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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천 년 우리 역사와 민족의 삶을 지탱하고 있는 숱한 익명의 뿌리들 중 땅속 깊이 자리 잡은 든든한 뿌리” (함세웅 신부)

 

“내게 <별들의 들판>을 쓰도록 영감을 주었던 그 첫 번째 베를린 시민” (소설가 공지영)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 활동가이자 끊임없는 자기성찰로 자기를 속이지 않는 구도자” (언론인 홍세화)

 

“나와 함께 있었던 네 시간 때문에 간첩이 된 베를린의 착한 남자” (‘통일의 꽃’ 임수경)

 

이 헌사들은 오직 한 사람에게 바쳐진 것인데, 그 주인공은 바로 <베를린에서 18년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를 쓴 어수갑이다. 이 책을 펼치면 본문에 앞서 만나게 되는 이 헌사들은 인간 어수갑을 평가하는 말이자 동시에 책 내용을 미리 정확하게 요약해서 보여주는 말이다.

 

이 책은 "우리 역사의 흐름을 바로 잡기 위하여 멀리 베를린에서 분투했던 한 착한 사내가 간첩의 누명을 쓰는 시련을 당하고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부단한 자기성찰과 진실한 신앙으로써 구도의 삶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 한 편의 소설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서 지은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담담하면서도 소박한 필치로 써 내려간 토막글 50여 편을 모아 엮은 것이어서, 긴밀하게 꽉 짜인 구성과 잘 다듬어진 문장으로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는 소설 속 이야기와는 사뭇 다르다.

 

하지만 오히려 꾸미지 않은 그런 담담함과 소박함 때문에 그가 경험했던 고통, 분노, 환멸, 좌절, 절망 그리고 다시 품게 된 희망은 보다 진실되게 우리에게 다가선다. 그래서일까, 소설가인 공지영조차도 이 책을 읽고서는 말을 잊는다.

 

"그는 ‘나는 시대의 희생자’라고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는 그냥, 아마도 언젠가 그를 구원해주었던, 눈 덮인 알프스의 귀퉁이에 피어 있던 들꽃처럼 가만가만, 시대의 바람에 흔들리며 나부끼던 자신의 삶을 들려준다. 사랑과 죽음과 빵과 눈물…. 이제는 평화로운 그의 손끝에서 그 이야기들이 여린 피아노 소리처럼 흘러나오는 것이다. 번쩍인다고 해서 다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그냥 그런 생각이 들면서 창가에 잠시 서 있고 싶어진다." (7쪽)

 

2.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그런 느낌에 자주 사로잡혔다. 나보다 열 살 위인 지은이 어수갑이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학교 선배나 집안 형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이름조차도 몰랐던 사람인데 말이다.

 

아마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그의 이름은 낯설겠지만, 사실 그는 1989년 6월에 터진 임수경 방북사건의 주인공이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가 검찰로 보낸 사건송치문에 보면 "제1피의자 어수갑, 제2피의자 임수경"이라 적고 있다. 안기부의 수사 결과에 따르면, 온 나라를 들썩였던 임수경 방북사건의 주인공은 임수경이 아닌 어수갑이었던 것이다.

 

전대협의 평양 축전 참가를 북의 지령에 따른 것으로 몰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명의 간첩과 공작원이 필요했다. 안기부는 평소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던 유럽민협(재유럽민족민주운동협의회)을 배후 단체로 지목하는 한편, 이 단체의 총무이자 기관지 <민주조국>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던 어수갑에게 이 사건을 주도한 ‘공작원’ 혐의를 모두 뒤집어씌운 것이다.

 

그러나 임수경이 지적하는 것처럼, 어수갑은 단지 그녀의 방북을 도와주었을 뿐이다. 아침 9시에 서베를린 공항에 도착한 임수경을 데려다가 자신의 집에서 밥 한 끼 먹이고 오후 1시에 동베를린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까지 바래다준 것이 전부였다. 고작 네 시간에 불과했던 이 짧은 만남은 어수갑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공개 수배자의 신세가 된 그는 그후 10여 년 동안 그리운 고국 땅을 밟을 수 없었다. 그보다 더 그를 가슴 아프게 한 것은 그동안 조국의 민주화와 민족의 하나됨을 위하여 밤을 지새우면서 함께 일했던 동지들과 동료마저도 이제는 그를 슬슬 피하고 연락을 끊었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당시 동독의 붕괴 등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경험한 이념의 덧없음과 이제 자유시민이 된 동독인들의 추악한 행태를 직접 목격하면서 느낀 인간에 대한 깊은 환멸은, 학업마저도 그만두고 운동에 몰두했던 그의 지난 삶을 뿌리째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그런데 치욕뿐인 삶을 끝내고자 오른 알프스 산정에서 그가 마주친 것은 눈밭을 헤치고 피어난 아름다운 들꽃 무리였다. 하잘것없는 생명과의 마주침이었지만 자살 결행을 앞두고 있는 그에게 그 들꽃들은 하느님으로 보였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인간)에게야 얼마나 더 잘 입혀주시겠느냐?' 나는 그만 나도 모르게 눈밭에 무릎을 꿇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온전하게 신 앞에 나의 자만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나를 말없이 감싸 안으셨습니다. 너를 기다렸노라고, 나는 이전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너와 함께 있겠노라고." (283쪽)

 

이렇게 죽음을 바로 코앞에 두고서 영적인 깨달음을 얻은 그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에서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시선을 넓혀 나간다. 그는 보속하는 심정으로 가톨릭 산하 사회복지회 ‘카리타스’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6년 동안 한다.

 

거동이 불편하고 인종적 편견도 심한 병든 독일 노인들을 보살피는 일이란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매우 소모적인 일이었지만, 그는 몸으로 하는 일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하면서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돌본다. 이러한 그의 헌신이 인정받아 1996년에는 ‘모범 외국인’으로 선정되어 로만 헤어초크 독일 대통령의 초대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1999년에는 지인을 통하여 그의 이야기를 자세히 전해 듣게 된 함세웅 신부의 주선으로 마침내 귀국한다. 1981년에 청운의 꿈을 안고 독일 유학을 떠난 지 18년만의 귀국이었다. 그러나 귀국하는 그를 반겨준 것은 그리운 가족들과 고향집보다 국정원의 건장한 기관원들과 삭막한 취조실이 더 먼저였다. 다행히 일주일 동안의 국정원 조사 끝에 그는 10년 동안 그를 짓눌러온 수배자라는 굴레를 벗게 된다.

 

이렇듯 이 책은 역사의 거친 파도에 몸을 실은 한 사내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자랑도 회한도 아닌 진솔하고 담담한 회고담으로 들려주고 있다. 과거의 상처를 보듬으며 곤궁하지만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일상적인 삶을 1부로 하고, 과거로 돌아가 대학 시절을 거쳐 독일로 건너온 후에 펼쳐진 운동가로서의 사회적 삶을 2부로 다루고 있는 뒤바뀐 책의 구성에서도 이러한 그의 겸손함은 엿보인다.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거대담론이 아닌 자잘한 일상생활에서 진리와 원칙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임수경 방북사건이나 제1차 범민족대회 참가를 위한 북한 방문 등 극적이고 흥미진진한 삶의 기록인 2부의 글들보다는, 그 이후 죽음의 유혹을 딛고 일어선 새로운 삶을 통해 깨달은 진지한 성찰과 자잘한 일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담고 있는 1부의 글들이 훨씬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좀 더 넓어지고 깊어진 시선으로 그가 짚어낸 노인 문제, 외국인 이주 노동자 문제 등 독일 사회의 여러 문제와 일상화된 기부 문화, 실질적인 교육 제도 등 독일 사회의 여러 장점들을 언급하고 있는 글들은 한국 사회를 돌아다보는 거울로도 매우 유용하게 읽힌다.

 

그러나 어수갑이 이 책에서 가장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은 거대담론이 아닌 ‘일상의 실천으로서의 혁명’과 냉철한 이념보다 앞서는 ‘가슴 따스한 사람에 대한 신뢰’이다. 자칫 진부하게 들릴 수는 있지만 그의 말은 결코 공허하게는 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쳐서 뼈저리게 체험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머리로만 세상을 골백번 바꾸려는 자들보다는 사과나무 한 그루를 묵묵히 심는 농부의 터진 손등이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혁명인 것입니다." (105쪽)

 

"진정한 운동은 가슴 따스한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냉철한 이성도 뜨거운 가슴과 손발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위선일 뿐입니다. 회칠한 무덤입니다." (132쪽)

 

3.

 

이처럼 이 책은 그가 자신의 삶 전체를 먹으로 삼아 그걸 갈아서 고국으로 써 보낸 긴 편지다. 18년만에 고국에 닿아서 책으로까지 나온 그의 긴 편지를 멀리 외국 땅에서 읽고 있자니, 내 가슴도 먹먹해진다. 먹먹한 가슴에 새겨지는 한 사내의 삶이 너무나 따스해서 책 날개에 실린 그의 사진을 자꾸 들여다본다.

 

그는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에 눈물이 있음을 나는 안다. 외국 생활은 화병의 꽃처럼 뿌리가 잘린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 외국 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에 돌아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시골에서 찻집을 운영하거나 산장지기 노릇을 하면서 벗들을 만나고 글을 쓰며 살고 싶다고 했다.

 

이 책을 내고 이미 3년이 지났으니 지금쯤 그 꿈을 이루었을까? 궁금하여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았으나 그의 근황을 알리는 최근 소식은 없다. 여전히 베를린에서 주어진 일상에 감사하며 고국을 그리워하고 있으리라. 그가 간절히 소망하는 삶이 오래지 않아 이루어지기를 빈다.

덧붙이는 글 |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 / 어수갑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 2004년 11월 29일 1판 1쇄 / 값 1만 2000원


베를린에서 18년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

어수갑 지음, 휴머니스트(2004)


태그:#어수갑,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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