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TV 역사픽션 <대왕세종>에 상당히 꼬장꼬장한 인물 하나가 나온다. 충녕대군의 스승인 이수(李隨, 1374~1430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도 없을 것 같고, 권력 주변에는 일절 근접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저런 선비가 왜 왕실에서 왕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을지 모른다.
아무튼 <대왕세종>에서 이수는 매우 청렴결백하고 지조 있는 충녕의 사부로 나온다. 그는 때로는 격해서 반말까지 내뱉으면서 충녕에게 백성을 위한 길, 진정한 성군의 길을 가르친다. 세자도 아닌 제3왕자에게 그는 '가르쳐서는 안 될 것들'을 가르친다. '저런 스승이 있었기에 저런 성군이 나왔구나'라는 느낌이 들도록 하기에 충분한 캐릭터다.
충녕의 스승 이수는 고려 공민왕 재위시기인 1374년에 출생한 인물로서 충녕대군에게는 당시로서는 아버지뻘(23세 연상) 되는 사람이었다. 태조 5년인 1396년 생원시에서 합격자 99명 중에서 1등을 차지한 그는 성균관 재학 시절에 대사성 유백순의 추천으로 시학(侍學)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시학이란 왕이나 왕자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직책이었다. 그와 충녕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제자인 충녕의 국왕 즉위로 그는 출세길에 오르게 되었다. 세종 즉위 이후에 그가 역임한 관직 중에서 대표적인 것들로는 황해도관찰사·예문관제학·이조참판·예문관대제학·이조판서·병조판서 등이 있다. 이처럼 이수는 세종의 재위기간에 높이 쓰임을 받은 측근 관료였다.
이수, 충녕의 즉위로 출세길에 오르다그러나 그는 1430년에 현임 병조판서의 신분으로 불의의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는다. 그때가 세종 12년이었다.
드라마 상으로는 그가 마지못해 왕실의 선생 노릇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 점 부끄럼 없는 인격의 소유자인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빈틈마저 없을 것 같기도 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지만, 그의 실제 행적 속에는 드라마 상의 이미지와 충돌하는 장면들이 포착된다. 그런 장면들 중에서 흥미로운 세 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물론 아래와 같은 사실관계가 그의 인격을 좌우하거나 그의 인생 자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다만, TV 드라마 속의 이미지와 부합하지 않는 중요한 사실관계가 있음을 이야기할 뿐이다.
어쩌면, 실제의 이미지와 드라마의 이미지가 약간 다르게 된 것은, 드라마 <대왕세종>이 충녕의 성군적 자질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나타나게 된 부수적 결과인지도 모른다. 충녕이 이미 세자 양녕대군 시절부터 성군이 되는 길을 닦았음을 부각시키려다 보니, 그의 스승인 이수의 탁월성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드라마 상의 이미지와 충돌하는 첫 번째 팩트는 이수가 충녕의 스승으로 발탁되는 과정이다. 그가 시학으로 추천된 태종 7년(1407) 7월 28일(음력)에 조선 왕궁에서는 그를 두고 흥미로운 대화가 오고갔다.
참고로, 역사 관련 저술에서 '태종 7년(1407)' 하면 그 다음의 월일은 음력을 가리키고, '1407년(태종 7)' 하면 그 다음의 월일은 양력을 가리킨다. 태종 시기의 월일은 음력으로밖에 알 수 없기 때문에, 월일까지 표기해야 하는 경우에는 '태종 7년(1407)'으로 시작하고, 월일을 표기할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그냥 '1407년(태종 7)'이라고 쓰면 된다.
아무튼 이 날 국왕 이방원이 오늘날로 치면 국립대학 총장인 성균관대사성 유백순을 불러들였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유백순을 부른 이방원은 "한성판윤 김과가 우리 아이들 교육을 맡아주면 좋겠지만 그가 요즘 너무 바쁘다"면서 "성균관에 우리 아이들을 가르칠 만한 유생이 없겠느냐?"고 질문한다. 그러면서 이방원은 "만약 그 유생이 잘 모르는 점이 있으면 권근에게 물어보도록 하면 된다"고 덧붙인다.
국왕 이방원의 말은, 김과가 왕자 교육을 맡아주면 좋겠지만 그가 매우 바쁘기 때문에 성균관 유생들 중에서 한 명을 추천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성균관 유생이 부족한 점이 있다면, 권근의 도움을 받도록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대타로 충녕의 스승이 되다이방원의 하문을 받은 유백순은 자신의 지도를 받고 있는 성균관 유생들 중에서 34세의 이수를 추천하면서 "그의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학문도 정숙하다"며 추천 사유를 들었다.
34세의 이수와 11세의 충녕은 이렇게 해서 서로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생원의 신분을 벗지 못한 이수로서는, 드라마에서처럼 큰소리를 치며 왕자들을 가르칠 만한 처지는 분명히 아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방원 입장에서는 그가 최선이 아닌 차선의 '스페어'였다는 점이다. 물론 바쁜 김과를 대신해서 임명되었다고 하여 그의 지도능력이 낮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그가 처한 실제 상황과 드라마 속의 상황 사이에 약간의 온도차가 있음을 지적할 뿐이다.
두 번째 팩트는 그가 세종 즉위 이후에 저지른 몇 건의 스캔들이다. 위에서 성균관대사성 유백순이 이수를 가리켜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학문도 정숙하다"고 했는데, 이수가 과연 그런 인물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될 것이다.
세종 집권 초기에 황해도관찰사가 된 그는 얼마 안 가서 사헌부의 탄핵을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세종실록> 세종 4년(1422) 2월 29일자 기사에 따르면, 황해도 관찰사 이수가 음탕한 짓을 저질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가 기생을 데리고 황해도 관내를 돌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기생과 함께 나란히 말을 타고 다니기도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는 해임되는 날에도 기생을 데리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막강한 금상(今上)의 사부를 사헌부가 탄핵한 것을 보면, 그 정도가 매우 지나쳤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세종의 처분은 좀 공정치 못한 편이었다. 같은 음탕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은 하형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곤장 80대를 치고 직첩을 회수하도록 한 데 비해, 이수에 대해서는 자신의 스승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용서해주기로 했다. 이수는 이듬해에 예문관제학으로 다시 관계에 복귀한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은, 이수가 예문관제학으로 복귀한 1423년에도 또 다른 스캔들에 휘말렸다는 점이다. 이때는 세종 즉위 당시의 사건이 뒤늦게 발각되어 또 한 번의 홍역을 치르게 되었다.
세종 5년(1423) 9월 29일자 기사에 따르면, 이수는 이발(李潑)과 함께 태종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명나라에 갔다고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김을신·최윤복으로부터 모종의 사례금을 받은 일이 있다. 그 일 때문에 그는 예문관제학의 자리에서 면직되고 말았다.
이처럼 그는 세종 초기에 섹스 스캔들과 뇌물 스캔들로 국왕의 얼굴에 먹칠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수가 제자 덕분에 고속 출세하더니 저런 음탕한 짓을 저질렀다"며 비웃었다고 한다.
섹스 스캔들과 뇌물 스캔들로 국왕의 얼굴에 먹칠을...세 번째 팩트는 그의 최후 장면이다. 그는 57세에 사망했지만, 그것은 천수를 다한 것이 아니었다. <세종실록>의 '이수 졸기'에 따르면, 그는 병조판서로 있던 1430년(세종 12)에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왜 죽었을까?
이수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말에 올라탔고, 그 말 위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요즘으로 치면,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망사고를 당한 셈이다. 일국의 장관이 술에 취한 상태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차'에 올라탄 것은, 음주운전을 단속하지 않는 당시의 관점으로 보더라도 분명히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대왕세종>에 따르면 매사에 빈틈없었을 것 같은 그는, <세종실록>에 따르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사망하고 말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몇 가지의 사례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드라마 속의 이수와 실제의 이수 사이에는 몇 군데의 언밸런스한 측면들이 나타난다. 드라마 속의 이미지는 약간 괴팍할 것도 같기도 하고 꼬장꼬장할 것 같기도 하지만, 실제의 그는 섹스·뇌물 스캔들로 제자를 욕보이고 마지막에는 음주운전으로 사망사고까지 당한 인물이었다. 어쩌면 그는 평범한 인격을 소유한 고위 관료 정도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몇 가지 '티'만 갖고 그의 인생이나 인격 전체를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런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종의 치세를 보좌한 주요 측근 중 한 명이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서도 그를 세종대의 명신으로 분류해놓고 있다.
다만, 결코 완벽하지 않은 이수가 왜 드라마에서는 그처럼 완벽하게 묘사되고 있는가 하는 점만큼은 한번쯤 음미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대왕세종>의 제작진이 이수를 직접적으로 띄우려다가 나온 결과라기보다는 세종의 성군적 자질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다 보니 나오게 된 부수적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세종은 분명 훌륭한 군주였다. 하지만 양녕대군이 세자였을 때부터 충녕이 남몰래 성군의 정치적 자질을 키우고 있었다는 '다소 억측 같은' 메시지를 전달하려다 보니, 이수 같은 평범한 인물까지 고매한 인격자로 포장되는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