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신라 문무왕 때 조성된 안압지. 원래 못 이름은 월지였다.   조선 시대에 폐허가 된 그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안압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 신라 문무왕 때 조성된 안압지. 원래 못 이름은 월지였다. 조선 시대에 폐허가 된 그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안압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 김연옥

관련사진보기


날마다 되풀이되는 단조로운 일상이 삶의 든든한 힘이라고 한다면, 마음의 잔잔한 떨림으로 길을 떠나는 여행은 그 일상을 새롭게 받아들이며 잘 버텨 나가게 해 주는 버팀목이다. 더욱이 옛사람들이 걸어온 삶의 흔적이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아름답게 다가오는 여행길에서는 신선한 감동과 함께 내가 서 있는 자리를 한번 돌아보게 된다.

지난해 마지막 달 29일에 나는 통영여고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김건선 선생님 부부, 유치원에서 놀이 수학을 지도하는 조수미씨, 중학생 혜진이와 같이 경주 여행을 떠났다. 오전 8시 10분에 마산에서 출발하여 9시 20분께 김해에서 조수미씨, 혜진이와 합류하여 경주 괘릉(사적 제26호,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능리)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20분께였다.

신라 문화, 서역인 무인석을 품다

경주 괘릉 입구에 있는 당당한 모습의 무인석.  서역인의 얼굴이라 매우 인상적이었다.
▲ 경주 괘릉 입구에 있는 당당한 모습의 무인석. 서역인의 얼굴이라 매우 인상적이었다.
ⓒ 김연옥

관련사진보기


신라 제38대 원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괘릉(掛陵). 신라 사람들의 예술 경지를 한껏 보여 주고 있는 곳이다. 왕릉이 조성되기 전 그곳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원형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유해를 수면 위로 걸어 안장했다는 속설로 인해 괘릉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원성왕(재위 785〜798)의 본명은 김경신으로 왕으로 추대된 이야기가 흥미롭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대신들은 당시 상대등(上大等)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은 김주원을 추대했다. 그러나 홍수로 인해 김주원이 알천(閼川)을 건너오지 못했고 이를 하늘의 뜻으로 믿은 대신들이 결국 김경신을 왕으로 추대하게 되었다는 거다.

경주 괘릉 입구에 있는 돌사자들의 모습.  
▲ 경주 괘릉 입구에 있는 돌사자들의 모습. 
ⓒ 김연옥

관련사진보기



괘릉을 중심으로 좌우 입구에 돌사자 4점, 문인석(文人石) 2점, 무인석(武人石) 2점과 화표석(華表石)이 마주하여 서 있는데 한데 묶어 보물 제14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돌사자들은 모두 바라보고 있는 방향과 자세가 각기 다르다. 돌사자 하나하나 마치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목덜미의 갈기나 꼬리 부분도 아주 섬세하게 처리되어 있어 놀랍다.

근엄한 얼굴을 하고 있는 문인석 또한 관복의 매듭까지 꼼꼼하게 조각해 놓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당당하게 서 있는 무인석은 힘이 넘쳐 흐르고 깊은 눈, 넓은 코, 숱이 많은 수염 등 서역인(西域人)의 얼굴이라 몹시 인상적이었다. 그 무인석에 대해 페르시아 사람이라는 주장도 있다고 하는데, 당시 동서 문화의 교류를 짐작하게 한다.

경주 괘릉 앞에서. (왼쪽)둘레돌(호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상 가운데 원숭이(申).   
▲ 경주 괘릉 앞에서. (왼쪽)둘레돌(호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상 가운데 원숭이(申). 
ⓒ 김연옥

관련사진보기


괘릉 봉분 밑의 둘레돌(호석)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어 있어  쥐(子), 소(丑), 범(寅), 토끼(卯) 등 열두 가지 동물이 각각 방향과 시간을 맡아 무덤을 지키고 보호하고 있다. 우리는 무덤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십이지신상을 감상하다 자기 띠의 동물이 나오면 아이처럼 좋아했다.

보리사터를 거쳐 할매부처가 있는 불곡으로

'할매부처'로 불리어지는 경주 남산불곡석불좌상.   
▲ '할매부처'로 불리어지는 경주 남산불곡석불좌상. 
ⓒ 김연옥

관련사진보기



신라 석수들의 뛰어난 미적 감각과 조각품에 녹아든 그들의 철학을 엿볼 수 있어 참 좋았던 괘릉을 뒤로 하고 우리는 남산 미륵곡석불좌상(보물 제136호, 경주시 배반동)이 있는 보리사를 향했다. 신라 시대의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그곳에 남아 있는 석불좌상은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로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 시대의 석불 가운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신라 시대의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경주 남산미륵곡석불좌상.   
▲ 신라 시대의 보리사터로 추정되는 곳에 남아 있는 경주 남산미륵곡석불좌상. 
ⓒ 김연옥

관련사진보기


엷은 웃음이 입가에 은은하게 번지는 듯한 둥근 얼굴이 푸근한 느낌이 들었다.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게 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서 배꼽 앞에 놓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악귀를 누르고 있는 모습이다.

광배(光背)에는 화불(化佛)과 보상화(寶相華) 등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보기 드물게 광배 뒷면에 가는 선으로 모든 질병을 구제하는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참으로 특이했다.

남산미륵곡석불좌상 광배 뒷면에 가느다란 선으로 새겨진 약사여래불.  
▲ 남산미륵곡석불좌상 광배 뒷면에 가느다란 선으로 새겨진 약사여래불. 
ⓒ 김연옥

관련사진보기



그곳에서 차로 10분 정도 가서 조금 걸어 올라가면 남산 불곡석불좌상(보물 제198호, 경주시 인왕동)을 볼 수 있다. 남산 동쪽 기슭에 있는 한 바위를 파고 깎아서 감실 속의 불상을 만들었다. 첫눈에 불상보다 인자한 할머니 형상을 하고 있는 도인(道人)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경주에서는 '할매부처'라고 부르고 있다 한다.

'할매부처' 앞에서 포즈를 취한 우리 일행.  
▲ '할매부처' 앞에서 포즈를 취한 우리 일행. 
ⓒ 김연옥

관련사진보기



돌 속에 지혜가 있는 것일까. 깊은 영성을 지닌 석공에 의해 탄생한, 따뜻한 인상의 할매부처님. 남산에 남아 있는 신라 석불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 듯한 그 모습에서 넉넉함과 친근함이 느껴져서 좋다. 계곡 이름도 부처 골짜기라는 뜻을 지닌 불곡(佛谷)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너무나 과학적인 첨성대에서 섬세한 손길의 안압지까지

경주 첨성대 앞에서.   
▲ 경주 첨성대 앞에서. 
ⓒ 김연옥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이풍녀 구로쌈밥집에 들어가서 늦은 점심을 하고 곧장 맞은편에 있는 첨성대(국보 제31호, 경주시 인왕동)로 갔다. 초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갔던 곳이다. 그런데 그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천문관측대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정사각형의 기단 위에 27단으로 원통형의 몸체를 쌓아 올리고 맨 위에 정자석(井字石)으로 처리를 했다.

몸체 남쪽 가운데에 나 있는 네모난 출입구 위로 12단, 아래로 12단으로 석단을 쌓아 1년 12달과 24절기를 상징하고 사용된 돌의 숫자도 362개라고 하니 예술적 미를 지녔을 뿐 아니라 참으로 과학적이다. 별자리, 혜성, 기후변화 등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농사 시기를 결정하며 나라를 다스려 나갔을 옛사람들의 지혜가 물씬 느껴지는 곳이다.

우리는 첨성대를 구경한 뒤 산책하듯 천천히 걸어가면서 경주 김씨의 시조 알지의 설화가 전해지는 계림(사적 제19호), 신라 궁궐이 있었던 월성(사적 제16호), 조선 영조 때 월성 안에 만든 얼음 창고인 석빙고를 구경했다.

손이 시릴 정도로 날씨가 점점 더 쌀쌀해졌지만 길 건너 임해전지(臨海殿址, 사적 제18호)로 갔다. 신라 왕궁의 별궁터인 임해전지는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거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풀기도 했던 곳으로 안압지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경순왕 5년(931)에 고려 태조 왕건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던 곳도 임해전이다. 안압지는 동궁의 원지(苑池)로 선인(仙人)들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한 세 개의 섬이 조성되어 있고 원래 이름은 월지(月池)였다. 조선 시대에 폐허가 된 그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안압지(雁鴨池)라고 부르게 되었다.

안압지의 물길을 찬찬히 살펴보는 우리 일행의 모습.  
▲ 안압지의 물길을 찬찬히 살펴보는 우리 일행의 모습. 
ⓒ 김연옥

관련사진보기



우리는 어디에서 보아도 끝이 보이지 않게 설계되어 있는, 그래서 서 있는 곳마다 다른 모습으로 와 닿는 안압지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연못으로 흘러드는 물길을 따라가 보았는데,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세심한 손길이 느껴졌다.

그날 경주의 문화유산을 몇 군데 답사하면서 우리들 삶 속으로 녹아든 옛사람들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이 놓쳐 버린 옛사람들의 지혜를 못내 아쉬워하면서 앞으로 걸어가야 할 내 삶에 대한 고민에 빠져 보았다.


태그:#서역인무인석, #할매부처, #첨성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