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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당선인이 각종 규제의 폐단을 지적하며 생생한 사례로 `전봇대'를 소개한 대불산단 모습. 산단내 전선지중화 사업이 추진중이나 아직도 도로를 가로지르는 전선이 남아 대형 블록이송에 지장을 주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당선인이 각종 규제의 폐단을 지적하며 생생한 사례로 `전봇대'를 소개한 대불산단 모습. 산단내 전선지중화 사업이 추진중이나 아직도 도로를 가로지르는 전선이 남아 대형 블록이송에 지장을 주고 있다. ⓒ 연합뉴스 형민우

오지·벽지를 포함해 전국 어느 곳이든 전기가 공급되는 지역엔 전봇대가 서 있고, 그 숫자는 780만개를 넘는다. 5m~15m 정도 높이에, 통상 50m 간격으로 세워져 있지만, 일정한 것은 아니다. 전기줄의 무게와 최대풍속, 전신주의 높이, 강도 등을 모두 고려해 전봇대의 간격을 정한다고 한다.

군대 시절 전봇대의 간격이 공중에 있는 비행체를 소총으로 맞추기 위한, 즉 예측사격을 위한 기준이 된다고 배웠다. 예를 들어 머리 위로 적군의 전투기가 날아온다고 하자. 미리 1, 2, 3, 4번의 전봇대를 정해놓고 전투기가 1번 전봇대 위를 날아올 때 4번 전봇대 위를 향해 소총을 쏘면 명중시킬 확률이 높다고 한다. 전투기보다 느린 헬리콥터의 경우에는 4번이 아니라 2번 전봇대 위를 향해 사격을 해야 한다.

위급할 땐 전봇대가 네비게이션으로도 쓰인다. 산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경우, 핸드폰이 있다고는 하지만 주변에 특별한 지형지물이 없어 자신의 위치를 설명하기 난감한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산 속 깊숙이 들어와 있는 전봇대를 찾으면 된다.

전봇대 옆쪽을 보면 알루미늄판 같은 곳에 숫자와 알파벳이 조합 돼 쓰여져 있다. 전봇대의 고유번호다. 우리나라를 바둑판처럼 나눠서 지역에 고유숫자를 부여하고, 다시 알파벳으로 나눈 것이다. 119에 휴대전화를 걸어 이 번호를 불러주면 구조 요청자의 위치를 반경 25m까지 파악할 수 있어 기존의 이동전화 위치정보보다 훨씬 정확한 위치를 알려줄 수 있다. 전기공급의 필수설비인 전봇대가 위급상황시에는 생명을 구하는 역할까지 하는 셈이다.

<오마이뉴스>가 소설가 이외수와의 인터뷰에서 "당신에게 소설은 어떤 의미냐"고 물었다. "쉽지 않은 질문이네"라며 망설이던 이외수가 소설을 전봇대에 비유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전봇대 같은 것 아닐까요? 비판자들에겐 오줌 누기 좋은 지저분한 기둥에 불과하겠지만, 그 위에 걸쳐있는 전깃줄을 통해 인간세계의 정신과 내면을 밝혀주는…."

이 당선인 말 떨어지기 무섭게 뽑혀진 전봇대

흔하디 흔한 전봇대 얘기를 꺼내들었는데, 어찌하다보니 철학적으로 빠졌다. 최근 전남 영암군 대불산업단지의 다리 위에 있는 전봇대 2개가 '국가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전국의 수많은 전봇대 중에서 유독 그 2개의 전봇대만이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입에 올랐으니, '국가적 관심사'가 맞다. 다음은 이 당선자가 지난 18일 인수위 간사회의에 참석해 한 말이다.

"지난 해 목포 대불공단에 가 봤는데 공단 길 건너편 교량에서 대형트럭이 커브를 트는데, 거기 폴(전봇대)이 서 있어서 잘 안 된다. 그 폴을 옮기는 것도 몇 달이 지나도록 안 된다고 하더라. 산자부 국장에게 물었더니, '도(道)도 권한이 없고 목포시도 안 되고 산자부도 안 되고...' 폴 하나 옮기는 것도 안 된다. 아마 지금도 안 됐을 거다.(웃음) 이런 식으로 하니까... 실제로 지방 가면, (대불공단에) 한 번 들러보려고 한다. 오늘 말했으니 아마 됐을꺼야.(웃음)"

이 당선인의 말이 떨어지기기 무섭게 산자부 공무원들이 대불공단으로 달려갔고, 산박업체 대표들은 이들을 향해 불만을 쏟아냈다.

"2003년부터 선박조립 공장들이 들어선 뒤 5년간 전선을 땅에 묻고 전봇대를 없애달라는 민원을 끊임없이 제기했으나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선박블록을 운반할 때마다 전봇대와 전깃줄을 곡예하듯 피해가거나 잘라야 되는 심정을 아느냐?"

전남도와 영암군은 2004년부터 80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38.6㎞ 구간을 대상으로 착수한 지중화 사업을 진행 중이고, 올 상반기까지 80% 이상 전봇대를 제거할 방침이다. 현재 땅에 묻힌 대불산단 전봇대는 전체 대상 364개 가운데 30%인 133개이다. 비용은 한전과 영암군, 업체들이 나눠 내기로 했다고 한다.

지난 20일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궂은 날씨였지만 대불산단내 휴스틸 사거리에 있는 문제의 전봇대 이설작업이 진행됐다. 이 당선인의 '전봇대 발언'이 나온 지 3일만이다. 비오는 날에는 감전의 위험이 높아 가급적 작업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지만 '국가적 관심사'가 된 이상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한국전력 영암지사 전력공급팀장과 협력업체 직원 등 13명이 참여해 오전부터 시작한 작업은 5시간만에 끝났다. 대한세라믹스 쪽에 있던 전봇대 한 개가 3m 가량 뒤로 옮겨졌다. 휴스틸 쪽에 있는 다른 한 개도 2~3일안에 옮겨질 예정이다.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21일 오전 이 소식을 '씁쓸한 뉴스'라며 소개했다.

"당선인이 대불 산업단지 전봇대를 말한 지 이틀만에 제거되는 현장을 보면서 '아니, 그럼 지난 5년간 어떻게 된 일이냐'고 질문 할 수밖에 없다. 높은 분이 이야기하면 5년 걸릴 것이 5일 안에 해결되는 탁상행정은 끝나야 한다. 지금까지 경제, 국가 선진화 가로 막는 게 이런 전봇대 아니었나. 단순히 실질적인 전봇대가 아니라 마음의 전봇대가 더 문제다."

김형오 부위원장도 "전봇대 사건이 공직사회 변화의 첫 신호라고 한다면, 조직법은 대한민국 변화의 첫 시작"이라며 이날 인수위의 안을 당론으로 채택해 한나라당이 발의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의 처리를 강조했다.

두 개의 전봇대는 순식간에 '이명박식 규제 완화'의 상징이자, '공무원 탁상행정'의 표본이라는 별칭을 동시에 얻었다. 지난 5년간 '전봇대 하나' 옮기지 못한 참여정부 공무원들의 탁상행정은 국민적 비판의 대상이 됐고, 상대적으로 이 당선인의 '실용 정부론'은 큰 기대감을 낳았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21일 삼청동 인수위 대회의실에서 열린 농업인단체대표들과의 간담회에서 참석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21일 삼청동 인수위 대회의실에서 열린 농업인단체대표들과의 간담회에서 참석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오히려 업체에선 "생색내기 탁상행정 원성"

전국에 산재해 있는 780만개의 전봇대 중 2개가 3일만에 사라졌다는 것은 사실 큰 일도 아니다. 문제는 일련의 모든 일들이 이 당선인의 '말 한마디'로 가능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 당선인의 '말씀'만 남았을 뿐, 그 말을 뒷받침 할 근본적인 해결 방안이나 시스템은 마련되지 않았다. 특히 그동안 인수위가 보여줬던 '월권을 넘어선 오버' 행태도 이번엔 찾아볼 수 없었다. 앞으로도 이 당선인의 '말씀'이 있어야만 일의 추진이 가능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는 대목이다.

당장 두 개의 전봇대를 없앤 것에 대해 가장 앞장서서 박수치고 환영해야 할 대불단지 업체들로부터 볼멘 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봇대 2개가 뽑혀나갔다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점이 대부분 풀린 것으로 인식되는 것에 대한 불만이다.

실제 대불산단에서 블록을 운송하는 업체(안전기업)를 운영하는 한금철 대표는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왜 쓸데없는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 우리 운송 업체 입장에서는 휴스틸 사거리 모퉁이에 있는 전신주(전봇대)를 뽑은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완전히 생색내기용 아니냐"고 성토했다.

대형트럭이 운행을 하면서 생기는 진짜 문제는 8차로를 가다가 휴스틸 사거리에서 좌회전 할 때 6차로로 좁아지는 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금철 대표는 "일을 제대로 하려면 6차로 라인에 있는 전신주와 전선을 인도 밖으로 빼줘야 2~3m라도 노폭 확장 효과가 발생하는데 모퉁이 전신주 2개 없애고 일을 다한 것처럼 하는 것은 그야말로 전시행정"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한 대표는 "이번에 뽑았다는 전신주도 이 당선인이 지적한 전신주가 아니다"며 "쓸데없이 거기 있는 전신주 몇개 뽑고 자화자찬식으로 발표하면 되느냐"고 질타했다.

대불산단 내에서 선박블록 생산업체(유일)를 운영하고 있는 유인숙 대표 역시 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뉴스 보고 깜짝 놀랐다. 이 당선인에게 말씀 드린 것은 전신주 한 두 개 옮겨달라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옮겨달라고 한 건데, 한 두 개 옮겨놓고 다 된 것처럼 대대적으로 보도되니까, 가슴이 더 답답하다"고 지적했다.

생산업체들이 지난 2006년 9월 당시 이명박 당선인을 만나 건의한 것은 ▲ 전신주 및 전선 지중화 ▲ 수송에 지장을 초래하는 가로수, 가로등 이설 ▲ 교량 하중 보강 ▲ 간선도로 일부 구간 중앙분리대 조정 등 4건이었는데, 그 중 전선 지중화 사업 조차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불산단의 문제는 낡은 아파트단지를 통째로 고치듯 정부가 앞장서서 기반시설의 리모델링을 하지 않으면 땜질식 처방에 그칠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대불산단내 업체들에게는 3일만에 뽑혀나간 두 개의 전봇대가 오히려 '애물단지' 노릇을 한 셈이다.

실제 손학규 대통합민주신당 대표는 21일 인수위와 한나라당의 정부조직법 개정안과 관련 절차상의 문제를 지적하며 "마치 전봇대 뽑듯 일방적으로 강요해서 통과시키겠다는 것은 오만과 독선"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 정부에 대한 탁상행정 질타가 이 당선인과 인수위에 부메랑이 돼 돌아오는 형국이다.


#이명박 당선인#전봇대#인수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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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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