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봉에 가려면 봉화대능선을 지나야 한다
신선암 마애보살좌상을 보고 남산 정상인 고위봉까지 가려면 봉화대능선에 올라야 한다. 봉화대능선은 금오봉과 고위봉을 연결해주는 주능선으로 금오산의 대연화대에서 고위산의 봉화대까지 이어진다. 봉화대라는 이름은 해발 476m에 위치하고 있는 봉화대 때문에 생겨났다. 이 봉화대 능선에서는 그동안 올라온 봉화골 골짜기와 칠불암 그리고 신선암이 아주 가까이 내려다보인다.
우리 일행은 고위봉으로 바로 오르지 않고 이곳 봉화대 정상을 지나 고위봉으로 오르는 길을 택한다. 신선암에서 약 20분쯤 가니 봉화대가 나온다. 봉화대란 국가의 비상사태시 불이나 연기를 올려 소식을 전하는 시설물이다. 현장을 보니 봉화나 봉수를 올렸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봉화대의 기반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축대만이 남아 있다. 전국에 산재해 있는 봉화터에 가보면 대개 봉화(수) 시설은 대부분 없어지고 이런 식으로 축대만 남은 경우가 많다.
봉화대에서 고위봉 정상으로 가는 능선은 오래간만에 동서로 이어진다. 지도를 보니 동쪽의 바람재에서 봉화대에 오른 다음 백운재를 거쳐 고위봉에 오르는 것이 고위산 주능선 오름길이다. 그리고 고위봉 정상에서 열반재, 360m봉을 지나 틈수골로 내려가는 것이 고위산 동서종주가 된다. 고위봉 정상에서는 또 남쪽으로 천룡재를 넘어 433m의 천왕지봉으로 갈 수도 있다.
고위봉에서 만난 사람들봉화대에서 백운재를 지나 고위봉 정상까지는 약 20분 정도 걸린다. 길은 비교적 평탄한 편이다. 정상에 오르니 오후 3시이다. 사람들은 많지 않은 편이고 가족 단위 또는 작은 인원의 단체들이 가끔 보인다. 우리는 주변을 한번 조망하고 아래에서 준비해 간 동동주를 꺼낸다. 정상 주변에는 참나무와 소나무들이 많아 조망은 그리 시원치가 않은 편이다. 그래도 500m 가까운 고지를 올라서인지 동동주가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우리가 정상에서 동동주 마시는 걸 보고 한 잔 주기를 원하는 팀이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술을 한잔 건네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지만 산이라는 것 때문에, 술이라는 것 때문에 이렇게 쉽게 어울린다. 우리가 먼저 ‘나홀로 테마여행’ 팀에서 왔다고 소개를 하자, 그들은 울산에서 왔다고 자신들을 소개한다.
또 다른 팀은 가족으로 이루어져 있다. 형제와 처남 매부지간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어른 남자가 셋, 여자가 둘, 애들이 둘, 간난쟁이가 하나이다. 그 간난쟁이를 팔에 안고 여기까지 올라왔다. 카메라로 그들을 찍어주면서 행복이 바로 가까이 있음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그들에게 명함을 하나 받으면서 사진을 보내주기로 약속한다.
또 다른 팀은 비구니 스님이 이끌고 왔다.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사회복지시설을 운영하는 것 같았다. 같이 온 사람들이 운영자들과 그 원생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보다도 조금 늦게 올라온 스님 일행은 먼저 백운암 쪽으로 내려간다. 우리와는 길이 조금 다르다. 우리는 천룡바위를 거쳐 천룡사로 내려간 다음 천룡골로 하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천룡바위, 천룡사, 천룡사지 3층석탑
고위봉에서 약 20여분 내려가니 용의 이빨처럼 생긴 바위들이 모여 바위군을 형성하고 있다. 바위 주위를 소나무들이 감싸고 있어 마치 용이 배를 타고 떠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 바위가 바로 천룡바위이다. 이곳 천룡바위에서 서쪽 방향으로 내려다보니 천룡사 고원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다.
천룡바위에서 남쪽으로 10분쯤 내려가니 천룡재가 나온다. 이곳에서 나는 방향을 서쪽으로 틀어 천룡사로 내려간다. 이 길은 완전 흙길로 경사가 심한 편이다. 천룡사에 도착하니 스님이 겨울땔감을 톱으로 자르고 있다. 스님이 울력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본다. "애쓰십니다"하고 인사를 하니 스님도 미소로 반응을 보인다.
절을 잠깐 들러 본다. 그렇게 오래돼 보이지 않는 법당으로 일상의 주택을 절로 개조한 것 같다. 이름은 고위산 천룡사라고 붙여 놓았는데, 역사 속의 천룡사는 아니다. 절 뒤로 용두암이 보이고 그 능선이 고위봉 쪽으로 이어진다.
천룡사를 조금 내려오니 밭으로 변한 넓은 평지에 대나무밭과 초가 형태의 집이 자리 잡고 있다. 집 바로 옆에는 맷돌, 돌쩌귀 등 석재가 보이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연화대와 석조 등이 흩어져 있다. 이 집도 역시 최근에 민가를 절로 바꾼 것 같다. 그러나 이 지역이 옛날 천룡사지였던 것은 분명하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삼층석탑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곳에는 연화대, 간주석, 대좌 주춧돌 등이 모여 있어 절터였음이 분명하다.
1996~1997년 이곳 천룡사지를 발굴한 국립 경주문화재연구소는 7개의 건물터를 확인했다. 금당, 중문과 회랑, 강당 등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천룡사지에 남아 있는 대표적인 문화재는 3층석탑(보물 제1188호)이다. 1990년 동국대학교 박물관 조사팀에 의해 3층탑으로 확인되었고, 기단 일부와 상륜부를 보충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탑의 높이는 6.75m로 뒤의 고위산과 어울려 날렵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축조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인 9세기경 작품으로 추정된다.
경주남산 동남쪽 종주 답사를 마감하며
천룡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온다. 경주 남산 남쪽에 봉우리가 하나 우뚝 솟아 있으니 사람들은 고위산이라고 한다. 산의 양지쪽에 절이 있는데 일명 고사(高寺)라고도 하고 천룡사(天龍寺)라고도 한다. 고위산에서 시작한 물이 천룡사를 지나 기린내로 흘러드는데 이 물이 천재(天災)를 진압하지 못하면 천룡사가 뒤집혀 몰락하는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토론삼한집(討論三韓集)>은 전한다고 일연 스님은 쓰고 있다.
그리고 671년 중국에서 온 사신 악붕귀가 천룡사를 보고는 이 절을 파괴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 했다고 한다. 절이 파괴되어 신라가 망했는지, 아니면 신라가 망해 절이 파괴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천룡사는 신라말 파괴되어 폐사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고려 초 문하시중까지 오른 최제안(?~1046)이 1040년 이 절을 중수하여 석가만일도량(釋迦萬日道場)을 설치하게 된다.
이후 언제 이 절이 다시 폐사되었는지 하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매월당집>에 나오는 김시습의 시를 통해 조선 초 천룡사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초에 이미 절이 모두 흙에 묻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고려시대 정도까지 절의 모습이 유지되었을 것 같다.
천룡사에서 옛날을 느끼다. 天龍寺感舊 제안의 두 딸 이름이 천녀와 용녀인데 齊顏二女號天龍이들이 오래 살도록 부처궁을 지었다네. 爲祝延齡作梵宮。옛날 일이 이미 진토가 되어 꿈같은데 往事已成塵土夢。공허한 하늘 산새가 바람을 부르누나. 空餘山鳥自呼風。
나는 천룡사지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기 위해 석등 부재, 주춧돌, 석조 등을 살펴보았지만 과거와 연결시킬만한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사지에 만들어진 밭을 통해 역사의 무상함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부도밭이 있다고 해서 찾아보려 애썼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부도에 새겨진 글씨를 통해 역사의 흔적을 찾아보고자 하는 노력도 인연이 닿지 않아서인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천룡사지와 작별을 고하고 30여분 내려오니 용장3리 틈수골에 이른다. 이곳에서 우리는 경주남산 답사 코스 중 가장 긴 동남쪽 종주 답사를 마감한다.