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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 백일 무렵, 이 때부터 내 무릎이 시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산바라지를 받는 동안 밤마다 도둑 샤워를 해서 그런 것 같다.
 아기 백일 무렵, 이 때부터 내 무릎이 시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산바라지를 받는 동안 밤마다 도둑 샤워를 해서 그런 것 같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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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테는 짐승 같은 구석이 있다. 추위나 더위, 몸이 아픈 것에 저항을 하지 않는 편이다. 그냥 받아들인다. 1999년 7월 7일 새벽, 아기 낳을 신호로 '이슬'이 비쳤지만 일터에 갔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샤워를 하고, 진통이 5분 간격으로 올 때 병원으로 갔다.

처음으로 아기 엄마가 된 그 밤은 몹시 더웠다. 어머니와 동생 배지현, 아직 눈을 못 뜬 아기와 나, 그렇게 넷이 뿜어내는 방의 온기는 열대 밀림 같았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나는 "창문 좀 열어" 하면서 동생을 깨웠다. 어느 틈엔가 어머니가 일어나서 바람은 산모한테 해롭다며 안 된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당신의 세 딸들에게 산바라지를 해 주지 못하셨다. 그게 한이 되어서 큰며느리가 낳은 아기 셋의 산바라지를 도맡으셨다. 막내며느리인 나도 퇴원하고는 어머니 집으로 가는 게 당연했다. 아버지는 보일러와 난로까지 켜 놓은 채로 나를 맞아주셨다.

 작년 제주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내 산바라지를 해주셨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이가 훌쩍 자라는 동안 나이 드셨다.
 작년 제주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내 산바라지를 해주셨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이가 훌쩍 자라는 동안 나이 드셨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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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고 잠자고 아기 젖주고... 시간이 너무 느려

나는 어머니가 바라시는 대로 최대한 움직이지 않았다. 잠을 자지 못하고 울기만 하는 아기를 안아서 어르는 일도 어머니 아버지가 하셨다.

나는 밥만 잘 먹으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하루 다섯 번씩 새로 밥을 하고, 미역국을 끓이셨다. 내 입맛을 돋우려고 소고기와 조개·멸치를 번갈아 넣으셨다.   

전통적인 산모 역할을 하며 누워서 할 일은 아기 젖 주기와 잠자기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출산 선물로 받은 책이 몇 권 있었지만, 어머니는 "작은 글씨 읽으면 눈 버린다"고 걱정하셨다. 아기를 낳고나서 몸의 모든 기능이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100일이 걸린다며 그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셨다.

사실, 내가 어머니를 모르던 시절에 어머니한테는 '의학적 카리스마'가 있었다. 동네에서 하나뿐이던 어머니네 '점빵'은 문구점·채전가게·어물전·잡화점·약국까지 겸했다. 동네 사람들은 시내에서 약사가 조제해주는 약보다 어머니가 '처방'해 주는 약을 높이 쳤다.

아기와 누워 지내는 동안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장마가 물러가고 햇볕이 쨍하던 날, 거실에서 시린 눈으로 바깥을 보던 것도 생생하다. 퇴근한 남편 차가 멈추는 소리, 아기가 울지 않고 젖을 먹는 소리는 기뻤다. 아기 낳고 닷새째부터는 어머니 아버지가 주무시는 소리를 들을 때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나는 밤마다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일어나 도둑 샤워를 했다. 꽁꽁 싸맨 옷차림에서 벗어나는 순간순간이 날아갈 듯 좋았다.

목욕탕 창으로 들어온 솔바람이 맨 몸에 감겨드는 느낌을 확실하게 느낄 때면 걱정은 됐다. 그러나 이누이트(에스키모) 산모들은 아기를 낳자마자 얼음 구덩이에 들어가기도 한다는데, 뭘.

맨 몸에 찬바람... 괜찮을 줄 알았다

한 달 뒤,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 동안 입던 옷들은 옷장 속에 집어넣고, 어깨를 드러낸 윗옷과 짧은 바지를 입었다. 어머니 아버지가 어서 몸을 추스르라고 해 준 보약을 챙겨먹지 않았는데도 몸은 하루하루 가뿐해졌다. 다시 일터에 갈 때는 임신하기 전에 입었던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아기 낳고 두 달 뒤에는 남편이 속해있던 단체의 운동회에서 농구도 했다. 3점 슛을 쏠 만큼 힘이 있었다. 사람들은 "쟤, 아기 낳고 온 사람 맞아?"라고 했다.

나는 아기를 업고 집 뒷산을 달려 다녔다. 아기는 전생에 일제 강점기 시대의 독립군이었다가 잠 안 자는 고문에서 무릎을 꿇기라고 한 건지, 잠들지 못하고 늘 울었다.

 태어나서 24개월이 되도록 줄기차게 울었던 아이는 소문이 자자했다. 지금도 할머니 집에 가면, 동네 사람들이 "너 지금도 우냐?" 하며 놀린다.
 태어나서 24개월이 되도록 줄기차게 울었던 아이는 소문이 자자했다. 지금도 할머니 집에 가면, 동네 사람들이 "너 지금도 우냐?" 하며 놀린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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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백일 될 무렵부터는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나는 무릎이 시렸다. 해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았다. 마라톤 하프 코스를 달리고, 아기 젖을 떼고는 지리산 종주를 할 수 있게 됐는데도, 찬바람에 맞설 수는 없었다. 이제는 한 여름에도 이불을 걷어차고 자면 무릎이 시려 깰 때도 있다. 

사람들은 그런 내게 "소문이 아닌 진짜"라며 무서운 얘기들을 해 줬다. 어떤 이는 아기를 낳고 몸을 뜻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어떤 이는 이빨이 몽땅 빠졌다고 했다.

그런데 충치 하나 없는 건강한 이를 가졌던 나도 잇몸이 나빠져서 몇 년째 치과를 들락거리고 있다. 지금은 이를 뽑아내고 임플란트를 하는 중이다.

우린 누워서 산후조리해야 하는 한국 산모다

어릴 때에 친척 고모가 밭을 매다 집에 와서 여섯 번째 아기를 낳고, 바로 밭으로 가서 일을 하고, 저녁에는 시부모님 밥상을 차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산후조리라는 것은 어머니들이 바라는 어떤 '이상향'이라고 여겼다. 단 하루라도 들일과 집안일에서 놓여나 남이 차려주는 밥과 국을 대접 받고 싶은 열망쯤으로 이해했다.

내 친구는 한국에서 첫 아이를 낳고 친정어머니에게 산바라지를 받았다. 둘째는 뉴욕에서 낳았다. 병원에서는 아기를 낳자마자 걸으라면서, 누워 있지 말라고 했다. 심지어 옆에 있는 미국 산모는 아이스크림까지 먹더란다. 그 친구는 둘째 낳은 지 3년이 넘었지만 살도 빠지지 않고 몸도 여기저기 아프다고 했다.

나는 무릎에 바람이 든 느낌을 알고 난 뒤에야 '어른'스러워졌다. 그래서 후배들이 아기 낳고 누워있는 산부인과에 가면 "꼭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해라, 안 그러면 나중에 아프다"고 말해준다.

하지만 그 애들은 산후조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예전의 나처럼, 반쯤은 흘려듣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카이사르도 말했다.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본다"고.

우리는 외계에서 온 생명체가 아닌 인간, 그 중에서도 바람을 쐬지 않고, 누워서 산후 조리해야 하는 한국인이다. 산모가 본능대로 보고 행동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는 거나 마찬가지, 아기 낳기 전으로 돌아가는 길은 아득해져 버린다. 삭신은 쑤시고 이는 흔들린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 이 아이를 낳고, 무릎이 시리고, 이가 흔들리면서, 나는 비로소 '어른'스러워졌다...^^
 얼마 전 크리스마스. 이 아이를 낳고, 무릎이 시리고, 이가 흔들리면서, 나는 비로소 '어른'스러워졌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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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후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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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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