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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종 살인자> 판관 디 공이 등장하는 1958년 작품
▲ <쇠종 살인자> 판관 디 공이 등장하는 1958년 작품
ⓒ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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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전 로마에 디디우스 팔코가 있었다면, 중국 당나라 시대에는 판관 디 공이 있었다. 디 공의 본명은 디런지에. 당나라 시대에 실존했던 이름난 정치인이었다. 공직에 종사했던 인물이라서 '디 공(公)'이라고 부른다.

디 공은 630년에 태어나서 700년에 사망했다. 지방 여러 마을에서 수령 생활을 하며 어려운 사건들을 여러 차례 해결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나중에는 중앙정부의 형부상서라는 요직에 오르기도 했다.

이런 실존인물 디 공을 추리소설의 주인공으로 재창조한 작가는 네덜란드의 로베르트 반 훌릭이다. 이 작가는 오랫동안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중국의 역사와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고, 작품을 통해서 실존인물이었던 디 공을 중국의 명탐정으로 부활시킨 것이다.

반 훌릭의 작품 속에서 디 공이 활동하던 시기는 7세기의 당나라다. 당나라는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타타르 족을 정벌해서 북쪽으로도 영토를 넓혀가고 있었다. 이 시기 당나라는 서기 1세기의 로마처럼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반면에 당나라의 일반 서민들 생활은 그다지 윤택하지 못했다. 빈부격차는 여전히 심하고, 그 간격이 줄어들 것 같지도 않다. 부유한 남자들은 여러 명의 부인을 두고 살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자식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다.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은 푼돈과 금붙이를 훔치고, 돈 많은 사람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더 많은 재물을 모으려고 한다. 이런 점도 1세기의 로마와 비슷하다.

추리소설로 재창조 된 실존인물 디런지에

디 공은 이런 상황에서 당나라의 지방수령 생활을 시작한다. 16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이제는 40대의 장년이 된 인물이다. 디 공은 작은 마을 푸양, 베이저우 등을 옮겨다니면서 수령생활을 한다. 디 공은 훤칠하고 어깨가 떡 벌어진 체격에 수염을 기르고 있다. 부정부패와는 거리가 먼 강직한 인물이다.

세 명의 부인과 여러 명의 자식을 거느리고 있다. 항상 자신을 믿고 따르는 4명의 심복부하도 있다. 디 공의 부임지가 바뀔 때마다 이들도 모두 함께 움직인다. 디 공은 마을 관아의 집무실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부인과 자식들이 있는 집에 와서 잠을 잔다.

마을에서 살인이나 실종사건이 발생하면, 디 공은 이 4명의 심복과 상의하면서 사건을 수사한다. 이 4명 중에서 3명은 과거에 건달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다. 그 도중에 우연히 디 공을 만나게 되었고, 디 공의 인품에 매료되어서 그때부터 디 공의 심복이 되었다.

건달생활을 했던 전력이 있어서인지, 이들은 지하세계의 생리를 잘 알고 있다. 마을에서 사건이 터지면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동네의 부랑자들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디 공의 심복부하는 거지로 변장해서 이들과 어울리고, 노동자로 위장해서 사원에 숨어든다. 거짓으로 흥정하고 물건을 거래하는가 하면, 대저택에 숨겨진 통로나 장치가 있지 않나 은밀히 조사하기도 한다.

이들을 지휘하는 인물은 디 공이다. 디 공이 수령으로 부임한 읍은 대부분 조용하고 인구도 그리 많지 않은 곳이다. 얼핏 보아서는 강력범죄와 거리가 먼 마을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잔인하고 엽기적인 사건들이 종종 발생한다. 강간살인사건이 터지는가 하면, 머리없는 시신이 발견되기도 한다.

디 공은 그때마다 특유의 추리력으로 사건을 추적한다. 디 공의 수사 방향은 일반 백성들의 짐작과는 반대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이 용의자로 지목한 인물을 무혐의로 풀어주는가 하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단서에 관심을 기울인다. 용의자를 함정에 넣기 위해서 교묘한 심리전을 벌이기도 한다.

디 공이 이런 방법들을 사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증거보다 자백을 우선시했다. 아무리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나오더라도, 범인이 자신의 죄를 자백해야지만 유죄가 인정되었다. 거꾸로 표현하자면 명백한 증거가 발견되더라도, 범인이 계속 오리발을 내밀면 처벌하기가 곤란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작은 마을에서 수령생활을 하는 디 공

<쇠못 살인자> 판관 디 공이 등장하는 1961년 작품
▲ <쇠못 살인자> 판관 디 공이 등장하는 1961년 작품
ⓒ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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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용의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고문이 허용되었다. 디 공은 합리적이고 영특한 수사관이지만, 당시의 이런 관행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디 공도 용의자에게 질문하면서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고문을 가한다.

그 고문이 지나쳐서 피의자가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고, 그 사실이 상부에 보고 된다면 디 공의 관직생활도 무사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 때문에 디 공은 피의자에게 고문을 가할 때 항상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고문은 언제나 마지막 수단이다. 디 공은 유능한 수사관이기 때문에 피의자가 범인이라는 완벽에 가까운 확신이 없다면, 쉽게 고문을 가하지 않는다.

이렇게 디 공은 부임하는 마을마다 많은 사건을 해결한다. 때로는 커다란 쇠종에 갇히기도 하고, 때로는 수년 전에 매장한 무덤을 파헤치기도 한다. 실수를 해서 분노한 마을 주민들에게 '관리를 죽여라!'라는 항의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명탐정들이 그렇듯이, 최종적인 승리는 디 공의 몫이다. 푸양에서도, 베이저우에서도 마을의 백성들은 결국 디 공을 마음 깊이 믿고 따르게 된다. 한 마을에서 백성들과의 인연도 그렇게 오래 가지는 못한다. 임기가 끝나면 곧장 식솔을 데리고 다른 마을로 옮겨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른 곳으로 부임하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하는 꼴이다. 새로 부임한 마을에 적응하고, 전임자가 처리했던 사건의 기록들을 모두 훑어본다. 미심쩍은 기록이 있으면 관련자들을 만나서 다시 검토하고 파헤친다. 그리고 거의 매일 백성들이 가지고 오는 크고 작은 송사와 마주한다. 끔찍한 살인사건을 들고오는 백성도 있고, 과자가격을 놓고 벌어진 시비를 가려달라고 오는 사람도 있다.

디 공은 베이저우 수령생활을 마지막으로 수도 장안으로 떠난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동안의 사건수사업적을 인정받아서 당나라의 황제가 직접 그를 중앙 형부의 책임자로 임명한 것이다. 황제의 칙령을 앞에두고 디 공은 깊은 생각에 잠긴다. 과거시험에 합격했을 당시에, 이제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회상한다.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으로 진출하는 디 공

당시 디 공의 아버지는 '벼슬이 높으면 그만큼 고독해지는 법이야'라고 조언해 주었다. 디 공은 그 말을 듣고 '남자는 역경과 고독 속에서 크는 법 아닐까요'라고 대답했다. 과거시험에 갓 합격한 혈기왕성한 10대 시절인 만큼, 당시에 디 공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제 디 공의 나이는 어느덧 40대 중반, 황제의 칙령을 앞에 두고 당시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면서 슬프게 짓던 미소를 이해할 것도 같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많은 책임이 따르고, 그 책임이 자신의 몫인 만큼 자신은 고독해질 것이다.

장안으로 올라가면 그동안 허물없이 지내오던 심복들과의 관계도 조금씩 어색하게 변해 갈지 모른다. 디 공은 황제가 있는 장안 쪽으로 절을 하면서도 자신의 좋은 시절은 지나버렸다고 직감적으로 느낀다. 하지만 꽁무니를 빼고 달아날 수는 없다. 디 공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쇠못 살인자>에서 디공은 분노한 마을백성들에게 둘러싸이는 상황에 처한다. 마을백성들은 관아로 몰려와서 돌을 던지며 디 공에게 항의한다. 폭동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어서 군 수비대 사령관이 '마을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할 정도였다.

강철같은 디 공은 그런 상황에서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마을의 수령은 자기 자신이고 마을 주민들은 자신의 백성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다고 당당한 모습을 보인다. 디 공은 유능한 관료이자 수사관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백성을 믿었던 선량한 수령이었던 셈이다. 황제가 자신에게 주었던 커다란 책임을 느끼면서도 물러서지 않은 것은 백성에 대한 그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쇠종 살인자

로베르트 반 훌릭 지음, 이희재 옮김, 황금가지(2005)


#추리소설#판관 디 공#로베르트 반 훌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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