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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무렵 가을이었으니 사십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다.

 

그 날 논에서 돌아오신 아버지가 올 망태에서 볏짚으로 투박하게 묶여진 참게를 몇 마리 꺼낸 것까지는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가을이면 물 마른 논에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게들이 지천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네 최고 일꾼이라고 소문난 아버지가 가을걷이 일거리를 잔뜩 놔둔 채, 대낮에 집으로 들어오신 거 하며, 아직도 꼼지락 거리는 꽤 많은 게들을 손본 다음 모두 국솥에 던져 넣으시는 것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평소 같으면 유일하게 저장할 수 있는 방법인 간장독으로 들어가야 할 게들이었다.

 

이해할 수 없던 아버지의 행동

 

아무리 어머니 없이 사는 우리 부자지만 표 안 나게 돌봐주시는 고모님이 한 동네에 사시기에 아버지가 직접 요리하는 일은 드물었다. 더구나 아버지가 끓인 국이나 찌개는 최악이어서 슬슬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무당이신 고모님이 먼 길 굿하러 떠나셨다고 해도, 미리 만들어 주신 몇 가지 반찬으로 고모 돌아오실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는 걸 나도 잘 알았다. 아버지가 끓인 국을 또 억지로 맛있는 척 해야 하는 저녁 식사시간을 생각하면 그저 앞이 캄캄할 뿐이었다. 정히 게 찌개를 잡숫고 싶다면 좀 기다렸다가 고모님한테 맡기면 될 것을, 그 맛있는 참게 또 다 버리게 생겼다는 마음에 괜히 조바심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나중에 고모한테 해달라고 그러지….”
“거치적거리니 저리 나가라. 가만, 마늘이 어디 있더라.”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자 유일한 가족인 내 의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아버지는 계속 요리에 몰두하셨을 뿐만 아니라 섭섭하게도 나를 부엌에서 곧바로 쫓아내셨다. 부엌문까지 떠밀려 나온 나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 아버지의 행위를 막을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체념하고는 어설픈 부엌살림 다루는 아버지 솜씨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내 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렇게 아버지는 여러 가지 재료들을 솥에 던져 넣으시는데, 가만 보니 허둥대시는 중에 나름대로 꽤 정성을 들이는 눈치셨다.

 

‘그래봐야 그 맛이 뻔할 텐데….’

 

온갖 부엌을 헤집어 놓으시며 기어이 국솥이 완결된 듯하자, 뒤주에서 쌀을 한 바가지 퍼 오시더니 정성스레 씻으셨다. 다른 때와 달리 보리쌀을 섞지 않는 걸 보면서 나는 다시 한마디 안할 수 없었다.

 

“오늘 우리 제삿날이야?”
“아, 저리 가래두.”

 

나는 억센 팔에 튕겨져 나와 알 수 없는 아버지의 행위를 그저 쳐다만 보고 있는데, 더 이상한 것은 아궁이에 불을 다 지핀 아버지가 건넌방 술독에서 큰 바가지로 한 가득 술을 떠다가 거르시는 모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가 건넌방에 항아리를 들여놓고 술을 담가 냄새 고약한 며칠을 보내야 했던 일도 영문 모를 일이었다.


평소 아버지는 술을 드시지 않았다. 한 잔만 드셔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아버지는 동네 어른들이 아무리 권해도 술을 사양했었다. 그런 아버지가 당신 손으로 술을 담그신다는 것은 처음 보는 일이자 기묘한 일이었다.

 

아무리 제삿날이라 해도 우리가 무슨 대갓집처럼 으리으리한 제사를 지낼 일이 없기에 시장에 가서 약주 한 병 사다가 지내면 그만이었다. 더구나 제사에 쓴 술은 퇴주까지 도로 술병에 따라서 고모부한테 갖다 드렸다. 그런 날이면 의례히 고모부는 주무시지도 않고 기다리기 때문이었다.

 

“아부지두 인제 술 잘 먹어?”

 

삼발이 받침대 위에 체를 올려놓고 술을 거르는 아버지는 이제 내 질문엔 대답도 않고 연신 술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셨다. 도대체 아버지 속을 알 수 없는 나는 그냥 방으로 들어가 배를 깔고 숙제 공책을 펼 수밖에 없었다.

 

‘고모 오면 다 일러야지.’

 

그 순간 내 맘 속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게를 끓일 때부터 아버지가 은근히 나를 무시했던 것에 심통이 별로였던 것이다. 아버지보다 열두어 살 연상이신 고모님은, 고모부의 고주망태 성분을 워낙 진저리 치시는 분이라 평소 술을 멀리 하는 아버지를 대견해 하셨다. 그렇기에 아버지의 오늘 소행을 고모에게 일러바친다면 에누리 쳐준다고 해도 며칠은 잔소리를 들어야 할 판이라는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외다리로 나타나신 아버지의 고향 친구

 

그렇게 그날 저녁 아버지의 이상한 행동을 그냥 애써 잊으려 노력하면서 숙제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대문가에서 누군가에게 큰 소리로 반가워하는 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얌전하시던 아버지 목소리로는 드문 일이었다. 연필을 내던지고 일어나 마루로 뛰어나가 보니 대문 앞에서 난생 처음 보는 아저씨를 아버지가 얼싸안고 있었다.

 

이어서 내 눈엔 처음 보는 이상한 물건이 들어왔다. 그 낯선 아저씨가 들고 있는 쇠붙이 목발이었다. 다시 보니 그 아저씨의 한쪽 다리엔 발 대신 가는 나무토막으로 받쳐져 있었으며, 바짓단은 접혀서 그 중간쯤에 걸쳐져 있었다. 그 아저씨가 나를 보고는 씨익 웃으면서 아버지께 말했다.

 

“자네 아들인가?”
“그렇다네.”

 

간이 얼어붙은 내가 그 아저씨한테 어떻게 인사를 했는지 지금도 기억이 없다. 나는 그 날 저녁, 그 아저씨와 마루에서 마주 앉은 아버지가 엄청나게 많은 술을 드시는 것을 안방에서 창호지 문구멍으로 내다보았다.

 

큰 소리로 떠드시다가 무슨 일인지 두 분은 가끔 목이 잠기기도 했고, 어떤 땐 말없이 흐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내 귀가 더욱 쫑긋 서게 된 것은 그 아저씨가 인민군이었다는 이야기에서였다. 서슬 퍼런 지금 시대에 어떻게 공산당 아저씨가 대로를 활보할 수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장님네 뛰어가서 신고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까지 될 지경이었다.

 

어쨌든 그 아저씨는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가셨는데, 아버지는 그 아저씨 가실 때, 한 배미 이른 벼 베어 판돈을 다 내 주시면서도 무척 아쉬운 표정이었다. 다음 날 그 아저씨 가시고 나서도 아버지는 일 하실 생각은 않고 또 혼자 술을 드셨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막 돌아온 나를 붙들어 앉히더니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씀하셨다.

 

“어저께 왔던 그 아저씨가 이북에 있는 아부지 고향 친구란다. 전쟁 전에 나는 월남했는데, 그 친구는 고향에 남았다가 결국엔 인민군에 입대를 하게 되었다는구나. 그런데 전쟁 중에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됐는데, 포로 교환 때 북쪽으로 안 가고 남쪽에 남았다지 뭐냐. 나를 찾으려고 그토록 애를 썼다니 이렇게 만난 게 다행이긴 하다만, 20년 만에 만난 친구가 저 꼴이 되어 있으니 아부지 마음이 많이 아프구나.”

 

두분의 우정 앞에 부끄러움을 느낀 젊은 아들

 

그날 눈물 흘리시던 아버지가 아직도 생생한데, 얼마 전 그분의 빈소 앞에서 우시는 아버지 모습이 그대로였다. 그래도 자식은 넷씩이나 두셨고, 근자에 큰 아들 사업이 제대로 풀려서 다른 형제들도 함께 그 사업을 일구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아버지는 흡족해 하셨다.

 

나는 향을 피우며 힘든 인생을 사셨을 고인께 작별을 고하면서 늙으신 내 아버지와 지속적인 교류를 나누어 주신 아저씨 앞에 감사했다. 모진 세월을 사시면서도 친구의 우정을 잃지 않으신 어르신들 앞에서 어찌나 내 자신 초라한 모습으로 다가오던지.

 

아저씨, 고마웠습니다.


#아버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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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 장편소설 (족장 세르멕, 상, 하 전 두권, 새움출판사)의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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