이 피면 잎이 지고 잎이 나면 꽃이 무너져 내리는 상사화처럼 안쓰럽기 짝이 없습니다.

태양만 보면 수줍어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태양 앞에선 툭툭 삭아 내리는 한 방울의 눈물이고 구슬이며 가녀린 어린 짐승에 불과합니다. 새벽녘이면 나무 우듬지마다 꽃을 피우고 알몸을 드러내 보지만 서리꽃이 태양을 그리워하기엔 너무나 뜨거운 가슴입니다.

 개울가로 숨어버린 서리꽃
개울가로 숨어버린 서리꽃 ⓒ 윤희경

태양이 솟아오르면 얼음 꽃은 어둡고 습한 계곡 속으로 몸을 숨겨버립니다. 계곡이면 차라리 태양이 없어도 좋습니다. 냇물과 더불어 노래도 하고 눈물을 흘려도 서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벌거벗은 나목들과 늦가을 꽃 진자리에 내려앉은 서리꽃을 보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닙니다. 바싹 말라 입을 다문 꽃자리에 성에들은 불면 날아갈 듯 여리고 시립니다. 입술을 대고 ‘호’하고 뽀얀 김을 내뿜으면 금세 말갛게 녹아내립니다.

 서리꽃, 얼음위에서
서리꽃, 얼음위에서 ⓒ 윤희경

겨울추억이 그리워 해마다 목화 몇 송이를 심습니다. 목화밭을 만들어 가으내 꽃을 보다가 내버려두면 하얀 꽃송이가 그대로 남아 따사로운 겨울이야기 나누자 합니다. 눈 위에 목화송이, 송이 위 서리꽃은 시리도록 하얗습니다. 숫눈, 목화송이, 서리꽃 순백 앞에 어찌 설상가상을 생각해 냈더란 말인가.

오늘처럼 목화송이에 눈이 푹푹 쌓이고 서리꽃 피어오르면, 지금도 그 옛날 사락사락 소리 듣습니다. 어머닌 바지저고리, 버선, 솜이불에 솜을 두둑이 두고 누벼 입히고 덮어주며 좋아라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숫눈 쌓인 그해 겨울은 아무리 찬바람이 불어와도 온몸이 따스해 추운 줄 몰랐습니다.

 눈 위에 목화꽃, 목화꽃 위에 서리꽃 내려 흰색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누가 설상가상을 불행이 겹친다 했을까 싶다.
눈 위에 목화꽃, 목화꽃 위에 서리꽃 내려 흰색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누가 설상가상을 불행이 겹친다 했을까 싶다. ⓒ 윤희경

싸한 새벽공기를 쐬며 서리꽃 구경을 다니다 보니 ‘기침에 재채기’가 나오려고 코가 간질간질해옵니다. 지난여름 비와 장마로 농사가 잘 안 돼 엎친 데 덮치고 덮친 데 엎쳐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러나 올 한 해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난, 내 삶의 여정이 고단하지 않습니다. 인생살이가 별거던가요. 금세 녹아내리는 한 방울의 서리꽃, 조금만 있으면 꽃피는 봄이 또다시 찾아오겠지요. 더 춥워지기 전에 눈 속에 피어난 목화 두어 송이 따내 불씨 하나 피워놓고 긴 겨울을 넘어갈까 합니다.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에도 함께합니다.



#서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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