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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지의 매월당 흔적을 찾아서

 용장사지에서 올려다 본 3층석탑
 용장사지에서 올려다 본 3층석탑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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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륜대좌불과 마애여래좌상을 보고 다시 바윗길을 3~4분 내려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용장사지 가는 길이 나온다. 조금 방심하면 그냥 용장골로 내려갈 수도 있으니 신경을 써야 한다. 용장사지는 비교적 좁은 공간으로 지금은 축대만 남아 절터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한쪽에 세워진 표지판에 '용장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다'고 써있는 것을 보니 이곳이 용장사지임에 틀림없다. 또 이곳에서 산 정상 쪽을 바라보면 3층석탑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정말 고고한 모습을 보여준다.

현재 용장사지 주변에는 대나무 군락이 조성되어 있다. 대나무 하면 절개를 상징하는데 생육신으로 이곳에 은거하며 세태를 비판했던 매월당의 정신과도 상통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그런데 절터 한가운데 두 기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어 마음이 아프기도 하다. 세월의 무상함을 탓하기에 앞서 인간들의 이기심이 먼저 보이는 것은 나도 이기적이기 때문일까?

 용장사지 축대
 용장사지 축대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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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장사지에 있는 두 기의 무덤
 용장사지에 있는 두 기의 무덤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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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1465년 (세조 11) 금오산에 들어와 이곳 용장사에 경실(經室)을 짓고 수도와 집필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34세 때인 1468년 그의 대표적인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완성했다. 매월당은 용장사 경실에 머물던 감회를 <매월당시집>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시기는 음력 2월로 보인다.

용장사 경실에 머물던 감회                       居茸長寺經室有懷

용장산 골짜기가 아주 고요해서                 茸長山洞窈
사람의 왕래를 볼 수 없구나.                     不見有人來
가랑비가 시냇가 대나무를 일깨우고           細雨移溪竹
저녁바람이 들판의 매화를 감싸는구나.       斜風護野梅
집안의 작은 창도 잠에 빠져 있고               小窓眠共鹿
마른 가래나무도 여전히 회색을 띠고 있네.  枯椅坐同灰
초가 처마 쪽 밭두둑이 알지 못하는 사이     不覺茅簷畔
마당 꽃밭에 꽃이 지고 또 피는구나.           庭花落又開


매월당 김시습이 용장골로 스며든 까닭은?

 김시습 영정
 김시습 영정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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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은 1455년 삼각산 중흥사(重興寺: 현재 태고사 지역)에 머물던 중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알고는 모든 책을 불태운 다음 승려가 된다. 법명을 설잠(雪岑)이라고 하고 천하를 주유한다. 관서와 관동, 호남을 거쳐 경상도 금오산 아래 용장골로 스며들어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독서에 몰두한다. 그는 다시 용장사로 올라가 매월당서재(梅月堂書齋)를 마련하고 시문과 소설을 쓴다. 이때 완성된 시가 <금오산에서 놀던 기록(遊金鰲錄)>이고 한문소설이 <금오신화(金鰲新話)>이다.
 
김시습은 어릴 때부터 명리(名利)를 추구하지 않고 청빈하게 의리를 지키는 것이 꿈이었다. 그는 산수를 찾아 방랑하며 좋은 경치를 만나면 시로 읊는 것을 즐겼고 문장으로 관직에 오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더욱이 자신이 생각하는 도를 펼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홀로 그 몸이라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용장골 산속으로 스며들었던 것이다.

 용장골에서 바라 본 금오산
 용장골에서 바라 본 금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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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에서 놀던 기록>에는 김시습이 금오산을 중심으로 한 경주의 자연과 문화유산에서 느낀 감정과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선방사(禪房寺)’라는 시에서는 쓸쓸하게 비바람 불고 고양이와 쥐들만이 왔다 갔다 하는, 중 없는 절을 묘사하고 있다. ‘오릉(五陵)’에서는 궁궐의 남쪽 남산 북쪽에 있는 오릉이 신라를 세운 임금의 무덤임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이제 찾는 사람도 없고 비갈(碑碣)도 하나 없이 토끼와 여우가 노니는 곳이 되었음을 아쉬워한다.

 동경에서 발행된 <금오신화>
 동경에서 발행된 <금오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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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에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등 5편의 소설이 들어 있다. 김시습은 이 소설 속에서 허구적인 인물을 동원하여 신비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가 진정으로 보여주려고 한 주제는 현실적인 제도 인습 그리고 운명에 대한 비판이었다.

용장골을 내려가며 김시습과 헤어지다

 용장사지에서 내려오며 만나는 대나무 군락
 용장사지에서 내려오며 만나는 대나무 군락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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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사지를 떠나 아래로 내려가면서 우리는 계속되는 대나무 군락을 본다. 약 10분쯤 내려 오니 이엉재골과 탑상골이 만나는 지점에 이른다. 이곳에는 최근에 만들어놓은 아치형의 현수교인 설잠교(雪岑橋)가 보인다. 이 다리는 금오산의 선계와 속계를 나누는 경계선처럼 느껴진다. 이 다리를 건너니 이제는 오르내림이 거의 없는 평탄한 길이 펼쳐진다.

골짜기에 작은 시내가 흐르고 그 옆에 너럭바위가 있어 우리가 지나온 용장사와 금오산 쪽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용장사지 3층석탑이 보인다. 하얀 바위 위에 고고한 자태로 금오산 아래 속세를 굽어보고 있다. 주변에는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가 있어 흰색의 바위 그리고 흰색의 탑과 잘 어울린다.

 선계와 속계를 나누는 설잠교
 선계와 속계를 나누는 설잠교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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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골에서 시작해 금오산을 오른 다음 용장골로 내려오면서 우리 일행은 정말 많은 문화유산을 보았다. 그리고 금오산 용장사에 머물렀던 훌륭한 두 선인 대현스님과 설잠스님을 만났다. 자연과 문화유산이 그 자체로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면, 대현과 설잠은 그들이 남긴 글과 이야기로 우리를 감동시킨다. 더욱이 이름 모를 석공들이 이곳 남산에 남긴 수많은 예술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김시습#용장사지#용장골#「금오산에서 놀던 기록」#『금오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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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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