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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민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와 대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명박 후보에게 투표할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여기서 코끼리는 미국 공화당을 상징하는 동물이다)의 표지에 있는 글 첫문장에서 ‘보수 정당’만 ‘이명박 후보’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여기서 보수정당은 미국의 공화당을 지칭한다. 미국의 진보정당(미국 민주당을 진보정당이라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을 수 있겠지만)의 고민이나, 한국 정치 상황에서의 고민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선이 끝난 후 그 결과에 대해 숱한 분석과 평가가 이어지고 있지만, 이명박 후보의 독보적인 압승으로 끝난 이 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바로 이 질문이 될 것이다.

 

'도대체 왜 서민들이, 때로는 노동자들이, 재벌을 옹호하고 신자유주의 정책 강화를 통해 양극화를 심화시켜 결국에는 그 피해를 고스란히 전가하게 될 한나라당을, 그리고 이명박 후보를, 피해 당사자들이 지지하는 것일까?'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이 책의 저자인 조지 레이코프의 핵심적인 대답을 그대로 옮겨본다.

 

“…서민들이 보수 정당의 정책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사실’을 알고 이해하기만 하면 돌아설 것이라고 진보진영은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혹은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생각은 환상이다. 진실만으로는 자유로워질 수 없다.

 

사람들은 자기의 가치체계와 그 가치를 떠올리게 하는 언어와 ‘프레임’에 근거하여 정치와 후보자에 대해 판단을 내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이익과는 반대로 투표하는 것이다. 그들을 투표소로 들어가게 하는 동기는 바로 그들의 가치-보수주의자의 경우에는 엄격한 권위주의적 가치-이다. 프레임, 곧 생각의 틀을 바꿔라.”

 

이 책의 핵심개념인 ‘프레임’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다. 따라서 프레임을 재구성하는 것은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사회적 변화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프레임은 언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프레임을 구성하는 것은 자신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언어를 취합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조지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바로 '세금 구제(tax relief)'라는 용어를 반복해서 사용했다. '세금'이라는 말에 '구제'가 붙음으로 인해 세금의 고통으로부터 구제한다는 의미가 됬는데, 이 용어는 곧 세금은 고통이고 그것을 없애는 사람은 영웅이고 그를 방해하는 자는 나쁜놈이라는 프레임을 만든다.

 

저자가 강조하는 프레임의 기본 원칙 중에 상대편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치려면 상대편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원칙이 있다. 공화당에서 사용하는 ‘세금 구제’란 말을 민주당에서도 사용하게 되면 결국 공화당의 프레임에 포섭되는 결과가 되는, 즉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는 격이 된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옮긴이가 후기에서 든 사례지만 2006년에 <중앙일보>는 “양극화 해소인가, 중산층 되살리기인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담론의 ‘프레임’을 선점하려는 시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양극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한국 사회의 빈부 격차가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보수 진영의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프레임의 덫에 갇히는 결과가 된다. 여기서 <중앙일보>는 ‘양극화’라는 프레임을 공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중산층 되살리기’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려고 한 것이다.

 

17대 대선은 결국 두 개의 프레임이 지배한 선거였다. 바로 ‘경제를 살리겠습니다’ 프레임과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프레임이다. 사실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는 이명박 후보만 쓴 게 아니다. 6%든 8%든 대부분의 후보가 경제성장율 목표를 제시하면서 경제를 살리겠다고 했고, 양극화를 해소하겠다는 공약도 거의 모든 후보가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 이명박 후보는 진작부터 경제를 살리겠다는 프레임을 선점했고 이는 참여정부가 잘 한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정만이 부각되는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프레임과 상승효과를 일으켜 거의 과반수에 이르는 지지의 쏠림현상을 초래했다.

 

당분간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프레임의 효과는 진보진영이 다시 살아나고 대중의 지지를 얻는데 지속적으로 걸림돌이 되고 발목을 잡을 것이다. 어쩌면 이명박 정부의 정책 부작용이나 부정적 결과까지도 진보진영의 책임으로 돌려질 수도 있다. 한 번 잃은 신뢰와 지지를 회복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장기적인 계획과 치밀한 전략, 뼈를 깎는 반성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진보진영의 회복을 위한 장기적 전략은 진보의 프레임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미 ‘민주’와 ‘개혁’을 내세우는 것은 진보가 독점할 수도 없을 뿐더러 국민적 관심이나 시대적 요구와도 동떨어진 낡은 프레임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

 

진보진영이 왜 국민의 관심과 지지를 얻지 못하고 외면받았는지에 대해 ‘프레임’ 개념에 입각해서 원인을 분석해 보아야 한다. 진보가 외면받은 것은 정책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그 정책을 대중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대중들은 정책이나 프로그램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대중들은 진보가 어떤 이상을 대변하는지, 자신의 가치와 부합하는지, 원칙이 무엇인지, 그것이 이 나라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자 하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진보진영이 정말 해야 할 일은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프레임을 구성하고 선점하는 일이다. 저자가 주장하듯이 가치, 원칙, 정책방향이 담긴 ‘열 단어로 요약 가능한 철학’이 필요하고 이를 대중에게 쉽게 각인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찾아가야 한다.

 

단기간의 쉬운 인기회복을 위하여 중도를 가장하고, 보수의 언어와 프레임을 사용하여 보수의 주장에 대항한다면 오히려 그들의 프레임만 더욱 굳게 다져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삼인(2006)


#대선#이명박#프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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