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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에 있는 내게 간만에 찾아온 일상...

 

고산병이 심할 때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회색이었다. 멀리 가네쉬 1봉의 만년설도, 랑탕히말라야의 파란 하늘도. 들리는 것도 없었다.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히말라야 까마귀들의 우짖는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였다.

 

멋진 풍광을 카메라에 담아야한달지, 친절한 셰르파와 얘기를 나눈달지 하는 것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두 발 움직이는 것조차 귀찮은데 누군가와 말한다는 것은 피곤한 일일뿐이었다. 짜증이 절로 났고, 그저 앉아서 쉬고만 싶었다.

 

그런데 아스라이 펼쳐진 가네쉬 1, 2, 3봉이 눈에 들어왔다. 동네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게 했다. 고소증상이 많이 약해졌다는 신호였다. 점심 휴식을 위해 브라발(해발 2300m)에 있는 나마스떼 롯지에 도착한 정오 무렵부터였다.

 

창백해진 얼굴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약간의 시장기도 돌았다.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다가 공책에 몇 줄 메모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랑탕 히말라야의 햇볕은 이 모든 걸 따습게 감쌌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범하게, 마치 언제나 그랬다는 듯 익숙하게. 일상은 그렇게 고산(高山)에 있는 나를 찾아왔다. 한가롭고 느린 오랜 친구의 방문…, 일상은 그렇게 또 반복되었다.

 

간만에 찾아온 일상의 여유를 만끽하며 롯지 한 켠에 있는 나무의자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왜 내게 고산병이 찾아왔을까?’

 

고산병 증상에 따라 몸과 마음의 변덕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었다. 몸이 힘든 건 둘째치더라도 심한 감정의 기복은 내가 고산병의 노예가 돼있음을 확실하게 가르쳐 주었다. 

 

바로 그때 오만과 조소로 운명이 바뀌어버린 하루트와 마루트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루트와 마루트, 훔볼트와 나...

 

이슬람 신화에는 하루트와 마루트, 두 천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두 천사는 인간들이 지상에서 저지르는 살인, 간음 등 온갖 추악한 범죄를 보며 조소한다. 그러자 신은 천사들이 지상에 내려가면 얼마나 버틸지 시험해보자고 제안한다.

 

하루트와 마루트는 “저런 죄악은 나약한 인간이나 저지르는 것”이라고 큰소리치며 지상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이들은 지상에 내려가자마자 미녀의 유혹에 빠져 간음을 하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죄를 목격한 이를 죽여 버린다. 

 

신은 죄악을 저지른 두 천사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심판의 날까지 바빌로니아에 있는 한 우물 속에 거꾸로 매달려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 후부터 선(善)의 상징이었던 천사 하루트와 마루트는, 바빌로니아에 악을 가져온 타락한 천사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아닌 척했지만 나는 오만함을 모두 털어내지 않은 채 히말라야에 들어섰다.

 

삼십년 넘는 세월을 이 곳 히말라야가 아닌 다른 곳에서, 다른 섭생을 하며 살아온 나다. 히말라야에게 나는, 그의 품안에서 숨 쉬는 나무도, 꽃도, 풀도, 돌도 아니다. 그러니 어찌 선뜻 받아들일 수 있고, 선뜻 안길 수 있단 말인가. 고산병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산병이 공기가 희박한 고산지대의 산소 부족 때문이라는 것을 최초로 밝혀낸 훔볼트(Alexander von Humboldt)도, 어지럼증에 구토증상을 보이는 나도 모두 이방인일 뿐이다. 훔볼트는 훌륭한 박물학자며 탐험가였지만 라틴아메리카의 이방인일 뿐이었고, 나 역시 지금 히말라야의 이방인일 뿐이다. 안데스 산맥의 현지 주민들이, 히말라야의 현지 주민들이 고산병을 앓는다는 얘길 들은 적 있는가.

 

이 산맥을, 이 산을 무시하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열심히 걷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 산맥이, 이 산이 낯선 나를 어떻게 여길지 전혀 생각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수십 년 다르게 살아온 내가, 이 산맥에 산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지 않았다.

 

말과 머리로는 난 충분히 겸손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내 심장은, 내 마음은 어설픈 오만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세상의 현실을 알려고 하지도 않은 채 오만하게 조소하다 결국 인간세상의 덫에 걸려버린 천사 하루트와 마루트처럼 말이다.

 

휴식을 마친 일행들이 배낭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번엔 먼저 나서서 대열 맨 끝을 자청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움직였다.

 

얼마쯤 걸었을까. 다시 손끝이 저려오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고산병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마음은 동요 없이 편안했다. 나절로 랑탕 히말라야가 나를 안아주기 위해 그러는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태그:#히말라야, #고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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